지난번에 방문했던 도향촌의 월병 맛에 무척 감동했던 것을 계기로, 이전부터 궁금했지만 아직 가 보지 못한 다른 월병 가게에도 한 번 다녀오기로 했다. 바야흐로 봄꽃이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3월 말의 토요일 오후, 이번에 다녀온 가게는 서울시 중구 북창동에 위치한 '융태행隆泰行'이다.
소공동주민센터 맞은편으로 나 있는 좁다란 골목길로 들어서서 조금 걷다 보면 4-5층짜리 건물들이 즐비한 가운데에 갑자기 한 곳, 빛이 잘 들지 않는 2층짜리 구양옥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만 세월이 멈춰 있는 듯한 느낌이다. 간판에는 멋스러운 예서체로 '융태행 제과'라고 쓰여 있다. 무려 서울미래유산 표지까지 붙어 있다. 하긴 이토록 오랫동안 정체성을 지키며 이어져 온 곳이 미래유산이 아니라면 어디가 미래유산이겠는가. 한참 동안 소리 없는 감탄을 하다가 안으로 들어간다. 바로 전날까지 비가 왔던 탓인지, 가게 현관 위의 캐노피에서 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니,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던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일어서며 나를 맞이한다. 융태행은 화교가 운영하는 화상華商인데, 일단 사장님이 생각보다 키가 무척 큰 데에 한 번 놀랐고, 완벽한 서울 사투리로 말씀하시는 데 한 번 더 놀랐다. "한국말을 어쩜 그렇게 잘 하세요?"같은 무례천만한 사고의 발로가 아니라, 거의 멸종한 줄로만 알았던 서울 사투리를 이토록 가까이에서 듣게 된 데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처음 왔는데 어떤 과자 종류가 있느냐고 질문하니 사장님께서 무척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셨다. 똑같은 디자인이 금박인쇄되어 있는 단색 상자가 세 가지, 상자날개에 '융태행'이라고 한자로 적혀 있는 장식상자가 두 가지 있다. 단색 상자는 모두 월병인데, 상자의 색에 따라 소의 종류가 다르단다. 빨간색 상자는 견과류와 건과일, 젤리가 들어 있는 '팔보월병八寶月餅', 녹색 상자는 팥소가 들어 있는 '두사월병豆沙月餅', 자주색 상자는 대추소가 들어 있는 월병이다. 한자로는 '조이棗膩월병'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디를 검색해 봐도 다들 '장원월병'이라고 표기하고 있어서 혼란스럽다. 나중에 사장님에게 한 번 더 이름을 정확히 여쭤 봐야겠다(이름을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지는 않고, 속재료만 말씀해 주셨다). 친절하게도 상자를 하나하나 까서 생김새를 보여 주면서 설명해 주셨다. 장식상자 중 붉은색 상자는 달걀 반죽을 튀겨 굳혀서 만든 '부용고芙蓉糕'이고, 주황색 상자는 호두 쿠키란다. 고소한 걸 찾으시면 이게 딱이라는 말씀까지 곁들이신다. 아쉽게도 집에 구워 놓은 과자가 좀 많이 있어서 호두 쿠키는 다음에 도전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팔보월병 한 상자와 두사월병 한 상자, 그리고 궁금한 나머지 부용고 한 상자까지 사서 돌아왔다. 가격은 전부 한 상자에 6,500원. 갯수로 치자면 썩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자 그럼, 이제 시식해 볼 차례다. 세 가지를 다 한번에 먹기에는 양이 다소 많아서, 이틀에 걸쳐 조금씩 시식해 봤다.
먼저 팔보월병. 이쪽은 견과류가 주가 된 소가 들어가기 때문에 예전에 도향촌에서 샀던 '십경월병'과 비슷한 맛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일단 두께부터가 다르다. 융태행의 월병은 전반적으로 얇은 편이고, 껍질이 무척 단단해 파삭하다는 인상마저 준다. '팔보'라고 쓰여 있는 과자를 반으로 갈라 보면 견과류와 건과일, 그리고 청사홍사 젤리로 된 소가 나타난다. 과자가 얇은데도 불구하고 소는 피 두께 대비 제법 충실히 들어가 있는 편이다. 한입 베어물어 보면, 은은한 단맛이 우선 입안을 감돈다. 그다지 퍽퍽하지는 않고, 건과일과 청사홍사 젤리가 나름대로 수분 공급을 해 줘서 목이 막히지 않게 먹을 수 있는 정도이다. 확실히 도향촌과는 방향성이 다르다. 도향촌 십경월병은 두툼하고 소가 견과류 위주로 되어 있어서 과자를 먹는다는 느낌보다는 한끼 식사용으로도 적절하다는 느낌이 물씬 드는데, 융태행의 팔보월병은 얇고 바삭하면서 달고 고소한 느낌이 전반적으로 균형 있게 느껴져서 보다 '과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앞서 도향촌 방문기에서 '월병에 대해 '퍽퍽하고 과하게 단 과자', '한두 입 먹으면 물리는 과자'라는 편견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융태행 팔보월병 또한 그러한 편견을 가볍게 옆으로 치워 주는 훌륭한 맛이었다. 이렇게 맛있는데 왜 물려?
두사월병과 부용고는 다음 날 뜯었다.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보이차까지 한 주전자 우렸다. 팥소는 기본적으로 달다. 달달한 반죽 안에 달달한 팥소가 더 들어간 것을 생으로 먹었다간 미뢰가 남아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반을 갈라서 확인해 보는데, 웬걸 팥소 색깔이 생각했던 거랑 좀 다르다. 우리가 늘상 팥빙수집이나 단팥빵 안에서 발견하던 팥과는 뭔가 좀 다르다. 뭐랄까. 팥 색깔이라기보다는, 음, 차라리 묵은 된장 색에 가까운 짙은 고동색이랄까. 어두운 밤색에 가까운 일반적 팥소와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입에 넣고 씹어 본다. 놀랍게도 의외로 달지 않다. 물론 팥소니까 달기는 하지만, 혀가 녹아 버릴 정도로 달다기보다는 그냥 흔한 양과자 정도에서 기대할 만큼 은은하고 여운 있는 딱 그 정도의 단맛이다. 구수한 보이차 한 잔과 같이 먹으면 진가가 더욱 드러난다. 차와 같이 먹는 간식으로는 딱 좋다. 은근하게 계피 향 비슷한 것도 나는 것이, 차라리 약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역시나 전날 먹었던 팔보월병처럼 밸런스가 훌륭한 과자였다.
마지막으로 먹어 볼 것은 계란 섞은 반죽을 튀겨서 만들었다는 '부용고'다. 해석하자면 '부용떡'인데, 여기서 부용은 무궁화 비슷하게 생긴 히비스커스 종류의 꽃을 말한다. 옛날에 안휘성에서 이 과자를 주로 만들어 먹을 때 생김새가 부용꽃 같아서 그렇게 지었다나. 지금 봐서는 부용꽃의 흔적은 전혀 간 데 없고 그냥 노란색 강정 느낌으로 생긴 과자인데, 사장님의 설명에 의하자면 계란을 섞은 밀가루 반죽을 튀긴 뒤 설탕을 녹여서 굳힌 거란다. 팔보월병에도 들어있던 청사홍사 젤리와 건포도 몇 점도 같이 굳어져 있다. 이것만큼은 도저히 맛이 상상이 안 되었는데, 한 조각 떼어서 입에 넣자마자 계란 특유의 고소한 향이 입안에 확 하고 퍼진다. 생각보다도 더욱 계란의 맛이다! 깨와 참기름이 살짝 들어갔는지 고소하면서도 계란 향이 비릿하지 않고 기분 좋게 물씬 피어나는, 정말 독특한 느낌의 과자였다. 차와 함께 먹으니 더욱 맛있는 것은 더할 나위 없다. 단 것을 나보다 잘 먹지 못하는 아내는 오히려 부용고 쪽이 물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단맛 일변도보다는 고소하고 살짝 간간한 느낌이 섞여 있는 것이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단짠단짠은 진리다. 사장님이 "입 안에 넣으면 살살 녹아내리는 맛이예요"라고 하셨는데, 바로 살살 녹아내리지는 않지만 입 안에 넣으면 바로 알갱이들이 파스스 하고 풀어지면서 고소한 풍미가 폭발적으로 터져나는 맛이다. 훌륭해.
화교 거리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도향촌'에 이어, 이번에는 북창동에서 화교가 운영하는 '융태행'까지. 생각지도 못하게 점점 중국 과자의 오묘한 세계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 같다. 다음에는 또 다른 맛 과자도 사 와서 먹어 봐야겠다. 융태행 사장님이 앞으로도 정정히 오래오래 운영해 주시기를 바란다. 또 찾아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