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종로꽃시장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서울역에서 드물게 출발하는 경의중앙선 열차 시간이 마침 어느 정도 여유 있게 맞을 것 같아서 서울역으로 향했는데, 흥미롭게도 '4월 바리스타와 강릉'이라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열차에 타서 멍하니 시간을 때우는 것보다는 훨씬 생산적일 것 같아서 한번 들러 보기로 했다.
매년 10월에 열리는 강릉 커피축제를 홍보하는 차원에서 진행하는 행사인 듯하다. 내가 이 전시를 찾은 것은 일요일 늦은 오후였는데, 이미 주된 행사인 시음회는 종료된 상태였다. 명주배롱이라는 곳에서 진행했다는데, 마침 이 날 커피를 한 잔도 하지 못한 상태였던지라 더욱 아쉬웠다. 그래도 커피가 우리의 식탁에 오르기까지에 대해서라든지, 커피 원두의 종류 등 기본적인 커피 정보에 대해서 나름대로 보기 쉽게 전시되어 있었다.
별 기대 없이 들어간 곳치고는 생각보다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강릉의 바다 풍경을 담은 영상을 소리와 함께 재생해 두어, 마치 강릉에 와 있는 듯한 임장감을 주려고 노력한 티가 난다. 차 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오늘날 커피 문화가 이렇도록 성하게 되었다는 것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예전부터 워낙에 물맛이 좋은 동네였다나. 제임스 호프만 선생이 물맛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기에 '영국인들은 식수가 본체 애매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반신반의를 품은 바 있었는데, 정말로 커피에건 차에건 좋은 물이 중요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다 쓴 커피가루를 가져다 주면 다양한 공작놀이를 할 수 있는 '커피 클레이'로 교환해 주는 곳도 있다. 커피가루를 섞어서 만든 지점토 같은 물건인 모양이다. 보통 이걸 갖고 커피 화분을 만들고는 하는데... 예전에 이런 재활용 커피 화분을 사서 써 봤다가 그만 지옥에서 올라온 뿌리파리 군단의 역습을 받고 학을 뗀 이후로는 커피가루로 된 화분은 다시는 사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같은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유기물을 좋아하는 뿌리파리 녀석들 특성상 커피가루 화분은 사실상 배양토 비슷한 물건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전시되어 있는 물품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 한 바퀴는 금방 돌아볼 수 있다. 공간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하고 궁금해서 다가가 봤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안내원이 다가와서 '블렌딩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 주셨다. 한 번에 20그램의 원두만 갈아서 봉투에 넣어서 가져갈 수 있단다. 산뜻하고 꽃향기가 나는, 로스팅 포인트가 낮은 원두가 한 병. 초콜릿 향이 두드러지는 강배전 원두가 한 병. 적절한 비율로 섞어서 무게를 잰 뒤 핸드밀에 넣고 간다. 마스크 안으로까지 커피 향이 터질 듯이 다가온다. 이 향긋한 커피 향, 이거거든. 커피는 가는 순간부터 이미 향이 날아가고 있으므로 최대한 빨리 밀폐하는 것이 좋다. 다 간 원두를 얼른 지퍼백에 넣고 지퍼를 굳게 닫아 준다. 이렇게 가져온 원두 가루로는 바로 다음 날 아침 즈음해서 깔끔하게 드립커피 한 잔을 내려서 먹었다. 갈아 온 지 열두 시간은 족히 지났는데도 풍부한 향미가 고스란히 살아났다. 과연 커피의 도시 강릉, 로스팅 하나를 해도 기똥차다.
이렇게 열차를 타기 전에 한 15분 간 전시를 한번 쭉 돌아봤는데, 오전 시간에 맞춰 와서 시음회를 참가해 보는 것도 재밌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소소하게 즐거웠다. 강릉커피축제 SNS를 팔로하면 머그컵도 준다! 이 글이 올라가는 5월 8일이 아마도 전시 마지막 날일 것인데, 짧은 시간 안에라도 혹시나 이 글을 보고 가고 싶은 마음이 드셨다면 한번쯤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덕분에 나도 강릉커피축제를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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