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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본여행|출장

'카미야 바'에서 '덴키브랑'이라는 것을 마셔 보았다

by 집너구리 2023. 5. 15.

모리미 토미히코[森見登美彦] 선생의 <유정천 가족>이라는 소설이 있다. 그 소설에 보면 둔갑술을 쓸 줄 아는 너구리들이 '가짜 덴키브랑'이라는 술을 만들어 저들끼리 마시고 때로는 인간에게 팔아먹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작자의 창작인 줄로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설이란 결국 꾸며낸 이야기인 까닭이다. 그런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이야기란 것은 결국은 지은이의 시대적 문화적 배경에 기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 또한 학창 시절에 교과서로 배웠다는 사실은 참 간과하기가 쉽다. 물론 그게 '모든 이야기는 그 모델이 되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는 뜻은 아니겠으나, 재미있게도 이번에는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다. 도쿄 아사쿠사에 가면 '가짜'가 아닌 '진짜' 덴키브랑이 팔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100년도 더 된 역사를 자랑하는 아사쿠사 시타마치의 바에서.

 

그것을 알게 된 이후로 어언 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도쿄에 갈 일은 그간 많았으나, 동선상 맞지 않거나 시간이 부족한 등의 이유로 직접 방문해 보지는 못했다. 심지어는 가게 앞을 스쳐 지나가는 경우도 왕왕 있었음에도, 기묘하게도 한 번을 들어가 보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홀로 출장으로 도쿄를 찾은 지난 3월, 비 오는 토요일 낮에 마침내 고대하던 덴키브랑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 났다. 이케부쿠로에서 있었던 지인과의 즐거운 티타임 이후, 한두 방울씩 듣기 시작하는 빗줄기를 제치고 아사쿠사로 향한다. 야마노테선 오츠카역에서 괜히 한 번 변덕을 부려 미노와바시로 가는 아라카와선으로 갈아탄다. 빗줄기는 점차 세차지고, 기대는 더욱 커진다. 술을 별로 즐기는 사람은 아니지만, 비 오는 날에 마시는 술은 또 각별하지 않겠는가.

미노와바시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센소지 근처에서 내려 잠시 걷는다. 고맙게도 내가 걷는 동안에는 비가 많이 안 오고, 뭐만 타면 비가 많이 온다. '도쿄도 다이토구 아사쿠사 1-1-1'이라는 위엄있는 주소를 자랑하는, 건물 전체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서양식 바, '카미야 바神谷バー'로 향한다. 무려 메이지 시대 초기인 1880년에 개업해 지금까지 멀쩡히 영업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노포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가게로 자리잡고 있다. 개업 2년 후인 1882년부터 만들어 팔기 시작한, 브랜디 베이스의 칵테일이 바로 '덴키브랑電気ブラン'이다.

'카미야 바'는 사실 이 건물의 1층에 있는 바의 이름이고, 그 위에는 경양식 레스토랑 '카미야', 또 그 위에는 일식 레스토랑인 '캇포 카미야'가 있다. 3층의 '캇포 카미야'는 현재 휴업 중이고, 덴키브량을 샷으로 맛보기 위해서는 1층 카미야 바를 가는 것이 제일 무난하다. 각 층의 메뉴를 파악하기 쉽도록 음식 모형이 1층 입구 옆에 쭉 늘어서 있으니 참고하는 것이 좋다. 

일단 1층으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 카운터에 나이 지긋한 점원이 서 있다가 주문을 받는다. 이것저것 시키고 결제를 하면 이런 티켓을 뽑아서 준다. 가지고 가서 아무 자리에나 빈 곳에 앉으면 점원이 와서 티켓을 확인하고 회수해 간다. 거의 앉자마자 확인하고 회수해 가시니 사진 찍는 걸 중시하시는 분들이라면 앉자마자 티켓을 펼쳐 놓고 바로 찍는 것이 좋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덴키브랑'이다. 무려 도수 30도를 자랑하는 제법 독한 술인데, 브랜디 베이스에 와인, 진, 큐라소와 몇몇 약초를 넣어 만든 칵테일이다. 처음 만들어진 메이지 시대에는 45도였다고 하고, 지금은 30도 버전과 40도 버전의 두 가지를 팔고 있다. 나는 13-15도 정도 되는 청주도 독해서 못 먹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장 약한 30도 버전을 시켰다. 그러면 이렇게 글라스에 찰랑찰랑하도록 담긴 덴키브란 한 잔, 검은콩조림, 그리고 겨자 조그마한 것 한 팩과 얼음물이 나온다. 바라는 것을 도통 다니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시선에서 보기에는, 술이 너무 독할까 싶어 한 입씩 곁들이라고 나온 물인가 싶다. 

 

그런데 이 술이 정말 물건이다. 딱 한 모금 입에 머금자마자, 찌르르한 느낌과 함께 처음 맛보는 화려한 향이 입 안과 콧속을 가득 채운다. 물론 독주 특유의 화하게 올라오는 알코올 느낌이 아예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으나, 그보다도 더욱 기분 좋은 술 자체의 향기가 터지듯이 퍼지는 것이 무척 훌륭하다. 그리고 은근하게 달콤한 뒷맛까지. 내가 좋아하는 술의 모든 요소를 갖췄다. 아 이거 애비 에미도 못 알아보게 만드는 술이다. 내가 술이 강했다면 몇 잔씩 시켜서 홀짝홀짝 마시다가 뒷감당이 되지 못할 뻔했다. 재미있게도 이 찌르르한 첫맛이 덴키브랑의 이름 '덴키(전기)'의 유래가 되었느냐 하면 그것은 반만 맞는 사실이다. 메이지 초기, 뭔가 신기하고 새로운 문물이 있으면 무조건 '전기'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했던 시절에 이 술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찌르르한 맛과 '전기'라는 이름이 묘하게 잘 맞아떨어진 결과라나. 

 

같이 나온 검은콩조림도 은근히 잘 어울린다. 생긴 건 그냥 국물 많은 콩자반 같은 느낌이지만, 콩이 무척 부드럽고 달달하게 조려져서 입에 넣으면 무슨 크림처럼 슬슬 녹아 없어진다. 훌륭하다.

말이 '바'지만 사실 안에 들어오면 여기는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느낌의 바라기보다는 왁자지껄한 이자카야에 가까운 느낌이다. 인테리어가 양식이고, 주위를 오가는 직원분들이 서양식 제복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자연스럽게 합석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왁자하게 서로 자기들 얘기를 하면서 술과 요리를 즐기고 있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대중 술집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바라는 명성답게 이곳 '카미야 바'는 많은 근현대 문학작품에 등장해 왔다고 하는데, 그 때와 지금의 모습은 많이 다르겠지만 시타마치의 문학가와 그 친구들이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면서 술 한 잔씩을 걸치고 있었을 그 공간에 출장으로 지친 현대 여행객인 내가 덩그마니 앉아서 술을 홀짝거리고 있자니 뭔가 느낌이 묘했다. 

 

늦은 점심 시간이니만큼, 술 한 잔만 꼴랑 먹고 말기에는 아쉬워 요리도 미리 주문했다. 일단 멘치카츠 한 개를 시키기로 하고 생각해 보니, 야채가 너무 부족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고른 가지구이까지 해서 도합 두 개의 요리를 먹게 되었는데, 촉촉한 속살에 알맞게 잘 튀겨진 멘치카츠도 일품이었지만 이 가지구이가 정말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가지의 '시기야키しぎ焼'라고 되어 있길래 뭘까 했는데, 가지에 칼집을 내고 기름을 발라 튀기듯이 구운 뒤 미소로 간을 하는 요리라고 한다. 그래, 가지는 이렇게 구워 먹든 튀겨 먹든 하는 게 제일 맛있다. 가지 자체의 달콤한 맛과 풍성한 수분이 한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 팍 하고 터지면서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 가츠오부시와 간 생강을 곁들여 먹으면 더욱 훌륭하다. 덴키브랑을 홀짝거리며 주위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를 안주삼아 한 점씩 집어먹는 요리. 훌륭하다. 천국이 따로 없다. 

그러나 나는 극도의 내향형 인간. 언젠가는 술집에서 옆에 앉은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면서 노는 것이 꿈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먼 미래의 얘기다. 다 먹고 마셨으면 인제 일어나야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이 술만큼은 누군가에게 꼭 소개시켜 주고 싶은 마음에 1층 입구 옆에 있는 매장에 들렀다. 여기에서 덴키브랑 30도짜리 병과 40도짜리 병을 구입할 수 있다. 30도짜리 병은 너무 커서, 40도짜리 작은 병을 한 개 샀다. 이후 누군가와 같이 술을 마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지고 다니면서 전파하고 있다. 물론 나는 술에는 영 젬병이기 때문에 아직 채 절반도 다 마시지 못했지만. 심지어는 여기서 덴키브랑 30도짜리를 한 잔 했다고 얼굴이 시뻘개져서 밖에 나와서는, 세차게 비가 쏟아지는 시타마치 거리를 마스크도 못 쓰고 휘적휘적 걸으며 취기를 빼야만 했다. 내게는 너무 독한 술을 너무 급하게 마신 탓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즐거웠던, 어느 비 오는 날의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