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이 밝았다. 어제와 다름없이 아침을 먹으러 갔다. 오늘의 아침은 대만식 오믈렛과 베지 버거.
우리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는 이렇게 중정을 가운데 두고 여러 개의 건물에 걸쳐 둘러싸여 있는 형태이다. 왼쪽 유리문을 지나면 바로 우리 부부가 썼던 방이 있다. 이 사진은 공동샤워실 옆에서 찍었는데, 이 책상에 사람들이 간간이 앉아서 자기네들끼리 떠들곤 했다.
셋째 날인 이날은 멀리까지 관광을 하러 나가지는 않기로 했다. 아내는 몰라도 나는 대만이 처음인 만큼, 적어도 타이베이에 오면 누구든지 들른다는 곳들은 한번씩 가 보고 싶었고, 아내도 내 의견을 존중해 주었기에 이루어진 일정이었다. 대신 국립고궁박물원을 일정에 넣은 만큼, 오전에는 일정을 최소화하고 오후 나절은 통으로 박물원에 투자하기로 했다.
중화민국 총통부中華民国総統府, 일제의 손으로 만들어져 대만 인민의 것으로 돌아오다
처음 구경하러 갈 곳은 총통부였다. 숙소에서 전철로 가기에는 약간 애매한 위치에 있어서, 아직 햇볕이 강하지 않은 오전 시간대를 노려 산책 기분으로 가기로 했다. 타이베이 기차역 지하보도를 나와 조금 걸으면 2.28 공원이 나오고, 여기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누가 봐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것 같은 고풍스러운 적벽돌 건물이 나타난다.
쌍십절(10월 10일, 신해혁명이 일어난 날을 기념하는 최대의 국경일)을 앞둔 총통부 청사는 온갖 화려한 장식들과 슬로건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관광객은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도대체 어디가 입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하다가 담벼락에 서 있던 경비원에게 한자로 '관광객 출구, 어디?遊客入口在哪裏?'라고 적은 글귀를 보여 줬더니, 손짓발짓을 섞어 가며 방향을 알려 주었다. 첫날 패스 살 때에 이어 다시금 한자가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총통부 관람객 입구에서는 대략 스무 명씩 관광객을 끊어 들여보내고 있었다. 총통이 실제로 지금도 근무하는 국가중요시설인 만큼 입관 절차도 제법 삼엄했다. 짐 검사는 물론, 액체가 든 병은 절대로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우리는 급하게 생수병을 비워야 했다. 또한 동선에 따라 돌아다니며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관광객에게 원하는 안내 가이드 언어를 물어본다. 웃긴 것은 이 때 "영어 가이드로 부탁한다"고 했는데, 뭔가 중간에 착오가 있었던 모양인지 막상 따라 들어갔더니 나이 지긋한 영감님 가이드가 중국어로 안내하는 프로그램에 섞여 들어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줄 세우는 과정에서 그냥 대충 한 줄로 세우다가 이 사달이 났던 게 아닌가 싶다. 현지인들과 별 외모 차이가 없는 우리뿐만 아니라 누가 봐도 별 생각 없이 관광 온 백인 아저씨 한 명도 멀뚱히 섞여 따라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줄 세우는 공무원들이 일을 대충 하다가(ㅋㅋㅋㅋ) 그만 이렇게 된 것 같다. 물론 나도 아내도 중국어는 인삿말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 대충 눈치코치로 무슨 얘기인지 파악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윽고 아내는 반쯤 정신줄을 놓아 버렸고, 나는 괜스레 미안해서 죽는 줄 알았다.
총통부 관광은 1층 복도를 따라 죽 돌아가는 형태로 조성된 전시실을 따라가며 진행되었다. 국부천대 이후 중화민국의 역사를 각 총통의 시대에 맞춰 구성해 두었고, 특히 일제 강점기의 역사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로 서술되어 있는 안내문들이 눈에 띄었다. 타이베이가 비교적 최근부터 대만의 중심지가 된 도시인 덕인지는 몰라도, 총통부가 위치한 타이베이 중심부는 상당히 계획적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한국처럼 오래 된 역사 유적지를 부수고 그 자리에 일본의 통치기구를 세우거나 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사실이 오늘날에도 일본식 건물을 유지하는 데에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적은 이유 중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보았다.
때아닌 중국어 수업이 되어 버린 총통부 견학을 마치고, 기념품 가게에서 마그넷을 몇 개 사들고 총통부를 나왔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맑았다. 10월의 타이베이는 마치 한국의 8월 날씨처럼 따가운 햇볕이 사정없이 피부를 쑤시고 들어왔다. 양산 없이는 도저히 걸어다니지 못할 정도였는데, 이런 가운데에서도 현지 사람들은 역시 적응이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들 걸어다녔다. 총통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중정기념당으로 향한다.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에서 권력에 대해 생각하다
중정기념당은 중화민국의 국부로 숭상받는 장제스蔣介石 초대 총통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정말 미친 듯이 크다.
이전 포스팅에서 타이베이 기차역 이야기를 하면서 "대륙에서 쫓겨난 설움을 건물을 크게 지으면서 풀기라도 했던가"라는 언급을 했었는데, 그야말로 중정기념당이 그러했다. 실제로 총통을 비롯해 수많은 정부 관료들이 오가며 근무하는 총통부도 중정기념당 내 장제스 기념관 하나 크기에는 못 미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정말 거대하다. 순백 벽에 쨍하도록 푸른 청기와를 얹은 거대한 건물이 백여 단은 되는 계단 위에서 나무 하나 없는 광장에 서 있는 관광객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은 압도적이기까지 하다. 중정은 공과가 워낙 뚜렷한 사람이다 보니 대만 사회에서도 여러모로 논란의 대상인데, 특히 2019년 시점의 여당인 민주진보당은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던 중정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라 집권할 때마다 중정기념당의 격에 대해 재검토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멀리 갈 것 없이 같은 아시아 민주국가에 살고 있는 내가 보더라도, 아무리 국부라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일반 국민을 압도하는 형태의 건축으로 기념받을 필요까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가 되면 장제스 동상 앞에서 근위병 교대식 하는 것도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정기념당 자유광장의 광경은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너무 뙤약볕이라서 그렇지. 중화권 사람들은 왜 이런 데에 나무 심을 생각들을 도통 안 하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돌고 나니 하도 더워서, 1층 매점에서 패션후르츠 맛 아이스바를 사 먹었다. 가격은 제법 비싸긴 했지만, 알갱이가 살아 있어서 퍽 맛있었다.
융캉우육면, 끊임없이 생각나는 얼큰하면서도 알싸한 맛
나무 하나 없는 중정기념당 광장에서 빠져나올 때쯤 되니, 슬슬 나도 아내도 더위로 인해 지치고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 시간도 점심 때이고 하여, 눈여겨 두었던 가게에 가기 위해 둥먼역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행히도 둥먼역 쪽으로 가는 길에는 제법 그늘이 져 있어 걷기가 수월했다.
오늘 점심에 찾은 곳은 융캉우육면. 관광안내 책자에도 종종 소개되곤 하는, 제법 오래 된 노포이다. 길 영永 자를 'yong'으로 읽는 것에서 대충 짐작할 수 있듯이, '융캉'이라는 독법은 표준중국어식 독법은 아닌 듯하다. 약간 이른 시각에 가게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가게 앞에는 어느 정도 줄이 생겨 있었다. 이런 국숫집의 줄이란 것은 보통 빨리 빠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 대기는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로 들어가서 주문을 할 수 있었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홍샤오우육면은 조금 맵다는 소리가 있어 매운 것을 못 먹는 나는 일단 백우육면을, 상대적으로 매운 것을 잘 먹는 아내는 홍샤오우육면을 주문했다. 국수집이니만큼 메뉴도 퍽 빨리 나왔다.
도대체가 쇠고기를 어떻게 삶으면 이렇게 촉촉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을 낼 수 있는 것일까? 백우육면은 무척 구수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에 덧붙여 끝으로 대만 특유의 향신료 향이 살짝 코를 치는 느낌이었다. 한국에서 먹던 설렁탕이나 다른 고기국수류와는 확연히 다르면서도, 부담이 없어 누구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요리. 아내와 각자의 음식을 두어 젓가락씩 나누어 먹었는데, 홍샤오우육면 또한 딱 내가 생각하던 대만식 우육면 그 자체의 맛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과히 맵지는 않으면서도, 기분 좋은 매콤함과 보다 진하게 우러나오는 향신료의 맛이 두드러지는 느낌이다. 배가 고팠던 것도 있겠지만, 국수 그 자체가 너무나도 맛이 좋았던 나머지 정말 게눈 감추듯 둘 다 국물까지 들이마시고 말았다. 다 먹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봤더니,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서 국수를 다 먹기까지 고작 10분 남짓밖에 안 걸렸더라. 하여튼 먹어 조지는 건 알아 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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