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내가 여의도에 일이 있어서 이른 아침 차를 빌려 데려다 주고 나니, 아내의 일정이 끝나기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 하지, 하고 고민하면서 대강 모바일 게임의 쌓여 있는 스태미너를 소모하고 있다가 문득, 시간도 많이 있으니 양재동에 가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양재동 하면 꽃시장, 꽃시장 하면 양재동이 아니겠는가(?). 비가 살살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는 아침 열 시였으나, 어차피 차도 빌렸고 하니 뭐 못 갈 게 뭐람! 이라는 생각으로 핸들을 양재동으로 돌렸다. 빗발은 굵어지다가 가늘어지다를 반복하다가, 양재동 화훼단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완전히 굵어져 있었다. 비 오는 날에 굳이 이렇게 큰 화훼시장에 찾아올 만한 사람은 얼마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주효했는지, 주차 공간도 많이 남아 있었거니와 실제로 안에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쇼핑에 앞서서 이 분의 블로그를 참고했다. 시장이라는 것에는 늘 익숙지가 않은데다가 호객 행위를 무척이나 거북해하는 성격 상, 먼저 마음가짐을 준비하고 들어가는 데 많이 도움이 됐다.
처음이어도 괜찮아! '양재꽃시장' 알차게 쇼핑하기 1편 - 주차부터 상점 안내까지
(다만 이 분의 블로그에서 주차 관련 내용의 경우, 액수 상관 없이 영수증 제시하면 50% 할인으로 변경되었으니 참조해 주시길.)
꽃시장에 들어가서 맨 먼저 한 일은 당연히 주차. 분화온실 가/나동 사이 어딘가에 주차에 성공했다. 바로 뒤쪽으로 자재상도 내다보이는 위치. 세 곳이 전부 걸어서 30보 내에 들어오도록 신경을 썼다. 나는 절화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분화온실을 위주로 둘러보기로 했다.
사실 양재꽃시장에 오게 된 주된 이유는, 구하기가 다소 어려운 식물들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슬슬 풀때기들을 집에 들이기 시작할 무렵에는 다소 의심스러운 눈길로 지켜보던 아내가, 슬슬 이런저런 식물도 키워 보는 게 어떻겠느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중 특히 아내는 '알스트로메리아'를 키우고 싶어했다. 가끔씩 아내가 회사에서 가져오는 꽃다발을 화병에 꽂아 두면, 유독 알스트로메리아만 꽃을 떨어뜨린 이후에도 오래도록 줄기가 살아남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는 사실상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죽지 않는 기적의 화초'라는 이미지가 붙어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알스트로메리아를 번식시켜 분화나 구근으로 파는 곳은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한 가지 종류의 꽃인데다 정말 미친 듯이 비쌌다. 그래서 혹시라도 양재동에 가면 팔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사루비아. 아내가 붉은빛 사루비아 꽃을 좋아하는데, 봄에나 화분 혹은 모종이 들어오고 그 이후에는 잘 안 들어온다기에 혹시 씨앗이라도 구할 수 있는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곳 양재동을 찾게 되었다.
점점 날씨가 궂어지는 가운데 문을 열고 들어간 온실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사방 천지가 녹음으로 우거져 있었다. 정말 다양한 생김새의 식물들이 칸칸이 진열되어 있고, 마스크를 끼고 있음에도 은은히 풀 냄새와 꽃 냄새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느껴졌다. 재미있게도 이곳을 찾은 손님들 중 혼자 온 것은 거의 나뿐인 듯, 다들 일행을 데리고 이곳을 찾은 것 같았다. 아들을 짐꾼으로 데려온 어머니, 화분에 담긴 예쁜 고무나무를 보면서 살지 말지 격론을 벌이고 있는 중년의 부부, 새로 집을 꾸미고 싶어하는 듯한 신혼부부로 보이는 젊은 커플, 왁자하게 이야기하며 통로에 서서 이 화분이 좋네 저 화분이 좋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 등. 화분이 무거우니 사람이 여럿 있는 게 좋으리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모두들 여럿이 함께 모여 식물을 본다는 행위 자체에 푹 빠져 있는 듯했다.
그 가운데를 이리저리 쏘다니면서 음침한 표정으로 '알스트로메리아 혹시 취급하세요?'라고 연신 물어보는 수염 기른 음침하게 생긴 아저씨 한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아니, 사실 그건 나였다.
도대체 어딜 가든 알스트로메리아는 놓여 있는 곳이 없다. 철은 언제여도 상관없으니 취급은 하시느냐고 물어봐도 다들 고개를 모로 젓는다. 단편적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추론하자면, 봄이나 초여름 사이에 아주 가끔씩 들어오는 경우는 있지만 보통은 분화 형태로 취급하는 경우는 잘 없다는 것이다. 정말 감사하게도, 어느 가게에 가서 물어보든 하나같이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설명도 잘 해 주셔서 부담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황 조사를 할 수 있었다. 다들 식물을 다루셔서 마음이 넓으신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시장에서 종종 궂은 일을 당하곤 했던 트라우마를 떠올리지 않고도 마음 편히 장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알 사람은 알 것이다.
알스트로메리아가 왜 없는가에 대한 의문의 마무리는 구근 전문점인 '태광식물원'에서 얻을 수 있었다. 알스트로메리아는 구근으로 번식을 하는 종이기 때문에 혹시 여기에도 있을까 싶어서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사장님 말씀이 "그거는 국내에서 절화 수요만 충당하기에도 벅차고, 농사도 잘 안 돼서 안 들어와요."라는 것이다. 혹시 나중에라도 들여오실 일이 있으면 전화번호를 드릴 테니... 라고 넌지시 여쭤도 봤지만 사장님은 일언지하에 불가능하다고 단언하셨다. 아쉬운 대로 사루비아 씨앗은 있느냐고 여쭤 봤더니, 붉은색 꽃을 피우는 종은 없지만 보라색 꽃을 피우는 종은 있단다. 한 봉지에 3천 원. 카드로 결제해도 그놈의 '부가세 10프로' 같은 장난은 일절 없다. 최고다, 양재동 꽃시장.
바깥에 나와서 잠깐 돌아다니자니 비가 정말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경수를 판매하는 국제종묘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야생화 화원에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알스트로메리아가 있는지 물어봤더니, 5월경에 가끔씩 들어올 때가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락처를 드리고, 혹시 들어오면 꼭 연락을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다. 어떻게든 뭐 되겠지.
마지막으로는 한쪽 끄트머리에 있는 자재상으로 갔다. 흙 두어 봉지와 뿌리파리 제거용 농약, 그리고 영양수용제 한 통과 호접란용 수태 한 봉지를 샀는데, 무척 친절하게 해 주신 데다가 가격도 모두 정찰제여서 깔끔하게 거래에 성공. 집에서 키워 먹을 심산으로 로메인 모종 한 판까지 사니, 빗물이 거의 길바닥에 찰방찰방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샌들을 신고 오길 천만다행이다. 올라오는 길에도 어찌나 비가 오는지, 이러다가 미끄러질까봐 거의 기어가다시피 운전했다. 그래도 여의도로 돌아오니, 날씨는 다시 더없을 만큼 맑아져 있었다.
혹시라도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며 찾은 양재 꽃시장이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즐거운 경험이었다. 나중에는 아내를 한번 데리고 꼭 같이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푸릇푸릇한 식물을 보고 있노라면 어쨌든 기분이 좋아지게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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