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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인터넷을 통근하는 재택근무자를 위한 가이드: 1. 늘어난 시간을 어찌할 줄을 모르겠어서(1)

by 집너구리 2021. 2. 7.

여느 때와 다름없는 월요일 아침, 잠에 절어 있는 아내에게 아침을 먹여 출근을 시키고 커피 한 잔을 내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유튜브 영상을 틀어 놓고 게임을 조금 하며 커피를 곁들인 내 몫의 아침을 먹는다. 그러다가 문득 달력을 보았다. 작년 추석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설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오히려 이름조차 거론하고 싶지 않은 그 질병이 여전히 위세를 떨고 있는 탓에, 올해는 새해 첫 날을 가족과 함께 보낸다는 것조차도 어떠한 종류의 사치가 되어 버린 것만 같다.

커피는 모카포트가 딱이제

올해 설은 그렇고, 지난 설은 어땠더라. 생각이 꼬리를 문다. 돌이켜 보니 회사에 매일같이 출근해서 일을 하던 시절도 벌써 퍽 오래 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작년 2월 말에 아내와 상암동에서 즐거운 기념일 식사를 한 다음 날, 회사에서 "앞으로는 재택근무를 전면적으로 시행하겠다"는 이메일이 도착하면서 모든 일이 시작된 것만 같다. 우리 회사는 재택근무를 아예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제도가 갖추어져 있기는 하였으나, 과연 모든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반기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집에서 일하는 것이 더 효율이 나는 사람도 있거니와, 집에 있으면 좀처럼 일이 되지 않아 회사에 나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처음 재택근무 제도가 도입된 이후로 다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반드시 재택근무를 쓰던(마치 연차 같은 표현이기는 하나 달리 이야기할 방도가 적었다) 시기가 지나고, 점차 "에이, 딱히 엄청 편한 것도 아닌데 그냥 쓸 수 있으면 쓰고 아님 말지"와 같은 태도로 넘어가던 무렵에, 전 직원 재택근무 시행이라는 파격적 조치는 그렇게 돌연 찾아왔다.

 

하하 망할 코로나...

 

경기도 사람들의 우스갯소리 중 하나로 "서울 사람의 두 시간과 경기도 사람의 두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는 말이 있다. 서울 사람들은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괴로워하기 일쑤이지만, 경기도 사람은 보통 서울 다녀오는 데 왕복 두 시간은 짧은 수준이라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자조적 표현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작한 재수생 생활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회사에 취직하여 다니기까지 나의 하루의 대부분은 소위 '길거리에 버려지는' 시간이었다. 재수 학원과 그 뒤에 다니게 된 대학교 모두 서울 남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출발해 강의실에 들어가 책가방을 내려놓고 한숨을 돌리기까지는 아무리 해도 편도 두 시간은 걸리기 일쑤였다. 본가에서 회사가 있는 곳까지 최단거리로 이어 주는 대중교통이 없었던 탓에 결혼 전에는 회사를 왕복하는 데 다섯 시간은 족히 걸렸고, 결혼해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오고서는 왕복 세 시간이 조금 안 되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경기도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이동 시간은 오히려 평범한 수준에 가까웠다. 서울로 이사를 오고 나서 제일 만족한 부분이 '출퇴근 시간이 세 시간으로 줄었다는 점'이라는 말을 하면 주위 동료들은 "얘가 미친 거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곤 하지만, 실상이 그러한 걸 어떡하겠는가.

 

아닐 것 같죠?

 

본격적으로 매일같이 집에서 일하면서 가장 크게 인식하게 된 부분이 바로 출퇴근 시간만큼의 시간이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하루에 갑자기 서너 시간의 공짜 시간이 생겨난 듯한 체감이었다. 더 이상 아침에 물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겠는 샤워기로 머리를 감고, 덜 마른 머리로 옷을 입고, 집에서의 식사는 언감생심에 버스에서는 잠들기 바쁜 나날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이렇게나 여유로운 삶을 보장해 줄 줄이야. 아내는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이 출퇴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부의 자리는 자연스레 나에게 넘어왔다. 집안일을 좋아하는 덕분에 청소나 빨래 같은 기본적인 일들 외에도 점차 다른 부분에 눈이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요리가 그렇게 재미있는 줄은 미처 몰랐지. 본가에 살 적에 어머니가 "결혼했는데도 제 밥상 하나 제대로 못 차려 먹으면 내쫓긴다"며 최소한의 기술까지는 가르쳐 주셨던 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어떤 때 어떤 양념을 넣고, 불 조절을 어떻게 해야 하고, 칼질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야채 손질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도만 알아도 대부분의 요리를 겁없이 할 수 있는 일종의 자신감이 붙는다. 본가에서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들을 내 손으로 하나씩 차려서 먹어 보고, 백종원 님의 레시피 영상을 보면서 열심히 공부하던 차에 일종의 기폭제가 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아내가 생일 선물로 받아 온 오븐 토스터기였다.

(다음에 계속)

첫 빵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