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만남을 겪는 일이 있다. 야근 후 피로에 전 상태로 올라탄 4호선 전차에서 고등학교 시절 제법 친하게 지냈지만 소식이 끊겼던 동창생을 만난다든지, 별 생각 없이 둘러보던 회사 재직자 명단에서 같은 학부를 졸업한 친구를 발견한다든지, 길거리를 걷는데 누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중학교 시절 늘 붙어다녔던 단짝이었다든지 하는 일이 그러하다. 한편으로는, 길을 가다가 커피가 땡겨 들어간 가게가 알고 보니 그 동네에서 제법 유명한 카페였다든가,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 드린 할아버지가 흘러간 은막의 스타였다거나 하는 일도 있다. 인터넷이 손 안으로 들어와 누구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거리를 걷는 요즈음에는 제대로 자기 걷는 앞을 보며 걸어가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어진 느낌도 들다 보니,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다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마주하고 놀라게 되는 일은 예전에도 잦은 일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더욱 잦아들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여 사람들을 만난다는 경험 자체가 줄어들었느냐? 사실은 사람들과의 만남 자체는 그 자리가 온라인으로 옮겨갔을 뿐, 오히려 빈도는 더욱 늘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SNS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 커뮤니티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 때로는 인터넷 뉴스 댓글창에서 말다툼하는 사람들 또한 따지고 보면 이른바 '랜선'을 통해서 나와 만나는 것이다. 어떤 인터넷 낭인이 남긴 유명한 말 "친구는 인터넷 친구가 있어요"를 굳이 진지하게 꼽지 않더라도 그러하다. VT 시절부터 꾸준히 존재해 왔던 '인터넷을 통해 만나 결혼한 부부'의 이야기는 더 이상 독특한 케이스가 아니게 된 지 오래다.
인터넷을 통한 사람들의 만남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중고거래 게시판이 아닐까 한다. 중고나라나 당근마켓 등에 판매글을 올려 본 사람들이라면 다수가 경험해 보았을 테지만, 때에 따라서는 글을 올리고서 1분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몇 건씩 문의가 오는 경우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거래를 하게 되어 생판 모르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일도 있는데, 인터넷 게시판에서 흔히 돌아다니는 이른바 '중고나라 대환장 시리즈'의 주인공이 혹시 내가 되지나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며 약속 장소에 나가는 일이 많다. 나는 중고거래 경력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긴 하지만, 특히 직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골탕을 먹은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직거래로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것을 썩 내켜하지는 않는 편이다. 게다가 중고거래를 하는 일은 주로 수입이 불안정했던 학생 시절에 용돈벌이 삼아서 하던 경우가 많았는데,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면서 내가 쓸 수 있는 공간과 돈이 생겨나다 보니 상대적으로 중고거래를 할 만한 건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래도 집 정리를 하는 것은 나이다 보니, 가물에 콩 나듯이 중고거래로 내다팔아도 될 만한 물건들은 생기게 마련이었다. 하루는 집에 남아도는 모카포트를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걸 포장해서 우체국에 가서 인지를 붙여서 보내고 하는 수고로운 짓은 영 하기가 싫은 것이었다. 대충 동네에 사는 사람들 중 아무나 가져가라는 마음에 당근마켓에 글을 올렸는데, 채팅으로 말을 걸어온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뭔가 독특한 캐릭터였다. 그의 말인즉슨, "왜 굳이 아까운 모카포트를 내놓으려 하시느냐, 그러지 마시고 제가 만든 휴대용 버너를 드릴 테니 집에서 쓰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30대 초반, 한창 세상살이에 갖은 의심이 가득할 나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굳이 자기가 공짜로 무언가를 준다고 한다는 것 자체가 기껍지 않을 나이. 사람이 무언가를 줬으면 그에 대한 대가가 반드시 필요한 법인데, 이 사람은 무슨 속셈으로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에, 무의식인지 의식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까칠하게 대응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시점에도 그가 보내 준 한 장의 사진은 일말의 흥미를 잡아끄는 구석이 있었다. 빈 깡통을 재활용해서 만들었다는 휴대용 알코올 버너의 사진이었는데, 그 만듦새가 워낙 절묘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손재주가 참 좋으시다는 칭찬은 잊지 않았을 만큼 무척이나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이었다. "집에 모카포트가 남아돌아서 쓰지 않는 것은 팔려고 한다"고 했더니, "아, 그러시군요! 저는 또 집에 하나도 없다고." 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그렇게 그와의 대화는 유야무야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모카포트는 옆 동네에서 온 다른 분에게 잘 팔렸다.
그러구러 한 달이 흘렀을까. 당근마켓을 둘러보는 일이 은근히 재미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나는 자기 전에 별 생각 없이 당근마켓에서 '모카포트'를 검색해 보기로 했다. 그러자 리스트의 맨 위에 나타난 뭔가 익숙한 사진과 뭔가 익숙한 문체의 글. 일전의 그 휴대용 알코올 버너를 만든다는 그 사람이었다! 문제의 그 버너를 2컵짜리 모카포트 하나와 함께 묶어서 팔고 있었는데, 그때의 일이 새삼 미안하기도 했고, 반갑기도 한 마음에 바로 채팅을 보냈다. "선생님, 어쩐 일로 이걸 팔기로 생각하신 건가요?"라는 메시지에 그의 답신은 이러했다. "아... 제가 무언가 실수를 했을까요?"
그렇다. 그는 그저 수공예와 커피를 지극히 사랑하는 맘씨 좋은 동네 아저씨일 뿐이었던 것이다. 지난번에 공짜로 버너를 주실 때는 거절했지만, 이번에 가격을 걸고 내놓으셨으니 돈을 내고 구매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그이는 손사래를 치면서(물론 인터넷이므로 손사래를 치는 것이 보일 리 만무하겠으나) "제가 그 때 공짜로 드린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떻게 그러겠습니까"라고 하며 한사코 돈을 받지 않고 주겠다는 것이다. 글에 나와 있는 대로 모카포트까지 전부 사겠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돈을 받겠다며 그 와중에도 값을 깎아서 부르시기에, 이 이상 밀어붙이면 상대의 면도 서지 않을 것 같아 이 선에서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점심 때 만난 그는 옆머리가 희끗희끗한, 제법 체격이 있는 중년의 아저씨였다. 물건을 건네 받으면서 사용 방법과 주의 사항까지 꼼꼼히 안내를 받는데, 사진으로 보았을 때도 그러했지만 실제로 보니 정말 버너의 만듦새가 도저히 초보의 솜씨로는 보이지 않았다. 알루미늄 캔을 잘라 용접하고 섬세하게 구멍을 낸 다음 튼튼하게 브라켓과 나사로 고정시킨 거치대 사이에 집어넣은, 훌륭한 야외용 알코올 버너였다. 손재주에
대해 칭찬하자 그는 민망해하며 "종이비행기 만들어 본 이래로 처음 만들어 보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받아온 물건은 바로 써 보는 게 예의다. 집에 와서 그가 말한 대로 버너 안쪽에 알코올을 붓고 불을 붙인 뒤 커피와 물을 담은 모카포트를 얹어 보았다. 알코올에 붙는 불이다 보니 불꽃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다소 단점이긴 하였으나, 커튼을 치고 불을 꺼 보니 파란 불꽃이 낼름낼름 올라오며 모카포트를 가열하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불이 세지는 않은 탓인지 커피는 조금 오랜 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겨우 추출되었지만, 맛은 제법 괜찮았다.
나중에 이 분의 프로필에 들어가 보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렇게 알루미늄 알코올 버너를 간간이 만들어서 근처에서 팔곤 하시는 모양이었다. 후기도 칭찬 일색이라 더욱 내 옹졸했던 마음이 죄스러워지는 듯했다. 하다못해 프로필 거래후기라도 좀 자세히 읽어 봤다면 좋았을 걸! 언제 한 번 연락을 드려서, 맛있는 원두라도 조금 안겨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도통 실제 세계에서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고, 컴퓨터 속 세상은 온갖 벌거벗은 갈등들로 가득한 것이 작금이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실제 세계에서든 인터넷 세상에서든, 드물게나마 이처럼 멋진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몇 안 되는 위안 가운데 하나이리라. 세간에서 말하는 '귀인'이란 그저 스포츠 신문 한 구석의 운세 코너에서만 그 가치를 다하는 말인 듯양 하지만, 사실은 이렇듯 가끔씩 마주하게 되는 보석 같은 이들이야말로 등신대의 귀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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