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담

집씨통 참여하기: 도토리나무 재배일지 01

by 집너구리 2021. 2. 21.

아내가 며칠 전에 기묘한 이야기를 꺼냈다. 도토리 키워 볼래?

결혼 이전에 본가에서 살 적에도 늘 식물이 있는 환경에서 살아 온 만큼, 식물을 키운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관리에 약간 소홀한 나머지 집에 있는 친구들이 전부 비실비실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근데 갑자기 도토리를 키워 보겠느냐니 이게 무슨 소린가?

 

알고 보니, 난지도 노을공원에 나무를 키우자는 봉사활동에 아내네 회사가 참여하고 있어서, 도토리를 받아서 키운 다음 노을공원에 심는다는 꽤 솔깃한 취지로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풀때기라면 몰라도 나무를 키운다는 건 생판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참여하는 것은 좋긴 하지만 과연 내가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일단 신청해 보자고 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난 뒤 아내가 회사에서 무언가 큼지막한 서류봉투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씨앗을 키워 숲을 만드는 노을공원시민모임'이라는 시민 단체의 이름이 새겨진 봉투엔, 상당히 친근한 말투로 운동 소개글과 씨앗을 키우는 방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집에서 씨앗 키우는 통나무'라는 말도 그렇고, 귀염뽀쨕하게 그려진 다람쥐도 그렇고, 아기자기하니 사람의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게 잘 짜여진 운동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씨앗 봉투에는 큼지막한 통나무통 묶음과 이름표가 들어 있다. 겉면에는 운동 안내문과 나무 심는 방법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봉투의 내용물은 상당히 단촐했다. 엇비슷한 크기의 동그랗게 깎인 통나무통 두 개와 그 사이에 낀 골판지 흙덮개, 이것들을 꼭 묶는 고무밴드 두 개, 그리고 나무의 이름을 적을 수 있는 철제 이름표 하나가 들어 있었다. 

 

봉투에 쓰인 안내문을 읽어 보니, 통나무통 둘 중 하나(밑에 구멍이 난 쪽)에는 흙과 씨앗이 들어 있고, 구멍이 나지 않은 나머지 한 통은 물받이로 쓰면 된다고 한다. 마포구 근방의 목공소 등지에서 남아도는 자투리 통나무를 가져와서 만들었단다. 골판지 흙덮개 또한 지역에서 버려지는 골판지를 잘라서 만들었다고. 흙에 묻혀 있는 도토리 세 알을 흙 속에 고이 심고, 일 주일에 두어 번 정도 물을 주며 100일을 키운 뒤, 어느 정도 자란 화분을 받았던 모습 그대로 묶어 포장해서 운동본부로 보내면 이것이 난지도에 심겨 큰 나무로 자라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보내 준 고무밴드와 봉투는 버리지 말고 잘 보관해 달라는 문구도 잊지 않고 쓰여 있었다. 플라스틱이나 도자기로 된 다른 화분과는 달리, 통나무 화분인 만큼 이걸 통째로 흙 속에 심어 버리면 언젠가는 분해되어 거름이 될 테니, 고무밴드와 철제 이름표만 제대로 재활용이 된다면 퍽 훌륭한 제로웨이스트 운동도 겸하게 되는 것이다.

한때 으마으마한 쓰레기장이었던 난지도는 이제 풀숲이 우거진 생태공원이 되었다. 이 거대한 변화 과정에 참여하자는 취지의 운동.
고무밴드를 빼고 물구멍이 난 쪽의 나무통을 밑으로 해서 세운 다음 위쪽 나무통을 분리하면 이런 느낌이다.
흙 속에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도톨도톨 친구들
손가락 마디 두 개 정도 깊이의 구멍을 파고 도톨친구들을 심은 뒤 물을 준다.

이렇게 해서 도토리 친구들을 심은 것이 2월 16일 화요일이니, 곧 심은 지 일 주일째가 다가온다. 아직까지 흙을 뚫고 나온 잎사귀들은 없지만, 어쨌든 계속 물을 주면서 잘 자라는지 지켜보려고 한다. 그래도 모처럼 받은 생명들이니, 힘이 닿는 데까지는 키워 봐야겠지. 언젠가 나이가 더 들면, 난지도에 가서 도토리나무 숲을 둘러보며 이 중 몇 개는 내가 심어 키운 녀석들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