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보다 배는 더 어떤 일을 겪는 사람이 꼭 있다. 내 얘기다.
지나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꼭 날 붙잡고 길을 묻는다. 생긴 게 좋게 말해서 무던하게, 나쁘게 말해서 만만하게 생겼기 때문인가 싶다. 저 사람에게 물어보면 적어도 내치고 쌩 제 갈 길이나 가 버리지는 않겠구나 싶을 테지. 거울 속에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스스로도 그런 생각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간단하게는 지하철 승강장에 서 있을 적에 무슨무슨 역으로 가려면 이 승강장이 맞느냐는 질문부터, 운동삼아 동네 산책을 나섰는데 헙수룩한 차림새의 웬 아저씨가 동대문까지 걸어가려면 이 길이 맞느냐는 물음까지도 받아 보았다.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나와 아저씨가 있던 곳에서 동대문까지는 편도만 14킬로가 넘어가는 거리였다. 마침 집에서 광화문까지 10킬로를 걸어가 본 경험과,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걸어가 본 경험을 떠올리며 얼숭덜숭하니 길을 알려 드릴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 양반, 퍽이나 지쳐 보이던데 동대문까지 제대로 잘 찾아가셨을런지.
서울 지하철, 명동 한복판, 안산 중앙동 상점거리 같은 곳에서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그나마 낫다. 나는 수도권 지리를 잘 파악하고 있다고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자부하고 있어, 대강이나마 맞는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을 때가 대다수이다. 난감한 것은 이런 일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꼭 일본만 가면 한 번씩은 누군가가 나를 불러세우고 길을 물어보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이번에야말로 생긴 게 그다지 외국 사람스럽지 않기 때문인지, 누가 봐도 동네 산책 나온 젊은 일본인 학생으로 보이는 것인지, 거울을 들여다봐도 도통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도쿄東京 시나가와品川 쪽에 출장으로 묵을 일이 있었을 때다. 아침 운동 삼아 시바 공원芝公園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숙소에서 시바 공원이 한 4킬로미터 정도 되니, 느지막하게 걸어 도쿄타워東京タワー 구경이나 한 뒤 하마마츠초浜松町 역에서 야마노테선을 타고 시나가와로 돌아올 심산이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배낭을 멘 영감님 한 분이 나를 불러세우더니 대뜸 도호쿠 방언이 옅게 묻어나오는 말투로 "미안한데 하마마츠초 역을 갈라믄 어떻게 가야 하우?"라고 묻는 것이다. 아무리 가방 하나 없이 지갑만 달랑 들고 맨몸으로 나왔기로서니, 그렇게까지 위화감 없는 동네 사람으로 보일 만한가 싶었다. 그래도 마침 하마마츠초 역까지 가야 하는 마당이었기에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그 영감님과 한 네 발짝 떨어져 나란히 하마마츠초 역까지 걸어왔다. 다행히도 어느 역으로 가려면 무슨 플랫폼에서 타야 하는지까지는 묻지 않으셔서 한숨을 돌렸다. 그렇게 된다면 고양이 손, 아니 역무원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다.
같은 일이 오사카大阪에 갔을 때에도 종종 일어났다. 시텐노지四天王寺에 갔는데 할머니 한 분이 나를 붙잡고 텐노지天王寺 역이 어디 있는지를 묻기에 정말 나로서도 알 수 없어 "외국인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도망친 적도 있다. 개중에 정말 기묘하면서도 신기한 일은, 한밤중에 오사카텐만구大阪天満宮 옆에 있는 카미가타 라쿠고 요세인 '텐마텐진 번창정天満天神繁盛亭'에 들렀다가 근처 전철역으로 향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가로등조차 잘 켜져 있지 않은 어둑한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왼쪽 골목에서 젊은 여성 한 사람이 툭 튀어나왔다. 그분이 하필이면 또 옅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던 탓에 귀신이라도 나왔나 싶어 거의 펄쩍 뛰다시피 했는데, 상대 쪽에서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전철, 역이, 어디입니까?" 유창하지 않은 일본어라 단박에 일본인은 아니라고 짐작했다. 마침 나도 전철역으로 가고 있던 길이었기에 "절 따라오세요. 마침 저도 전철 타러 가는 길이라서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여성분이 일본어로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는데, 발음의 패턴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넌지시 우리말로 "한국 분이세요?"라고 물었더니, 이번에는 그분이 화들짝 놀라시면서 "어머, 한국어 하세요?"라고 물으셨다. 내가 "아유 그럼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해야죠." 라고 되받아치자 여성분은 까르르 웃으시며 "세상에 이런 한밤중에 오사카 골목길에서 한국 분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혼자 오사카 여행을 즐기시던 중, 오사카 성에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다가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는 골목길로 접어들어 당황하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나도 그분도 이런 곳에서 동포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밤의 골목길을 걸어 전철역에 도착했다. 다른 노선을 타기 위해 그분과는 전철역 출입구에서 헤어졌는데, 그 후로도 즐거이 오사카 여행을 마무리하고 안전히 귀국하셨기를 바란다.
교토京都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아라시야마嵐山로 들어가기 위해 란덴 텐진가와嵐電天神川 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땀을 뻘뻘 흘리는 아저씨 한 사람이 승강장으로 들어왔다. 란덴은 반쯤은 노면전차라 일반 도로 안에 선로와 승강장이 자리하고 있다 보니 무척이나 개방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아저씨가 대뜸 나에게 "실례지만 여기에서 전차를 타면 카타비라노츠지帷子ノ辻 역으로 가는 게 맞나요?"라고 물어 왔다. 생판 처음 듣는 역 이름이라 "어... 저도 이 동네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는데, 여기 노선도를 보시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며 노선도를 가리켰다. 아저씨와 노선도를 짚어 가며 가까스로 문제의 카타비라노츠지 역을 찾는 데는 성공했는데,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답게 교토의 지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읽는 사람의 성질머리를 돋구는 바가 있어 도대체가 이 한자를 어떻게 하면 '카타비라노츠지'라고 읽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저씨도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아니 뭔 놈의 글자를 이렇게 쓴다냐..."라고 골난 듯한 말투로 투덜거리더니, 대뜸 "뭐 도쿄에서 여행 온 거요?"라고 내게 질문해 왔다. "아뇨 그, 도쿄는 아니고 한국에 있는 회사에 다니는데, 휴가를 받아서 관광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아저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럼 한국 사람이예요?" 그 뒤로 아저씨의 나와 한국에 대한 질문 공세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바람에("일본에서 오래 살았수?", "한국 사람들이랑 일본 사람들이랑 겉으로만 봐선 도대체 모르겠단 말이야", "아니 난 오사카에서 왔는데, 거 한국은 경쟁이 심하다믄서?" 등등), 도착한 전차를 타고 카타비라노츠지 역에서 아저씨가 내리기까지 한참을 청문회장에 선 증인마냥 아저씨의 질문에 답해 드릴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어디를 가든 적어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는 자연스럽게 현지인들 사이에 녹아들어 누가 봐도 잘 모를 정도로 적응할 수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을 터이다. 다만 나의 이런 위장 아닌 위장 기술이 마치 한여름 밖에 내놓은 얼음마냥 쉽사리 무력화되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교토의 각종 관광지에 서 있는 노인 안내원들의 눈길이었다. 무슨 조화를 부리는 것인지는 몰라도, 여권 하나 꺼내들기는커녕 입 한 번 뻥긋한 바가 없는데 눈만 마주치면 곧바로 "포리나(Foreigner)?" 하면서 영어 책자를 내미는 그네들의 통찰력 앞에서는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그들의 눈조차도 속일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교토 사람들 가운데에 녹아들 수 있게 될까? 그것이야말로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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