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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기

[방문기] 서울시 중구 남대문시장 그릇도매상가

by 집너구리 2021. 7. 11.

지난 주에 명동 가톨릭회관에 가서 이것저것 사 오는 김에, 모처럼 명동에 나가는 김에 근처의 다른 곳들도 좀 돌아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가서 책 냄새라도 맡을 테지만, 비 예보가 있는 상황에서 책을 또 잔뜩 들쳐메고 집으로 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나기라도 했다간 생각하기도 싫은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아 이번엔 자제하기로 했다. 그 대신 선택한 것이 남대문시장을 가는 것이었다. 걸어서 얼마 걸리지 않는데다가, 이곳에 매우 큰 그릇 상가 있다는 사실을 인터넷에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숨기랴, 나는 사실 그릇을 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여행을 하다가 마음에 드는 그릇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거나, 사 와서 내가 쓰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여행 기념품으로 나눠 주곤 한다. 좋은 그릇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든가 하는 것은 (그릇력(?)이 짧아서) 아직 없지만, 그런 복잡한 것을 신경쓰지 않더라도 그릇은 우리 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공예품이라는 차원에서 그저 보기만 해도 즐겁기 따름이다. 괜히 도쿄에 가면 캇파바시나 닝교초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밥그릇을 몇 개씩 사들이는 게 아니다. 모카포트도 되는 대로 마구잡이로 모으다 보니 거의 종류별로 수집한 모양새가 되어 버리지를 않나. 집은 좁고 사람은 적은데 참 큰일이다.

 

명동 측에서 접근하는 남대문시장 입구. 여기서부터 '시장'의 느낌이 물씬 난다.

 

마치 평일 아침 시간마냥 한산해서 오히려 더 어색한 명동 거리를 걸어서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분위기가 확 바뀌는 지점이 등장한다. 곳곳에 '수입상가' '인삼' 등의 표지가 붙어 있고, 지금은 누가 읽을까 싶은 중국어와 일본어 호객 문구가 창문을 빼곡이 채운 가게들을 보면 굳이 누가 알려 주지 않더라도 '아, 여기가 남대문시장이구나' 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방금 지나온 명동의 거리에 비하면 제법 많은 인파가 거리를 메우고 있는데, 시기상 거의 전부 내국인인 듯하다. '시장'이라고 하면 으레 연상하게 되는 호객꾼들은 거의 없고, 사람들은 평온하게 물건을 보면서 자기들끼리, 혹은 주인과 대화를 나눈다. 코로나가 시장통마저 얌전하게 만든 것인가 싶기도 하다.

 

 

그릇 도매상은 남대문중앙상가 C동과 B동 3층에 걸쳐 있다. 누가 봐도 '그릇상가'라고 되어 있으니 찾아가기 쉽다.

남대문시장은 처음이라 다소 어색하고 쭈뼛쭈뼛한 느낌으로 들어갔는데, 문간으로 들어간 순간 전후좌우 사방이 그릇이었다. 카와바타 야스나리 선생의 <설국>의 유명한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눈의 나라였다'는 글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 경우 '눈의 나라'보다는 '그릇의 나라'라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코로나의 영향 때문인지 상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덕분에 통행에 크게 방해받지 않고 구경할 수는 있었지만 입 속이 다소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딱히 계획을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구경차 반쯤 충동적으로 들른 것이었기 때문에 이 날은 따로 구매는 하지 않았다. 다만 몇 군데 흥미가 동하는 곳을 마음속으로 찍어 두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며 발길을 돌렸다. 두 번째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사야 할 그릇의 종류도 정해 놨고, 시장에서의 흥정 스킬도 나름대로 (인터넷으로) 공부해 뒀 다. 일단 필요한 것들을 먼저 산 뒤, 느긋하게 가게들을 돌아다니면서 뭔가 재밌는 것은 없는지 관찰해 봤다. 신혼부부들을 위한 그릇 세트나 업장에서 사용하는 무지막지하게 큰 냄비 세트들, 횟집에서 종종 보곤 하는 콘마요가 담겨 나오는 주물팬 같은 것들 사이에 간혹 정말 흥미로운 물건들이 숨어 있다. 이를테면 도대체 어느 회사에서 나온 건지도 종잡을 수 없는 먼지를 뒤집어쓴 모카포트라든가, 1인용 징기스칸에 쓸 만한 미니화로라든가, 어디에서 흘러들어온 건지 너무나도 궁금한 도자기제 체즈베(터키 커피를 우릴 때 쓰는 손잡이가 달린 작은 컵)라든가, 그야말로 일본에서나 쓸 법한 1인용 압력밥솥이라든가.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가게들이 많아 일일이 찍지는 못해 아래의 자료들은 모두 구글에서 긁어왔다.

 

그래도 안캅 골프 모카포트(좌상)은 그나마 좀 있는 것 같다. 나머지는 도대체 이게 뭐야 싶다고.

그 와중에 정말 충격적이었던 물건은 어느 작은 가게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전시되어 있던 벨기에식 밸런스 사이폰이었다. 설마하니 이것도 파는 걸까 싶어서 주인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는데, 시험삼아서 이것저것 집어서 보여주며 주인에게 가격을 물어 봤더니 도대체가 팔고 싶은지 아닌 건지 모를 말투로 단답형으로만 대답하기에 도저히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찾아보니 그래도 한국에서 10만원 언저리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인 모양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희소성이 있을 뿐더러 일단 모양새가 멋들어진 녀석이라 무척 흥미로웠다.

 

요렇게 생긴 녀석이다. 압력차로 커피를 추출한다.

결론적으로 사온 것은 큰 면기 두 장과 소형 시치린七輪 하나, 그리고 시치린에 쓸 수 있는 코팅팬이었다. 예전부터 집에 있는 면기가 영 작아서 국수를 담아 놓으면 넘치기 일쑤인 것이 불만이었는데, 샐러드 보울로도 쓸 수 있고 국수도 시원시원하게 담을 수 있어 무척 마음에 든다. 시치린의 경우 집에서 불을 피워서 떡이나 고기나 생선 등을 간단하게 구워 먹을 심산으로 샀는데, 사장님 말로는 숯을 쓰면 연기가 너무 많이 나고, 고체연료를 쓰면 직화구이를 못 한다 하여 팬까지 하나 더 사게 된 것이다. 하긴 누가 양초에 직화로 고기를 구워먹고 싶어하겠는가(물론 양초와 고체연료의 성분이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석쇠는 요 위에 뭔가 작은 냄비나 모카포트 같은 것을 올려놓고 데울 때에는 쓸만하겠다 싶다. 이렇게 구매한 가격이 모두 합쳐서 10만원 안쪽이다. 시장 특유의 카드를 꺼리는 분위기가 영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에이 요새 누가 카드를 낸다고 돈을 더 받아요~" 하고 능글맞게 한 마디 던지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는 제법 크다는 점도 참고하면 좋을 듯싶다. 면기 팔아 주신 사장님,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