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서부 서울, 그것도 마포구 근방에 산다는 것은 여기저기 숨겨져 있는 흔치 않은 식당들과 마주칠 일이 많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파이 전문점이 그렇다. 파이는 서양의 가정식이라는 느낌이 무척 강한데,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파이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은 오히려 기대하기 쉽지가 않다. 서양에서 온 외국인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한국에서는 정말 제대로 된 서양 음식을 찾기가 어렵다"는 푸념인데, 이태리 음식과 미국 음식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이는) 환경임에도 결국 가장 '서양스러운' 음식인 서양 가정식은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미식가를 나름대로 지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걸어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합정동과 홍대, 연희동과 연남동이 모두 있는 우리 동네야말로 천혜의 입지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인스타그램에 잘 먹히는 가게들이 많은' 동네라는 오명 아닌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정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맛있는 음식으로 승부하는 가게들이 퍽 있다. 이번에 소개할 두 곳의 고기파이집, 마포구 망원동의 '웅파이'와 마포구 동교동의 '파이리퍼블릭'은 한국인들이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접해 본 경험은 그리 많지 않은 '고기 파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가게들이다. 인스타 느낌의 톡톡 튀는 감성도 물론 있지만, 무엇보다도 음식이 훌륭하기 짝이 없는 이 두 가게의 파이들을 모두 사 먹어 보고서 느낀 점을 간단하게 기록해 보기로 한다.
1. 웅파이 : 뉴질랜드식 고기 파이 / 쇠고기 파이와 치킨크림 파이
'웅파이'는 망원시장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더 들어간, 망원한강공원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길모퉁이에 있다. 이 근처에는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망원정이라든지, 보이차 전문점인 '대익차' 등도 있어서 평소에도 종종 찾는 동네이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파출소 근방에 온통 자홍색으로 꾸며진 자그마한 가게가 눈에 띌 것이다. 뭔가 <호빵맨>에 나오는 카레빵맨과도 닮은, 직접 그린 듯한 파이 캐릭터가 귀엽다. 이것이 오세아니아의 감성인가?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니 가게 주인인 듯한 분들이 우렁차게 "어서 오세요~"를 외친다. 힘이 가득하면서도 상당히 살가운 투의 인삿말이어서, 나 같은 낯가림이 있는 사람도 얼떨결에 "아이구 예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할 수밖에 없다. 파이를 추천해 달라는 말에 대뜸 나오는 말이 "다 맛있는데"다. 그 뒤로는 각 파이의 특장점, 그리고 품절된 파이 종류를 알려 주시는데, 자기 음식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절절히 느껴졌다. 비프스튜 파이와 딱 하나 남아 있던 치킨크림파이를 포장해 달라고 말씀드린 다음, 식었을 때는 어떻게 데워 먹느냐고 물었더니 "오븐에서는 180도에 10분, 전자렌지에서는 5분 정도"라고 구체적인 수치를 정확히 알려 주신다. 믿음이 간다.
예전에 어딘가에서 '양식의 기본은 소금간'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른 절인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적절히 간이 돼 있어야 정말 맛있는 음식이라고들 하는데, 웅파이의 파이들은 그야말로 기본에 충실하면서 간이 완벽했다. 출근을 앞두고 비몽사몽한 가운데 먹는데도 바로 눈이 뜨일 만큼 깊으면서도 절묘한 맛이다. 비프 스튜 파이는 향신료가 충분히 들어갔지만 쇠고기의 육향도 충분히 살아 있었고, 치킨 크림 파이는 분명히 깊고 농후한 크림 스튜로 채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하거나 부담스럽지 않게 균형이 잡힌 맛이었다. 파이 반죽의 경우, 자르거나 입에 넣고 씹었을 때 쫄깃쫄깃하면서도 겉면은 페이스트리처럼 얇고 파삭파삭하게 부서지는 식감을 받았다. 음, 훌륭해. 이건 언제 어떻게 사와서 먹더라도 맛있는, 그야말로 '가정식'의 컨셉트에 충실한 느낌의 파이였다.
2. 파이 리퍼블릭 : 남아프리카 공화국식 고기 파이 / 양고기 파이와 쇠고기 스튜 파이
파이 리퍼블릭의 파이를 처음 접한 것은 아내가 점심 식사로 동료들과 함께 이곳을 다녀오면서 나도 한 입 먹어 보라고 파이 한 개를 포장해 왔을 때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음식'이라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장르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해 포장을 부탁했더니, 생각보다 무척 맛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웅파이'와의 비교를 위해, '웅파이'를 방문했을 때와 같이 주말에 포장 주문을 해서 받아온 파이를 아침에 데워 먹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일요일 늦은 오후에 방문한 파이 리퍼블릭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직원들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주문을 받기조차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젊은 홀 서버 한 사람을 붙잡고 포장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이 친구가 한국말을 잘 하지 못 하는 것이다. 겉모습만 보기에는 평범하게 동아시아 느낌으로 보였는데, 아마 동양계 외국인인 듯했다. 별수없이 한국 가게에서 한국인이 영어로 주문을 하는(?) 진귀한 광경을 연출한 끝에, 파이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산 파이는 양고기 파이와 쇠고기 스튜 파이.
기본적으로는 웅파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유럽 스타일의 고기 파이인데, 내용물이 확연히 달랐다. 웅파이는 조금 더 익숙한 맛의 소고기 스튜를 쓴다고 한다면, 파이 리퍼블릭은 역시 '남아프리카 공화국'답게 조금 더 향신료가 꽉꽉 들어찬 느낌을 주었다. 파이 반죽은 파삭파삭보다는 쫄깃쫄깃에 가깝다. 양고기는 특유의 육향을 잡기보다는 오히려 향신료와 조화롭게 살려내려는 느낌을 받았는데, 양고기 향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또한 파이 리퍼블릭에서는 파이에 조금씩 끼얹어 먹을 수 있도록 소스를 같이 제공해 주는데, 열심히 퍼먹다가 다소 국물이 부족해졌다 싶을 쯤해서 끼얹어 먹으면 훌륭하다. 특히 파이 껍질과 정말 잘 어울린다.
3. 요약
1) 둘 다 정말 맛있다. 누군가가 제대로 된 고기 파이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단연 이 두 곳을 추천할 것.
2) 웅파이는 조금 더 초심자에게도 친절한 느낌의 맛. 농후하면서도 부담이 없고 무척 균형이 좋다.
3) 파이 리퍼블릭은 파이 맛에 익숙한 사람들이 도전해 볼 만한 맛. 특유의 향신료가 콧속을 건드리는 느낌이 좋다.
4) 파이 껍질은 바삭바삭함을 조금 더 좋아한다면 웅파이, 쫄깃함을 더 좋아한다면 파이 리퍼블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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