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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기

[방문기] 서울시 서대문구 '롱보트 스모커'

by 집너구리 2021. 9. 19.

정말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새 그릇이나 좀 볼까 싶어 연희동에 있는 모던하우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은은하게 훈제용 칩을 그을리는 향기가 났다. 이 냄새를 어떻게 참고 지나가겠는가. 도대체 어디서 나는 냄새인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로 방금 전에 지나갔던 길거리의 작은 가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니, 이 정도면 이 집 아니고 누가 훈제를 하겠느냐 싶은 가게가 거기 있었다. 연희동을 제법 열심히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가게가 있는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역시 연희동은 재미있는 동네다.

 

노르웨이 국기와 바이킹식 범선이 그려진 로고로 장식되어 있는 이 투박하면서도 힙한 가게의 이름은 '롱보트 스모커'다. 호기심이 동해 네이버 지도에서 리뷰를 몇 개 찾아봤는데, 더더욱 놀랍게도 그 아이돌 전소미 씨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란다. 전소미 씨의 아버지가 노르웨이 혈통의 네덜란드계 캐나다인인데, 자식들에게 훈제 연어를 만들어 주던 경험을 살려 창업한 가게라고. 리뷰가 무척 호의적으로 쓰여 있기에, 궁금해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노르웨이 국기에서 따온 것인가 싶은 붉은색 기조의 페인트로 칠해진 가게 안은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두 개의 쇼케이스 너머로 카운터가 있고, 그 뒤로 오픈 주방 비슷한 것이 있어서 두 명의 점원이 무언가를 열심히 담다가 말고 우리를 맞이했다.

 

막상 가게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훈제 연어의 종류가 많아서, 일단은 설명을 듣고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를 맞이해 주신 분은 무척 친절하게 모든 메뉴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을 뿐더러 간단하게 추천도 해 주셨다. 연어 종류로는 크게 핫 스모크와 콜드 스모크의 두 가지가 있는데, 말 그대로 핫 스모크는 뜨거운 연기로 훈연한 연어, 콜드 스모크는 차가운 연기로 서서히 훈연한 연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핫 스모크는 강렬한 향에 더하여 좀더 익은 느낌이 강하고, 콜드 스모크는 보다 생연어의 질감이 살아 있는 (말하자면 우리가 잘 아는 훈제 연어에 가까운) 녀석이라는 것이다. 일단은 잘 모르는 분야이기 때문에, 좀더 익숙한 콜드 스모크 연어 한 팩을 골랐다. 

 

다음으로는 작은 쇼케이스에 전시돼 있는 가공품들이다. 주로 핫 스모크 연어를 가공해서 만든 녀석들인 연어 파테, 크림 치즈 등이 눈에 띄었다. 우리 부부는 원체 파테를 좋아하기 때문에 일단 볼 것도 없이 파테 한 통을 사기로 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훈제 어란이 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파스타를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았다. 눈물나게 비쌌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녀석이다 보니 더 고민할 것이 없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콜드스모크 연어, 어란, 연어 파테.

* * *

 

사 왔으면 먹어 봐야지. 

일단 파테가 유통기한이 제일 짧다고 하여 먼저 먹어 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서 바게트빵을 구워 준비했다.

 

음, 맛있다!

사진만 보면 완전히 두껍게 치덕치덕 바른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 훈제 향이 상당히 강하므로 그렇게 많이 발랐다간 한동안 입에서 연기 냄새가 가시지 않을 것이다(맞다, 사실 처음 먹을 때 그렇게 발랐다가 깜짝 놀랐다). 강렬한 훈연향에 이어 연어 특유의 부드러운 고소함, 그리고 잘게 잘린 야채들의 향기가 같이 올라오면서 무척 기분 좋은 한 입 식사거리가 된다. 크래커에 얹어 카나페로 먹어도 좋을 듯하다. 맥주 안주로는 더할 바가 없을 테지만, 아침 식사만으로도 벌써 훅훅 사라지고 있다.

 

 

다음은 콜드스모크 연어. 구워 뒀던 바게트빵은 파테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으므로, 이번에는 평범한 식빵을 구워 준비했다. 아내가 양파를 채썰어 볶아 준비하고, 실리제롬의 레몬딜 크림치즈를 바른 빵 위에 볶은 양파, 토마토, 연어를 층층이 쌓아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핫스모크 연어로 만드는 파테와는 달리 강렬한 훈연향이 치고 올라오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입 안을 감도는 부드러운 훈연향과 볶은 양파, 연어의 부드러운 살과 토마토의 향그러움,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큼한 레몬딜 크림치즈의 향미까지. 한동안 샌드위치 먹을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게 되니 아침부터 퍽 행복해졌다. 연어가 자기 주장을 잃지 않으면서도 모든 재료들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궁금해서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서도 연어 살을 한 점 집어서 따로 먹어 보았다. 연어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살아 있으면서, 비리지 않고 은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는 훈연향으로 인해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어디 가서 훈제 연어를 다시 먹을 수 있을까? 뭐 먹을 수야 있겠지만, 만족하기란 무척 힘들어질 듯한 생각이 들었다.

 

어란은 곧 파스타를 해 먹을 생각이다. 벌써부터 기대가 하늘을 찌르는 중. 우연히 발견해서 들어간 가게가 이처럼 마음에 쏙 들기가 참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어려운 일을 해내네. 훌륭한 질의 연어,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 혹시라도 가게에 가실 일이 있으면, 전소미 씨의 사인 종이가 무척 귀여우니까 꼭 찾아 보시길. 그리 어렵지 않은 곳에 붙어 있다. 또 카운터 뒤에 뭔가 붉은색 하트 모양과 푸르고 흰 줄무늬가 그려진 천(아래 같은 모양)이 걸려 있을 것인데, 전소미 씨나 그의 아버지 매튜 다우마 씨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은 눈여겨 보시면 재미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