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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기

[방문기] 서울역그릴을 추억하며

by 집너구리 2022. 1. 16.

그런 식당이 있다. 자주 찾아가지는 않는다. 다만 언제나 근처를 지나가다 슥 들어갈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발걸음한 지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있으리라는 기묘한 신뢰. 일방향적인 신뢰이다 보니, 그러한 믿음은 여지없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깨지고는 한다. '서울역 그릴'이 그러했고, 그렇게 끝났다.

 

10월 말에 휴가를 내고 오랜만에 서울 산책을 나섰던 날, 참으로 오래간만에 찾아가 혼자만의 식사를 즐겼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11월 30일 저녁에 문득 트위터를 보고 있다가 '서울역 그릴'의 폐점 소식을 담은 트윗이 눈에 띄었다. 100년 가까이 영업한 가게이니만큼 섣불리 문을 닫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오늘이 폐점일이란다. 육시를 해도 시원찮을 전염병이 돈 지도 어느덧 만 2년 가까워, 집 근처 홍대나 신촌만 나가도 을씨년스러운 공실들이 가득한 하수상한 시절이라고는 하나, '서울역 그릴'만큼은 그런 풍파 속에서도 맥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기실 나만이, 아니 많은 사람들이 제들 멋대로 가졌던 근거 없는 믿음이다. 

 

연애 시절부터 아내와 종종 찾아서 경양식을 즐기던 곳인지라, 가장 먼저 아내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그 때가 오후 다섯 시경. 나의 일반적인 퇴근 시간까지는 아직 두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지만, 이미 추억이 담긴 공간들을 어어 하는 사이에 여럿 잃어버린 바 있는 우리 부부는 이번만큼은 그렇게 '서울역 그릴'을 떠나보내지 않기로 했다. 이럴 때만큼 우리 회사가 자율시간 근무제라는 것이 고마울 때가 없다.

 

다섯 시 반쯤 집을 떠나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여섯 시쯤이었다. 마침 근방에 있던 어머님과 처제에게 아내가 연락을 취해, 넷이서 같이 서울역 그릴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기로 했다. 어머님과 처제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울역 그릴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평생 동안을 살았는데, 조금 더 일찍 다닐 걸, 하고 어머님이 못내 아쉬워하셨다.

 

원래 커틀릿류, 함바그, 오므라이스, 볶음밥, 스테이크 등 다양한 메뉴를 팔지만, 폐점 준비 때문에 4가지 요리만 주문할 수 있었다.

 

'서울역 그릴'이 문을 닫는다는 기사의 댓글을 보면 뭐 운영 주체가 너무 자주 바뀌어서 지금은 껍데기만 남았다거나, 예전과 맛이 사뭇 달라서 실망했다든가 하는 글들이 많이 달려 있다. 그러나 1925년 일제 강점기 때부터 같은 서울역에서 같은 이름과 같은 메뉴로 지금까지 영업해 왔다는 사실은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 입맛이라는 것도 나이가 들면서 계속 바뀌게 마련인데, 바뀌어 가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어 식당의 레시피가 변화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천사백년 간 이어져 오다가 지금은 브랜드만 남은 일본의 건설업체 '콘고구미'가 다른 건설업체에 인수되어 고건축 유지보수 전문회사로 변화하기는 했지만 그 이름값과 기술력만큼은 건재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서울역 그릴'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었던 타일벽. 이 광경도 이제 더는 못 보게 되었다.

 

네 명이 일행으로 간 만큼 다양한 메뉴를 시켰어도 좋았겠지만, 폐점날인 만큼 모든 메뉴가 다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다. 주문 가능한 네 가지 메뉴인 돈까스, 생선까스, 오므라이스, 해물볶음밥 중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돈까스 두 개에 생선까스 두 개를 시켰다. 마지막이니만큼 가장 대표적인 메뉴로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사실 '서울역 그릴'의 음식들은 입에 넣은 순간 눈이 번쩍 뜨이거나 '삐로로롱'하는 배경음과 함께 <요리왕 비룡>의 심사위원처럼 감탄사를 줄줄 늘어놓을 만큼 엄청나게 맛있지는 않다. 대신 이곳의 음식들은 하나같이 기본에 충실하다. 오래 전 부모님 손을 잡고 갔던 경양식집에서 먹었던, 수프와 샐러드로 코스의 구색이 갖추어진 경양식 돈까스의 기름지면서도 부드럽게 바삭한 그 맛이 그대로 살아 있다. 깔끔한 샐러드와 딱 기본의 맛이 나는 크림수프, 돈까스 위에 촉촉하게 뿌려져 나오는 데미글라스 소스와 어쩐지 정겨운 통조림 야채들. 먹고 있을 때만큼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만 같은 그 맛이다. 생선까스도 마찬가지다. 새우튀김과 곁들여 나오는, 부드러운 흰살생선에 딱 알맞게 간을 해서 튀김옷을 입혀 튀겨낸 커틀렛이다. 타르타르 소스에 찍어 먹으면 딱 산뜻하고 깔끔한 맛이 난다. 생선까스야말로 정말 요새는 맛있게 하는 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무난한 듯하면서도 사람의 정서를 자극하는 맛이니 구십몇 년 간 버텨 왔을 것이고, 우리 부부에게는 문득 서울역을 지날 때쯤 간절해지곤 하는, 자잘하면서도 진한 추억들이 담긴 공간이어 왔던 것이리라.

 

요리에 기본으로 나오는 전채, 크림수프와 야채 샐러드.
다 먹으면 무척 배불렀던 경양식 돈까스. 이 곳의 데미그라스 소스는 잊지 못할 것이다. 통조림 야채가 귀엽다. 요새 어느 식당에서 통조림 야채를 이토록 푸짐히 돈까스 밑에 얹어 주겠는가. 밥도 잔뜩 같이 나오는데, 찍지를 못했다.
생선까스는 새우튀김 두 개에 생선 필레 하나가 나온다. 타르타르 소스에 찍어 먹으면 산뜻하다. 간도 딱 적절하다. 

 

이른바 '추억 보정'이라는 것이 붙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서울을 제 집처럼 드나든 지 10여 년, 그 동안 늘 '서울역 그릴'은 당연한 듯 그곳에 있어 왔고, 그럴 줄로만 알았다. 아쉬운 마음에 계산하고 나오면서 점원에게 '재오픈의 계획이 있는지'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앞의 손님도 마침 그 비슷한 질문을 물어보는 눈치였다. 짐짓 모르는 체하고 내가 계산할 차례에 다시 물었더니,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서는 재개장할 계획이 없단다. 콘고구미가 39대 당주를 마지막으로 혈통의 대가 끊겼지만 '언젠가 나타날, 40대 당주에 적합한 인물을 기다릴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처럼, 언젠가는 서울역이 아니더라도 근처 어딘가에서 다시금 간판을 걸고 예전의 경양식들을 다시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 본다. 

 

요즘 멸종 위기인 음식 모형도 여기서는 볼 수 있었다. 
안녕, 언젠가 또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