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신세를 지고 있는 전화일본어 선생님으로부터 무려 '텐동집'을 추천받았다. 수업 시간에 맛집이나 식재료에 대한 정보를 종종 교환하고는 있지만, 무려 한국에 있는 일식집을 추천받을 줄은 몰랐다. 선생님의 먹을 것에 대한 열정은 나 못지않다는 것을 이전부터 알고 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이 추천, 믿을 만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귀중한 기회, 반드시 유효활용해야 한다. 주말에 아내와 같이 홍대에 나간 김에 한번 들러 보기로 했다.
가게 모양새가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예전에도 일식집이 있던 자리다.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여기엔 텐동집 '후쿠야'라는 가게가 있었더랬다. 제법 맛있는 곳이어서 연애 시절 아내와 같이 가끔씩 발걸음을 하던 곳인데, 어느 순간 폐업해서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다시 여기서 제법 멀끔한 일식 요릿집이 영업하고 있다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이다.
반지핫방에 있는 가게로 들어서면 테이블석 몇 개와 카운터석 몇 개가 있고, 카운터석에는 모두 아크릴 칸막이가 쳐져 있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사람들인 양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이 순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즐겁다. 음식을 먹고 나면 되려 아쉬워지게 되는 일도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 '가장 즐거운 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평균적으로 가장 만족도가 높은 시간'이 바로 메뉴를 고를 때가 아닐까 싶다. 아내는 나보다 식사량이 적기도 하고, 기름진 생선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죠(상)텐동을 한 그릇, 나는 간만에 붕장어 텐동이 먹고 싶어 붕장어가 들어간 '에도마에텐동' 한 그릇을 시켰다. 단품 메뉴를 무엇을 시킬까 퍽 고민한 끝에 가지까지 주문했다. 다른 튀김도 하나같이 맛있어 보였지만, 아무래도 이런 튀김집에 오면 가지는 꼭 한 입 시켜먹어 보게 된다.
죠(상)텐동은 보리멸, 블랙타이거새우, 김, 온천계란, 꽈리고추, 관자, 오징어튀김이 올라가고, 에도마에텐동은 여기에서 보리멸이 빠지고 붕장어가 추가된 구성이다. 제법 큰 토막으로 튀겨진 붕장어는 부드럽고 기름진 살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훌륭하다. 아내의 보리멸을 반만큼 내가 먹고, 대신 내 붕장어를 반으로 갈라 아내에게 나눠 주었는데, 물론 붕장어가 맛있다는 사실은 부정의 여지가 없지만 의외로 이 보리멸이라는 생선이 무척 맛있었다. 흰살 생선인데, 살도 쫀득한데다 무척 고소하고 담백해서 이런 생선이 있었나 싶을 만큼 멋진 맛을 선사하는 녀석이었다. 이름만 봐서는 멸치 종류 비슷한 무언가일 것 같은데, 찾아보니 멸치랑은 영 관련이 없는 녀석이란다. 낚시로 엄청나게 잘 낚이기 때문에 낚시꾼들 사이에서는 잡어 취급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튀김으로 만들면 본체 훌륭한 생선이라고. 어쩐지.
다른 재료들의 튀김도 뭐라 더 말할 필요 없이 멋들어졌다. 텐동에 올라가는 튀김은 파삭파삭하기보다는 바삭하면서도 살짝 부드러운 느낌을 내어 소스가 잘 배어들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하는데, 바로 그 관건이 잘 지켜진 튀김들이었다. 추가 단품메뉴로 시킨 가지 또한 바삭바삭한 튀김옷 밑에 숨어 있는 가지 특유의 촉촉한 느낌이 부담감 없이 잘 어울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감동한 것은 밥의 질이었다. 사 먹는 밥이 이렇게 향기롭고 고소할 일이 있나? 텐동이란 겉보기에는 튀김이 가장 화려한 역할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것들도 아래에 깔리는 밥과 소스가 맛없으면 말짱 꽝인 셈이다. 부담감 없는 소스와 딱 어우러지는, 고소하고 달달하기 짝이 없는 흰쌀밥이 정말 절묘했다.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같이 나오는 미소시루 또한 흥미로웠다. 그냥 다시마만 갖고 우린 국물은 아닌 것 같은, 보다 깊이 있는 맛의 미소시루였는데, 작디작은 두부 조각들이 들어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도대체 무슨 맛일까 싶었는데, 나중에 일본어 선생님과 이야기하다가 '가쓰오부시를 쓰는 것 같다'는 선생님의 추측에 절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그게 감칠맛의 원인이었군.
제대로 된 텐동을 먹은 지 정말 오래 되었는데, 모처럼 이렇게 훌륭한 가게를 찾게 되어 마치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만 에도마에텐동은 가격 측면에서도 양으로 보아도 다소 특별한 기분이 드는 날에 먹고 싶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먹게 된다면 죠텐동을 주로 시키게 되지 않을까. 보리멸도 맛있고. 이렇게 한동안은 출장을 가지 못해 채워지지 못하는 본토의 일본 음식에 대한 갈망을 잠시나마 잠재울 수 있게 될 듯하다.
'방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문기] 서울시 마포구 '스시 토와' (0) | 2022.01.16 |
---|---|
[방문기] 서울역그릴을 추억하며 (0) | 2022.01.16 |
[방문기] 서울시 마포구 '알맹상점' (0) | 2021.11.01 |
[방문기] 서울시 강남구 '카파노' (0) | 2021.10.25 |
[방문기] 서울시 종로구 '통인동 커피공방' (0) | 2021.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