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롯데백화점 앞에서 대로변이 아닌 옆길을 타고 조금 걷다 보면 다소 독특한 느낌을 주는 골목으로 접어든다. 파룬궁 신도들이 삼삼오오 모여 좌선을 하고, 길거리에는 한국 특유의 잿빛 건물들 사이로 점점 붉은색과 금색의 장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솟은 콧대마냥 높고 위압적인 중국대사관 담벼락 근처까지 오면, 이곳이 구한말 형성되기 시작했던 이른바 '최초의 차이나타운'이다. 일본인들이 바로 길 건너편에 다이이치은행 경성지점 건물(뒤에 조선은행, 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세우고 명동을 일본인 주거지로 개발하면서(당시의 이름은 '메이지초明治町', 현재 명동예술극장 자리에 있던 옛 일본식 극장은 '메이지자明治座') 화교들의 입지는 상당히 줄어들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이래로는 더더욱 그 위상이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 지역에서 화교의, 정확히는 중화민국 계열 화교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당장 중국대사관 맞은편에 있는 흰색 2층 건물에는 여전히 청천백일 문양이 떡하니 박혀 있고(삼민주의청년동맹 건물), 그 옆에 있는 것은 중화민국 정부의 지원으로 세워진 '한성화교소학교'이며, 화교소학교 앞에서 한국은행 방면으로 꺾으면 사단법인 한성화교협회 건물이 나온다. 이쪽 길을 지나가다가, 흥미로운 가게 하나를 발견해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도향촌'이라는 이름의 월병 가게이다. '벼의 향기가 나는 마을'이라니, 가게 이름이 퍽 시적이다.
마치 입춘대길을 붙여 놓듯이 가게 입구 양 옆으로 '원초상시元宵上市'라는 한자가 나붙어 있다. 위안샤오, 즉 정월 대보름에 중국 사람들이 먹는 경단떡이 출시되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바로 며칠 전에 대보름이 지났다. '고객님께서는 56년 된 도향촌을 들어오고 계십니다'라는 선전 문구가 인상적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게인 모양이다.
나이 지긋한 여자 점원이 가게를 지키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일어서며 인사를 한다. 생각보다 월병의 종류가 제법 많아서 당황했다. 눈에 들어오는 것만 열 가지는 된다. 제일 크고 탐스러워 보이는 '십경월병' 하나를 산 뒤, 어떤 것이 제일 많이 나가느냐고 여쭤 보았다. 단 것을 좋아한다면 대추와 팥이 들어간 것을 고르는 것이 낫고, 바삭하고 고소한 것을 좋아한다면 깨가 들어간 것이 낫다는 추천을 받았다. 강정이나 송편처럼 깨가 들어간 과자를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깨가 들어가고 밀가루가 들어가고 바삭하다니 딱 듣기에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 번 사 먹어 봐야지. 다른 녀석들은 어느 정도 맛이 상상이 되지만, 깨가 들어간 '마지수'는 잘 머릿속에서 맛이 짜여지지 않는 느낌이라 녀석을 한 개 사기로 했다. 가격은 십경월병 하나에 오천 원, 마지수 하나에 이천팔백 원. 적은 가격은 아니긴 하다만, 딱 보기에도 한 조각만 찻간식으로 같이 먹더라도 배가 찰 것 같이 생겼기에 납득하기로 했다. 재료도 싼 재료가 아니기도 하고.
사실 월병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은 '퍽퍽하고 과하게 단 과자', '한두 입 먹으면 물리는 과자'였다. 지금까지 누가 사다 준 월병이라는 건 대부분 그랬다. 과자류를 전반적으로 좋아하는 아내도 월병은 썩 내켜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도, 사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월병을 사 갈 생각을 했는지 도통 알 수 없다. 가게가 너무 궁금하게 생긴 것도 하나의 이유일 테고, 화교 거리에서 오래 장사한 월병 가게라면 뭔가 다르겠지 싶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집에 도착해서 월병을 선물이라고 내미니 아내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아 그래?" 정도. 우리 부부 둘 다 정말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멍하니 뒀다가는 언제까지고 집에 둘 것만 같아서, 마침 일요일 아침을 늦게 먹은 김에 약간 성대한 간식 삼아서 한번에 먹어 보기로 했다. 나는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려 준비했고, 아내에게는 따뜻한 호지차 한 잔을 타 주었다. 중국 과자니까 아무래도 차가 어울릴 것이라는 계산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둘 다 생각보다 꽤 맛있었다. 가장 먼저, 두 과자 다 물리도록 달지 않았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월병은 '너무 달고 퍽퍽한 과자'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의외로 속에 수분이 살짝 있으면서도 전반적으로 무척 고소하고 속재와 반죽의 조화가 훌륭했다. 특히 건과일을 꺼리다 못해 혐오하는 수준인 아내도 십경월병 안의 크랜베리는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려서 맛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과자인 줄은 미처 몰랐지.
사실 십경월병은 어느 정도 예상한 맛이기는 했는데, 정말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은 마지수를 한 입 베어물었을 때였다. 먼저 마지수 한 입을 먹어 본 아내가 "엥? 왜 불고기 맛이 나지?"라고 하길래, 고기도 들어가지 않은 과자인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신반의하며 나도 한 입을 베어 물어 보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내 말마따나 정말로 은은하게 돼지고기 불고기의 향이 나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중국 요리라 라드를 쓸 거라는 예측은 희미하게 드는데, 간을 할 때 살짝 간장 같은 걸 끼얹기라도 하는 걸까? 살짝 짭쪼름하면서도 반죽과 깨소 자체의 단맛이 이를 잘 뒷받침해 주는, 중독성이 있는 맛이었다. 어떻게 보면 단짠단짠의 이른 형태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따뜻한 차와 같이 먹으니 정말 훌륭하다. 이제까지 내가 먹었던 월병은 도대체 뭐였단 말인가.
사실 명동 근방에는 이런 오래 된 중국 과자 가게나 중국 물품 가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숨겨진 보배와도 같은 이런 곳들에 대해서 이제까지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서울 시내에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 모르는 요즘 같은 시절이기도 하니 좀 더 자주 깊숙이 돌아다니면서 숨겨져 있는 재미있는 곳들을 더 찾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또 월병이 고프다. 다음에 명동에 나가면 한 번 더 사 와야지.
추신. 오랫동안 화교들을 주 고객으로 장사해 오신 사장님조차도 '특별시'의 한자 표기를 틀리신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고... 정말 세상 일을 그렇게 하나하나 복잡하게 생각하면서 살 것까지는 없다는 깨달음을 다시금 얻었다는 후문이다. 사람이 실수 좀 하면서 살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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