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같이 머리를 다듬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 식사를 하기 위해서 미리 찾아 둔 가게를 찾았지만 열두 시를 갓 넘긴 시간인데도 벌써 대기 인원이 한 무더기는 있었다. 오랜만에 라멘을 먹으려던 기대가 물거품이 될까 하였는데, 운 좋게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평가가 좋은 다른 라멘집이 있어서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합정동 교보문고 뒤편에 있는 라멘 가게, '잇텐고'이다.
이름을 듣고 추측했던 대로 가게 이름의 뜻은 '1.5'인 듯하다. 왜 그런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메뉴판이 미리 밖에 나와 있고, 대기자 명단에 이름과 주문할 메뉴를 적어 놓고 기다리면 점원이 나와서 호출하는 시스템이다. 라멘집이라 그런지 순환은 빠른 편이어서 그다지 오랫동안 기다리지는 않았다. 사람이 들어가기 전에 먼저 메뉴 주문이 들어가는 모양인지, 가게 안으로 입성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음식이 나왔다.
메뉴의 기본은 '키츠네'라는 이름의 하카타풍 돈코츠라멘인 듯하다. 나머지는 같은 수프를 베이스로 해서 어레인지를 넣은 듯한데, 매콤한 '키요마사'와 바질이 들어간 '미도리카메'까지 해서 세 종류의 라멘이 있다. 처음 가는 라멘집에서는 반드시 기본 메뉴를 시켜서 먹어보는 습관이 있다. 관건은 나머지 두 가지의 메뉴인데, 어느 정도 맛이 상상되는 '키요마사'와는 달리 '미도리카메'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조합이라 퍽 흥미로웠다. 돈코츠라멘에 바질을 풀어서 먹는다고? 궁금하니까 한 번 시켜 봐야지. 추가로 아지타마고 두 개를 시켰다. 보통 라멘 먹으러 가면 맛달걀은 기본으로 넣어 주지 않던가. 요새 마포구 인근에 횡행하는 수많은 라멘집들의 터무니없는 가격에 비하면 제법 합리적인 값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지울 수 없다.
가게 안은 일본 분위기를 내는 여러 소품들이 즐비한, 그러면서도 난삽한 느낌이 들지 않는 분위기였다. 귀여운 물고기 모양의 수저 받침이나, 무슨 화투패처럼 그림을 그려 놓은 멋들어진 시치미 통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도 그놈의 원피스 피규어가 없다는 점만으로도 일단 가게 분위기에는 가점을 주고 싶다. 부엌문 앞으로 디귿자 모양의 카운터가 둘러져 있고, 거기 옹기종기 앉아서 식사를 하는 형태이다. 요즈음은 이런 식의 카운터 구성이 유행하는 모양이다.
보통의 센스라면 '돈코츠 라멘'이라든지 '바질 라멘' 같은 식으로 이름지었을 법도 한데, 메뉴 명명 센스가 독특하다. '키츠네'는 '여우'라는 뜻인데, 보통은 커다란 유부를 얹은 오사카식 우동을 가리켜서 그렇게 부른다. 큼지막한 차슈 두 조각이 면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연상이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미도리카메'는 '청거북'이라는 뜻이다. 예전에 으레 반려동물로 기르곤 하던 붉은귀거북을 그렇게도 불렀다. 원어로는 '미도리가메ミドリガメ'라고 부르는 것이 정석이기는 한데, 메뉴명이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과연 잘게 으깬 바질이 골고루 풀어져 있는 수프를 보고 있자니 청거북 등딱지 색깔이 연상되기도 한다.
각자 반 그릇씩을 먹고서 교환해서 먹어 보기로 했다. 먼저 나는 '키츠네'를 맛본다. 정석적인 돈코츠 라멘의 맛에 가깝다. 현지식으로 하려면 더 짭짤해야겠지만, 요 정도면 나는 만족스럽다. 코로나가 터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라멘이 너무 먹고는 싶은데 라멘 가게에 갈 수는 없어서 고심 끝에 직접 만들어 먹어 보기까지 했을 만큼 라멘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정도면 한국인 입맛에 맞게 잘 어레인지된 돈코츠 라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라멘집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때와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지기는 했다. 바리카타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꼬들하게 잘 삶겨진 면과 가느다란 파채의 궁합이 좋다. 아, 같이 나오는 단무지는 유자즙을 뿌려 나오거나 유자에 절여져서 나오는 모양이다. 향긋한 유자 향이 상큼함을 더해 준다.
다음으로는 '미도리카메'다. 아내가 먼저 절반을 먹고 넘겨 준 것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처음 맛은 생각보다는 그렇게 임팩트가 있지는 않았다. 돈코츠 라멘인데 바질 향이 살짝 나는 그런 정도인 것 같은데? 그런데 국물을 한 입 들이킨 순간 앞에서 한 말은 취소하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바질이 돈코츠 수프에 잘 어울릴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바질이라는 허브가 원체 기름이랑 잘 어울리는 녀석이기는 한데, 돼지기름과 만나니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다. 국물 들이키는 것이 몸에 좋지 않은 줄을 알면서도 계속 홀짝홀짝 마시게 된다. 훌륭하다. 물론 '키츠네'에서 엿볼 수 있는 기본기가 충실한 덕에 그 변주인 '미도리카메'가 더욱 돋보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교자 한 접시를 곁들여서 맥주 한 잔과 같이 든다면 그야말로 최고겠으나, 아쉽게도 잇텐고에서는 교자는 팔지 않는다. 대신 메뉴에는 없으나 공깃밥을 추가할 수 있는 모양이니, 양이 조금 부족하다 싶으면 공깃밥을 추가해 먹는 것도 괜찮으리라.
간만에 깔끔하고 맛있는 라멘 한 그릇을 들었다. 날씨만큼 기분이 한껏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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