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가게들이 있다. 정말 맛이 좋은 음식을 파는 곳일 수도 있고, 거기에 얽힌 추억과 좋은 사람들과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분 좋은 친절을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로서는 운이 좋게도 그렇게 좋은 기억들로 가득한 가게들을 만날 기회가 제법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최근에 만나게 된 가게들 중 하나로, 상암동에 위치한 '고수한잎'이라는 가게를 소개하고자 한다.
식당들은 한 집 건너 하나 있지만 내 한 끼를 의탁할 곳은 찾기 어려운 상암동의 한 골목, 큼지막한 간판 하나 없이 그저 유리에 그린 고수 이파리 한 장만 나름대로의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가게가 있다. 카운터 자리 여덟 석짜리 단촐한 내부. 본격적으로 파는 음식 또한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베트남식 쌀국수 한 사발뿐이다. 정말 음식 메뉴는 이게 다이다. 마치 제법 마니악한 일본 단편 미식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설정(?)이다.
그런데 이 단일 메뉴인 쌀국수가 정말 물건이다. 보통 우리가 흔히 아는 베트남식 쌀국수(퍼)는 북부(주로 하노이)식인데, 쇠고기나 닭고기로 국물을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고수한잎의 쌀국수는 돼지고기 베이스다. 내가 물론 베트남에 가 보거나 살아 본 적은 없기 때문에 베트남 북부 사람들이 쌀국수를 만들 때 돼지고기를 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국내에서 먹어 본 쌀국수 중 돼지고기를 베이스로 한 녀석은 처음이다. 맑고 깊은 맛을 내는 국물에 강하지 않고 은은하게 치고 올라오는 이국의 향신료 향, 풍성하게 들어간 면과 돼지고기 덩어리 등 하나부터 열까지 만족스러움 투성이다. 요새는 베트남 쌀국수를 시키더라도 면보다 숙주가 더 많이 들어 있기가 일쑤이고 고기는 꼴랑 얇게 썬 양지 조각 두세 점 정도인 경우가 많은데, 맛과 양을 이처럼 모두 만족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하다.
친절한 사장님은 국수를 갖다 주면서 어떻게 먹는 것이 제일 맛있는지 조곤조곤 설명해 준다. 국물을 먼저 맛본 뒤 마늘식초를 한 바퀴 정도 입맛에 따라 둘러 먹는 것이 좋단다. 조금 맵게 먹고 싶다면 베트남 고추를 좀 넣으면 되지만 나는 매운 것을 정말 못 먹기 때문에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다. 재미있게도 양이 부족하다면 면이나 밥을 더 시켜도 된다. 무한리필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 오면 꼭 밥을 조금 더 부탁해서 국물에 말아 먹곤 한다. 실없는 농담으로 '한국인은 뭐든 국밥으로 만들어 먹는다'고들 하지만, 이건 정말 못 참는 수준의 국물이다. 밥을 마는 순간 순식간에 광화문에 있는 모 돼지국밥집에서 파는 것처럼 담백하고 깔끔한 국밥이 완성된다. 그런데 인제 베트남 향이 살짝 가미된. 아내는 나에게 농반진반으로 "아예 국밥 버전도 팔면 좋을 텐데!"라고 이야기하고는 한다.
국수도 맛있고, 사장님도 친절한 이 곳의 또 하나의 포인트는 곳곳에 은근하게 드러나는 사장님의 배려이다. 오른쪽 카운터석으로 돌아는 자리에는 카운터석과는 다르게 살짝 낮은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 여기는 아이를 데려온 손님이나 몸이 불편해서 카운터에 앉기 어려운 손님들을 위한 좌석이다. 다른 손님들처럼 카운터에 앉을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이 정도의 배려조차도 하지 못해 소위 노키즈존이니 하는 옹졸한 짓거리를 하는 식당들이 늘어나고 있는 작금에 더욱 빛나는 태도다. 또 하나의 배려는 주문 키오스크에 놓여 있는 돋보기 안경이다. 40대에서 70대까지의 연령에 각각 맞춰서 한 벌씩 준비해 두었는데, 나는 은행이나 관공서도 아닌 곳에서 이렇게 다양하게 돋보기를 준비해 둔 식당은 난생 처음 봤다. 키오스크도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주문 방식으로 되어 있었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여기에 얼마나 왔다 가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의 배려를 하고 있는 듯하여 보기가 좋다.
감탄을 자아내는 쌀국수 한 그릇에 다양한 손님들을 위한 사장님의 은근한 배려까지, 언제나 기분 좋게 한 그릇을 하고 돌아가게 되는, 별다를 것까지는 없더라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식당. 앞으로도 웬만해서는 승리하기 힘든 식당들의 격전지 이곳 상암에서 국수 면발처럼 가늘고 길게 장사해 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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