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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191005 Taiwan

대만유람기 2019 (7) : [2일차] 국부사적관, 타이베이 역에서 고양이마을 허우퉁까지

by 집너구리 2020. 4. 21.

타이베이국부사적관臺北市國父史蹟館, 쑨원의 자취를 기리는 공원

 

까오지에서 배불리 밥을 먹고 느긋하게 걸어 타이베이 역으로 향했다.

허우퉁으로 가는 일반열차 시간까지는 아직 조금 여유가 있어서, 그 동안에 무얼 할까 고민하던 차에 타이베이 역 바로 앞의 교차로 근방에 작은 공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40분 정도 시간이 비니, 여기서 20분 정도 거닐면서 시간을 때우다 출발해도 기차 시간에는 맞겠다 싶었다.

 

로마자 표기만 봐서는 대체 무슨 박사를 기념하는 공원인가 싶겠으나, Sun Yat-sen이란 신해혁명의 주도자이자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모두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孫文 박사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Yat-sen은 그의 자 '일선逸仙'을 광둥어식으로 읽은 것이다. 어쩐지 공원 문 앞에 웬 낯이 익은 콧수염 난 아저씨 동상이 서 있나 했더니, 쑨원 박사를 기념하는 '국부사적관'이라고 한다. 대륙식으로 높은 벽을 쳐 놓고 벽 안으로는 연못과 인공산 등으로 이루어진 중국식 정원을 지붕이 덮인 회랑이 둘러싸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웬 일본식 가옥이 한 동 서 있다. 대만일치시기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유명한 료칸 '우메야시키梅屋敷(중국식 발음으로는 '메이우푸')' 건물로, 쑨원도 타이베이에 체재하던 1913년경에 이 건물에서 묵었던 적이 있다나.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씨임에도 그나마 회랑 안에서 연못을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선선함을 느끼려 애를 써 보았지만, 어쨌든 덥긴 더웠다. 회랑에서 뭔가 열심히 화보를 찍던 젊은 사람들이 있어서 마냥 회랑을 차지하고 있을 수만은 없기도 했지만. 혹시 타이베이 역 근처에서 시간이 뜬다면 한번 가 보시라. 공원 입장은 무료이다.

양안의 국부, 콧수염맨 손일선 선생님.
구 '우메야시키(메이우푸)' 건물. 쑨원의 저술과 유품 등을 전시해 뒀다는데, 시간에 쫓겨 못 들어가 봤다.
도심 속의 고요란 이런 것이지. 파릇파릇하다.

 

타이베이 기차역, 통합 패스를 사용할 때는 조금 일찍 가세요

 

한 20분 정도 여기에서 시간을 때우며 연못 속의 거북이를 관찰하다가, 느지막이 나와서 역으로 향했다. 역 동편에 전시되어 있는 타이완에서 가장 오래 된 증기기관차를 지나서 시원한 역 안으로, 지하 개찰구로 내려간다. 주섬주섬 가방 속에서 레일 패스를 꺼내서 여권과 함께 손에 쥔다. 처음으로 패스를 개시하는 것이다. 떨릴 만도 하다.

13시 18분 발 지룽基隆행 구간차를 탄다. 구간차는 대략 비둘기호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니나 다를까, 개찰구에서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개찰구에 서 있던 나이 지긋한 아저씨 역무원이 우리 패스를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왜 고속철도 패스를 이리로 갖고 왔어요? 여긴 국철 개찰구예요"라고 말씀하시길래, 짧은 영어로 계속 "이건 통합패스라서 고속철도랑 일반열차 다 쓸 수 있어요"라고 설명드리며 뒤쪽 페이지를 펼쳐서 보여드렸다. 역무원 아저씨는 거기 써 있는 안내문을 읽어 보더니 그제서야 "아 맞구나! 미안해요, 미안해"라고 하면서 들여보내 주셨다. 여유 있게 역에 도착해서 망정이지, 딱 맞춰 들어오기라도 했으면 그대로 한 40분 정도 더 열차를 기다릴 뻔 했지 뭐야.

 

타이베이의 많은 부분이 그렇지만, 타이베이 기차역은 많은 부분에서 일본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에 열차를 깔 때부터 일본의 입김이 작용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철도망을 현대적으로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을 벤치마킹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역명판은 색깔 때문인지 케이큐 전철이 생각나게 하고
기차 발착 표시판. 나 이거 오사카에서 엄청 많이 본 것 같아. 
우리가 탈 지룽행 구간차(비둘기호급)가 들어오고 있다.

차내에서는 사진을 찍기가 꺼려져서 차내 전광판만 한 장 찍고 말았는데, 신기한 것은 기차에 탄 젊은 사람들이 다들 뭔가 하나씩은 먹을 것을 들고 와서 차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 먹고 떠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타이베이 첩운에서는 먹을 것을 들고 타기만 해도 벌금이 엄청 깨진다고 하던데, 국철 기차에서는 상관없는 걸까? 하긴 한국에서도 대도시 지하철 안에서 뭔가를 먹는 것은 영 눈치가 보이지만 멀리 나가는 기차를 탈 때는 다들 뭔가 사 들고 타서 먹으면서 타니, 비슷한 걸지도 모르겠다. 기차가 시내를 벗어나 달리기 시작하면서 점차 높은 빌딩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논밭과 멀리 보이는 높은 산들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와 아내는 기차에서도 무척 잘 자는 타입이지만, 일본도 아니고 말도 잘 모르는 나라에서 졸다가 내릴 역을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난다는 생각에 아내만 재우고 나는 열심히 깨어 있으려고 노력했다. 인터넷도 뒤적거리고, 캔디크러쉬 사가도 하고, 데레스테랑 밀리시타 이벤트도 뛰고...

 

한 시간 좀 덜 되게 달렸을까. 이제 주위에는 숫제 논밭조차 사라지고, 검푸르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나무가 우거진 산들과 간간이 보이는 계곡들이 차창 밖을 스쳐 갔다. 안내방송을 들으며 나는 아내를 깨웠다. 우리의 첫 목적지인 '허우퉁猴硐' 역에 도착한 것이다.

 

깊은 산 속에 있는 허우퉁 역.

 

 

허우퉁猴硐, 몰락한 탄광촌이 고양이 덕분에 살아나다

 

이름을 구성하는 한자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허우퉁'은 원래 '원숭잇골'이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원숭이가 많이 살아서 '원숭잇골'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청나라 대부터는 탄광이 발견되어 탄광도시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한국의 태백이나 정선처럼, 석탄의 수요가 점차 떨어지면서 탄광업은 사양 산업이 되었고, 허우퉁도 거기에 휩쓸려 인구수가 격감하기 시작하였다.

몰락한 탄광 마을을 다시 살려낸 것은, 탄광에 기어드는 쥐를 잡기 위해 들여온 고양이들이었다.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하는 고양이들은 점차 그 수를 불려 마을 구석구석에서 살아가기 시작했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마을 주민들의 노력으로 인해 '고양이 마을'로 마을의 기반을 바꾸어 내는 데 성공했다. 과연 역에서 내리자마자, 온 사방 천지가 고양이였다.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눈의 나라였다'고 썼지만, 이 경우에는 '시경市境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고양이의 나라였다'고 해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허우퉁을 나타내는 3요소. 고양이, 광부, 원숭이.
플랫폼에서 연결통로로 나오는 계단 입구부터 맞아 주는 고양이 선반.
고양이 장식품으로 가득한 역 구내.
허우퉁역 역사에서 키우는지, 지가 알아서 드나드는지 알 수 없는 삼색이.
기차라도 들어오지 않는 한 늘 조용한 허우퉁역.
뭐냐 닝겐
고양이가 거리를 지배한다. 조심하라!
EBS <고양이를 부탁해>에서도 나왔던 그 카페거리.
한국과 대만은 친구입니다냥
닝겐이 많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누워서 졸겠다
날아다니는 고양이 벽화. 점과 꼬리가 느낌표 같아서 귀엽다.
브러시와 고양이와 팬텀이라는 기묘한 조화
살짝 허기가 져서 뭔가 먹으려고 카페에 들어왔다. 여기도 고양님이 계신다. 정말 어디에나 계신다.
나는 우롱차를, 아내는 바나나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시켰다.
와플을 시켰는데 고양이가 따라왔는데요... 귀엽다...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겠으나, 정말 어디로 발을 뻗든 고양이가 가득하다. 누워서 사람의 손길을 받는 고양이, 어딘가 바쁘게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고양이, 느긋하게 담벼락에서 낮잠을 자는 고양이, 사람만 보면 야옹거리고 다가오는 고양이 등등, 그리고 사람들도 딱히 고양이를 귀찮게 하지 않고, 고양이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 관광객들도 최대한 고양이를 건드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고양이를 보면서 즐거워하기에, 고양이들도 사람이 있는 것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10월의 뜨거운 낮을 즐기고 있었다. 사람이 고양이를 데려와 만든 반쯤은 인위적인 고양이 마을이지만, 고양이와 인간들이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그럭저럭 찾아낸 듯한 느낌이었다. 실제로도 느긋하게 늘어져 있는 고양이들을 보고 있자니, 우리조차 마음이 어쩐지 노곤노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양이들은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을 뿐이지만, 사람은 거기에서도 위안을 얻는 법이구나.

 

아뵤뵤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