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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요세寄席의 추억: 일본 대중문화의 오래된 미래

by 집너구리 2021. 2. 15.

도쿄에 갈 때마다 어떻게든 짬을 내어 들르는 곳이 있다. 정확히는 '곳들'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키하바라秋葉原를 오고가는 길에 들르는 적도 있고, 출장 기간에 여유 시간이 나면 찾기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부득불 캐리어를 끌고 찾아가는 일도 있다. 요즈음은 세월이 좋아져서 한국에서도 오타쿠 굿즈를 사 모으기 어렵지 않고, 도쿄를 자주 드나들다 보니 웬만한 동네는 얼추 다 다녀 보았기에 때로는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에는 신주쿠新宿에서 주오 본선中央本線을 탄다. 아마도 일본이 아니면 지금껏 그랬고 앞으로도 경험하기 어려울, 어떤 경험을 하러 가는 것이다.

2016년경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애니메이션 하나가 있었다. <쇼와 겐로쿠 라쿠고 심중昭和元禄落語心中>이라는 작품이다. 쿠모타 하루코雲田はるこ 작가의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삼는다. 제목을 풀이해 보자면 '쇼와昭和'는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치세(1926-1989)를 가리키는 연호, '겐로쿠元禄'는 에도 시대 중기를 가리키는 연호이다. 합쳐서 '쇼와 겐로쿠'라고 하면 태평양 전쟁 이후의 고도 성장기를 겐로쿠 시대의 전성기에 빗대어 부르는 표현이다. '심중'이란 일본식 한자어로 '동반자살'을 뜻한다. 여기까지 풀이하면 남는 단어는 단 하나, '라쿠고落語'이다. 거칠게 풀이하면 '떨어지는 말'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대체 무엇을 가리킨단 말인가? 하필이면 '동반자살'이라는 무시무시한 표현과 함께 등장하는 이 단어는 쇼와 겐로쿠의 고도성장기와는 또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오늘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라쿠고가들. 왼쪽부터 타테카와 시노스케立川志の輔, 슌푸테이 이치노스케春風亭一之助, 야나기야 쿄타로柳谷喬太郎.

'라쿠고'는 말하자면 예능인이 무대에 앉아 관객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종의 스탠드업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서서 하는' 것이 아니기에 '스탠드업'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순전히 예능인의 입담과 몸짓만으로 관객의 웃음을 유발한다는 점에서는 스탠드업 코미디와 비슷하다. 에도 시대에 시장경제의 발전과 함께 등장한 라쿠고는 조선 말기에 등장한 한국의 '재담'과 상당히 유사한 형성 과정과 구성을 보이는데, 소도구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연자의 입담과 몸짓으로 다양한 인물의 캐릭터를 관객에게 전달하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 구성을 취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특히 라쿠고는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을 적에 관객의 허를 찌르는 허무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반전으로 이야기의 재미를 극대화한다는 독특한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마무리를 이른바 '오치落ち'나 '사게下げ'라고 부르는데, '라쿠고'라는 장르 이름의 유래가 되었을 만큼 라쿠고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장르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국어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재담'이라는 장르를 한 번쯤은 들어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막상 재담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나도 보러 간 적이 없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사이 재담은 어찌어찌 극장 예능의 한 형태로 올라섰을 뿐 아니라 방송으로도 구연되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통적 의미로서의 '재담'은 다른 많은 전통예능들과 마찬가지로 일부 애호가들이나 이른바 '아는 사람들'만이 즐기는 예능으로 판이 쪼그라들고 말았고, 재담을 보러 가려면 열심히 네이버 검색을 해서 그나마 얼마 열려 있지도 않은 공연 표를 구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라쿠고의 입지는 사뭇 다르다. 도쿄에만 대형 전용 공연장이 네 군데 있고, 매일 낮부와 밤부 공연이 쉼없이 이어지며, 만원사례도 쉬이 나오곤 한다. 라쿠고만을 다루는 방송 프로그램도 여럿 방영되며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라쿠고가들도 수두룩한 상황이니, 그야말로 현대까지 꾸준히 살아남은 전통 대중예능의 성공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라쿠고 애호가들의 성지인 우에노上野 다와라마치田原町의 혼포지本法寺. 태평양 전쟁 시절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라쿠고가 금지되었을 당시, 이를 기리는 '이야기의 무덤'을 여기에 모셨다. 지금도 이름 짜한 라쿠고가의 명적名跡과 이미 사라진 많은 요세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요세寄席라 함은 라쿠고를 전문적으로 공연하는 전통적 형태의 공연장을 뜻한다.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도쿄 내에만 수십 곳이 있었다고 하나, 전부 사라지고 지금은 4대 요세만이 남아 있다. 신주쿠新宿의 스에히로테이末廣亭, 아사쿠사浅草의 아사쿠사 연예홀浅草演芸ホール, 이케부쿠로池袋의 이케부쿠로 연예장池袋演芸場, 우에노의 스즈모토 연예장鈴本演芸場이 그들이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읽히는 그 날에도 이 4대 요세는 낮과 밤으로 나누어 매일같이 공연을 벌인다. 각 요세마다 홈페이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 누가 공연하러 나오는지를 알기란 어렵지 않다. 나 또한 도쿄에 갈 적에는 요세의 공연 스케줄(방구미효番組表. 일본어로 '방송 프로그램'을 가리키는 단어 '방구미番組'가 여기서 유래했다)을 보면서 내 일정에 맞는 곳들 중 어느 곳이 더 재미있는 라쿠고가들이 많이 나오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요세 공연장의 생김새는 여타 연극 공연장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공연장에 들어가면 무대가 있고, 예인들이 무대에 나와 자기 재주를 선보이고, 관객은 삐걱대는 공연장 의자에 앉아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면 된다. 재미있게도 에도 시대부터 내려오는 특유의 공연장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어, 공연 도중 언제든 표를 사서 들어갈 수 있고, 또 공연 도중 쉬는 시간이면 언제든 나와 화장실을 가거나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다. 바삭바삭한 간장 전병이나 페트병 녹차, 말린 오징어와 사탕 같은 것을 잔뜩 사 들고 들어와 일 없이 까먹으면서 예인의 재주를 보고 깔깔 웃어대는 것이다. 틈틈이 예인들이 관객들에게 말을 걸거나, 관객과 나름대로의 소통을 하는 경우도 있어, 그야말로 전통 시대 저잣거리에서 보던 연희 바로 그 모습 그대로 활기가 가득 찬 공간이 바로 요세인 것이다(물론 낮이건 밤이건 젊은이들은 보통 일하기 때문에, 주 관객층은 은퇴한 노인들인 경우가 많다).

 

개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들 수밖에 없는 요세가 하나 있다. 위에서 예를 든 소위 4대 요세에는 들어가지 않는, 소규모의 요세이다. 칸다역에서 칸다 강을 건너 아키하바라로 들어가기 전, 맛있는 소바집들과 <러브라이브!>의 리더 호노카의 집 모델이 되었던 유명한 화과자집 '타케무라竹むら'가 위치한 칸다 렌자쿠초神田連雀町의 어느 건물 2층에 위치한 손바닥만한 요세 '칸다 렌자쿠테이神田連雀亭'가 그곳이다. 정오 즈음의 낮 시간에 볼 수 있는 이야기꾼 3명의 공연은 단돈 500엔 동전 한 닢으로, 여느 요세나 다 하는 정기 낮부/밤부 공연은 그보다 조금 비싼 천 엔대. 보통 아무리 싸도 2,500엔은 하는 요세 키도센木戸銭(요금)의 물가치고는 퍽 싸다. 이렇게 싼 이유가 있다. 렌자쿠테이에 공연을 하러 나오는 이야기꾼들은 모두 최종 승급을 앞두고 있는 젊은 라쿠고가들이다. 라쿠고가로서 하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받으며 주위로부터 '선생님師匠'이라고 존대받는 최종 등급인 이른바 '신우치真打'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수련하는 후타츠메二つ目 등급의 젊은이들은 그러나 상대적으로 4대 요세에 나가 공연할 기회가 적다. 이러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선배 라쿠고가들이 지금의 석정席亭(요세의 사장)과 의기투합하여 만든 곳이 바로 이곳 렌자쿠테이이다.

렌자쿠테이의 공연장에는 아무리 해 봐야 서른 명이나 겨우 앉을 수 있을 것 같다(중간). 건물 입구에는 오늘의 공연자 목록이(좌), 공연장 내부 벽에는 요즈음 출연 중인 후타츠메 라쿠고가들의 이름이 걸려 있다.

이른바 '3밀'을 피해야 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는 영업이 어렵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절로 들 만큼, 렌자쿠테이의 공연장은 손바닥만하다. 무대의 고좌高座에서 손을 뻗으면 바로 관객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감이다. 찾아갈 때마다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노인들뿐, 내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처음 보는 젊은이가 멀거니 들어와서 전단지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노인들의 눈에 이채가 도는 것은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좁은 공연장이 가지고 있는 무엇보다도 큰 장점은 바로 '친밀감'이다. 이야기꾼이 관객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할 수 있고, 단골 관객이라면 젊은 이야기꾼이 점점 실력을 쌓아 가는 모습을 함께 한다는 느낌이 무척 강렬할 것이다. 공연이 끝나면 그 날 공연한 이야기꾼들이 계단 앞에 모두 나와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야기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그들의 눈빛을 보며, 항상 급하게 떠나는 외국인의 몸이기는 하나 늘 최대한의 인사를 돌려주고 싶게 된다. 비록 날고 기는 신우치들에 비해 실력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라쿠고'라는 예술을 가장 밀도 있게 체험할 수 있는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이 아닐까 한다.

2019년에 찾았던 렌자쿠테이에서 받은 전단지. "지금부터는 우리의 시대"라고 적힌 붉은 글자에서 느껴지는 에너지!

코로나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 속에서도 4대 요세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 모양이다. 나도 렌자쿠테이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카츠라 미야지桂宮治가 신우치 승진 인사 공연을 진행하고 있는 요즈음, 신주쿠 스에히로테이의 트위터는 매일같이 '만원사례'를 알리는 글을 올리고 있다. 전염병 가운데에서도 이야기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 예능인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관객들의 호응은 멋진 일이기는 하나, 부디 이로 인해 질병이 더욱 확산되는 일이 없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듣자하니 렌자쿠테이에서는 결국 객석과 무대 사이에 아크릴 판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이야기와 웃음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이 시대에 훌쩍 비행기를 타고 500엔 동전을 짤그랑거리며 젊은 라쿠고가들을 만나러 가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 그저 답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