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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기획서 쓰기의 중요성: 앱 개발을 시작도 전에 단념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by 집너구리 2021. 2. 15.

돌이켜보면 나는 희한하게도 '처음', '시작'이라는 개념에 늘 가까워 있었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갈 적에도 생긴 지 2년밖에 안 된 학과에 들어갔고, 취업할 때에는 사내 최초의 프로토타입 제작자로 들어갔고, 지금은 우리 회사에서 처음으로 '각 잡고' 틀을 잡으려는 UX 리서처라는 직무를 맡아 일하고 있다. 디자인 전공을 한 적도 없는데 어쩌다 보니 디자인실에 들어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처음 해 보는' 일들을 맡아서 진행해 왔지만, 이제야 와서 생각해 보니 막상 '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획서 작성은 해 본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직무 특성상 프로젝트 런칭 초반부터 참여하는 기회가 거의 없다 보니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기획서 작성의 경험이 얕다는 사실을 눈앞에 두고 문득 예전에 겪었던 웃지 못할 실패 이야기가 생각나서 몇 줄 적어 보기로 한다.

 

천주교 신자는 꼭 지켜야 할 의무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매주 주일 미사에 참례할 것'이다. 이걸 지키려면 내가 어디 있든 간에 주변에 있는 성당의 위치 정도는 파악해 두고 있어야 한다. 천주교는 세계 어딜 가든 똑같은 미사 경본에 따라서 미사를 드리기 때문에, 일단 성당의 위치만 파악해 두면 그 다음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란 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주말을 낀 출장으로 도쿄에 드나들 일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쿄 숙소 근처의 성당에 갈 일 또한 많아지게 되었다. 그런데 인구의 약 10% 가량이 천주교 신자인 한국과, 인구의 0.5%만이 신자인 일본의 현실은 엄청나게 달랐다. 전례서나 성가책을 비치해 놓은 성당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고, 한국이라면 성당마다 있는 성물방은 언감생심이요, 기도서도 큰 교구의 주교좌 성당에나 가야 대규모로 비치해 놓고 판다.또, 한국에서는 서울대교구 주관으로 신앙생활을 보조하는 많은 앱을 직접 제작하여 배포하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굿뉴스> 앱이랑 <매일미사> 앱만 스마트폰에 깔려 있으면 성경책도 살 필요가 없다고들 할 만큼(물론 권장되지는 않는다!) 이 앱들의 완성도는 높다. 그러나 일본에 이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이 동네는 교구 홈페이지도 세기말에 볼 법한 괴이쩍은 구성의 HTML 코드로 짜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뭘 기대하겠는가.

 

교토 교구 홈페이지(좌), 오사카 대교구 홈페이지(우). 누가 좀 살려 주세요.

그래서 성경 앱은 고사하고 하다못해 기도서 앱이라도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에 Xcode에서 프로젝트를 하나 파 두고 이것저것 찾아보는데, 한국의 <가톨릭 기도서>에 해당하는 책인 <매일의 기도> 등 전례서들은 일본천주교중앙협의회에 저작권사용신청을 해야 한단다. 그래서 문의를 넣었다.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기도서는 협의회 출판부에 문의하시고, 성경은 일반사단법인 일본성서협회에 문의하세요"라길래, 일단 협의회 출판부에 기도서 사용 관련해서 문의를 넣었다. 답변이 돌아오기까지는 한 사흘 걸렸는데,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메일에 담겨 있었다.

 

"저희 측에서도 여러 가지로 확인해 봐야 할 일이 있사오니, 추후에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이 때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다음 답이 돌아온 것은 1주일 후였다. 무려 편집국장 명의로 날아온 메일을 보고 식겁했던 기억이 난다.

 

"말씀은 감사하오나, 그러한 애플리케이션 형태의 물건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해당 교구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저희 주교회의에서는 아직 그런 앱을 제작하고자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안건은 대단히 감사하지만 거절하고자 합니다."

 

아니 그럼 교구 승인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라도 홈페이지에 미리 적어 놓든가...!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일단 당황스러움을 가라앉히고 나니 올라오는 것은 의문이었다. 어차피 무료로 배포할 앱이고, 개인이 제작해서 기증하겠다는데, 주교회의에서 이걸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완전 개이득 아닌가?

 

주위의 천주교 신자 친구들과 얘기한 끝에 나온 몇몇 결론들로는,

  1. 주교님들이 "에에잇 모름지기,,,,책을 가지고 댕겨야 진짜지,,, 어디서 핸드폰을 가지구 미사를 본다구,,,,으이!" 라고 반대하심

  2. 아날로그의 천국이 이걸 또...

등등이 있었지만, 그런 안이한 결론에 침잠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 예의를 차려 정중히 문의를 보냈다.

 

"개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료로 작성해서 기증할 거고, 또 배포도 무료로 진행되도록 조치할 것인데 거절하시는 이유를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례가 아니라면 주교님들이 거절하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그 다음 날 도착했다.

 

"저희가 감히 개인에게 어떻게 그 무거운 짐을 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 설령 기증해 주신다고 하더라도 저희는 이것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시간과 돈과 인력이 없는 상황입니다."

 

앗...아아...

아마 이 메일을 보내는 편집국장님도 우셨고 나도 울었고 주교님들도 울었을 것이며 하느님도 울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이렇게 내 계획은 일단은 물거품이 되었다. '일단은'. 

급하게 부족한 말들로 문의하다 보니 나도 저쪽도 서로 뭘 하고 싶어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해 소통 실패가 온 게 아닐까. 다음에는 좀더 체계적인 기획서를 작성해서 서면으로 들이밀어 보는 게 낫겠다는 것이 복기의 결론이었다. 여러분 제대로 된 기획서가 이렇게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