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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본여행|출장

내가 나라奈良를 사랑하게 된 까닭

by 집너구리 2021. 3. 21.

* 이 글은 2017년 어느 날 다른 플랫폼에 적어 올렸던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나라는 생각보다 퍽 작은 동네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오사카 내지는 교토 여행을 오면서, 중간에 사슴에게 삥을 뜯기러(?) 혹은 유명하다는 도다이지 대불전을 보러 잠깐 들렀다 가는 동네다. 간무 천황의 헤이안 천도 전까지 꽤 오랫동안 일본의 수도로 화려한 모습을 자랑했을 도시는, 지금은 현청부터 주요 관광지까지 모두 그리 길지 않은 중심가에 몰려 있는 지방 중소도시로 명맥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

 

같은 축척으로 비슷한 넓이의 두 장소를 찍어 비교해 보았다. 왼쪽은 나라 시, 오른쪽은 도쿄 하네다 공항이다. 공항보다도 좁은 면적에 웬만한 시가지와 관광지가 전부 들어온다.

 

정규직 전환이 결정되고, 정식 입사일까지 시간이 남아 간사이권으로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한창 벚꽃 필 시즌이었던지라, 교토에서는 도저히 숙소를 잡을 수가 없었다(사실 교토는 언제든지 숙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동네다). 마침 나라에는 자리가 제법 있었던 덕분에, 나라 중심가에 있는 비즈니스 호텔에서 2박을 하게 되었다. 나라 공원과 도다이지, 카스가타이샤를 모두 둘러보고 호텔에 잠시 들어와서 쉬면서, 오늘의 저녁을 어디서 먹을지를 고민해 보기로 했다. 여행책자에 실려 있는 몇 되지 않는 식당 목록 가운데, '하루'라는 이름의 가정식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도 나름대로 넉넉하게 남았고, 동네 구경도 할 겸, 나라 시내에서도 제법 구석에 있는 '하루'에 가기로 마음먹고 호텔을 나왔는데, 이게 짐작했던 것보다도 솔찮이 구석에 있는 가게인 것이다. 구름이 잔뜩 껴 별빛도 달빛도 없는 밤, 가로등조차도 드문드문 켜져 있는 나라 시의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아들어가자니, 혼자 오기 망정이었지 다른 사람이라도 데리고 왔으면 경을 쳤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기마저 했다.

 

대충 이렇게 찾아가는 곳이다. 녹색 버블에 네모가 그려져 있는 표지.

 

길을 잘 찾는다고 자신하는 나답지 않게, 하루에는 생각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다. 낮은 지붕의 가정집들 사이에 암시렇지도 않게 들어앉아 있는 작은 가게에는 따뜻한 느낌을 주는 불빛이 환히 켜져 있었다. 신발을 벗고 가게에 들어가 앉았더니, 머리를 한 갈래로 낮게 묶은 종업원이 와서, 오늘 저희 메뉴는 함박스테이크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럼 그걸로 하나 주세요, 하고 앉아서 찍은 사진을 잠깐 돌려보고 있자니, 자글자글 달궈진 철판 위에 올라앉은 함박스테이크와 츠케모노, 그리고 한국 식당에서도 보기 힘든 고봉밥이 담긴 쟁반이 날라져 왔다.

 

 

나는 굳이 말하자면 바삭바삭한 돈까스를 어딘지 모르게 포스라지는 느낌의 함박스테이크보다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함박스테이크는 뭐랄까, 이틀 동안 죽도록 걸어서 퉁퉁 부은 발의 피로를 싹 잊을 수 있게 해 주는 맛인 것이다. 보드랍고 탱글한 육질에 풍부한 육즙, 딱 입맛에 맞는 데미그라스 소스,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듯한 부드러운 식감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것이다. 여기에 입에 넣고 씹으면 감칠맛이 팍 하고 터지는 야채들, 깔끔한 츠케모노, 그리고 고슬고슬하면서도 따로 놀지 않고 조금만 씹어도 단맛이 도는 흰쌀밥까지. 한국에서도 맛있다는 함박스테이크를 여기저기서 먹어 봤고, 실제로 맛있었지만, 이건 함박스테이크의 어떠한 차원을 돌파한 듯한 함박스테이크였던 것이다. 보통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나면 오랫동안 맛을 음미하면서 먹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건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허겁지겁 먹느라 어느 새 접시가 텅텅 비어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또한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토록 훌륭한 함박스테이크를 맛보았음에도 만든 이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드결제기가 없는 통에 - 당시 일본은 웬만한 소규모 영업장에는 카드결제기가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 현금을 꺼내 계산하면서 종업원에게, 여기서 방금 먹은 함박스테이크가 제가 이제까지 먹어 본 것 중 가장 맛있는 함박이었습니다, 라고 말했더니, 점원은 감사하다고 하고는 부엌에 가서 주인을 불러왔다. 양쪽 팔이 없어 의수를 끼고 고기를 굽던 젊은 주인은, 그 얘기를 듣더니 파안대소하며 심한 나라 사투리로, 맞제? 우리 가게 함박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제? 억시로 고맙데이, 라고 말했다. 가게를 나서며, 꼭 다시 오겠다고 했더니, 주인은 그래, 꼭 다시 오이소, 기다리꾸마, 하고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밖에 나와 보니 비가 후두둑후두둑 쏟아지고 있었는데, 우산을 가게에 두고 온 것 같아 다시 들어가서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가게에 우산은 없었다. 낙담하고 나오려는데, 주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손님 우째 다시 왔는교? 하고 묻는다. 우산을 혹시 두고 왔나 해서요. 아 맞나? 그라모 내가 우산 주께 쓰고 가이소, 주인은 기분 좋아지는 웃음을 씩 웃었다. 그가 선뜻 건네 준 비닐우산은, 내가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을 나와 함께 하다가, 어느 날 잘못되어 바람에 찢겨 버린 뒤로 결국 내 손을 떠났다.

 

나라에 다시 가게 된다면, 일정을 조정해서라도 꼭 '하루'에 가서, 그 함박스테이크를 다시 먹고 싶다. 함박스테이크가 아니더라도, 그 가게에 들어가서, 따뜻한 조명을 받으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주인이 요리하는 가정식 정식을 먹고 싶다. 그 가게와 그 주인의 존재 덕분에, 나는 어쩌면 그 별것 없어 보이는 도시를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