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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191005 Taiwan

대만유람기 2019 (11) : [4일차]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단수이

by 집너구리 2021. 3. 28.

게스트하우스에서 먹은 마지막 조식. 머시룸 오믈렛과 베지버거였다. 전날 먹은 베지버거가 너무 맛있어 한 번 더 시켰다.

벌써 넷째 날이라니 믿겨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는 거짓말처럼 맑았고, 아니나 다를까 더웠다. 그러나 이렇게 더울 때일수록 즐기는 온천이 그야말로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오늘은 온천에 가기로 한 날이다.

 

타이베이 수도권에서 오롯이 보낼 수 있는 마지막 하루의 시작은 단수이신이선 지하철을 타고 종점까지 가야 만날 수 있는 이국적이면서도 고즈넉한 동네 단수이淡水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주걸륜의 피아노 실력과 계륜미의 청순미가 폭발했던 대만의 유명한 청춘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不能説的秘密>의 촬영지로 익히 알려져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스페인과 네덜란드, 영국과 정씨 왕국 등 다양한 세력들이 저마다 개척항구로 활용했던 파란만장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에 걸맞게 이 지역에는 지금도 서양식 건물과 중화식 건물, 그리고 일본식 건물이 골목 이곳저곳에 혼재해 있다.

 

물이 맑고 경치가 아름다운 단수이

본래 단수이는 저녁놀이 무척 아름다운 동네라고 하지만, 우리는 밝은 낮의 단수이가 보고 싶었다. 단수이라는 동네 자체가 <말할 수 없는 비밀> 속에서 항상 아름답게 그려진 것도 있거니와, 이따가 온천에서 피로를 완벽히 풀기 위해서는 먼저 잔뜩 걸어다니며 다리를 지치게 만드는 게 순서일 것 같다는 생각도 한몫 했다. 타이베이 중심가에서 전철을 타고 적지 않은 30여 분이라는 시간을 가다 보면 종점인 단수이에 도착한다. 열차가 단수이 역에 접근할수록 마치 창 밖의 풍경을 느긋하게 즐기라는 듯이 속도를 상당히 늦추는데, 이때 창밖으로 보이는 단수이 강 건너 경한령硬漢嶺의 모습이 정말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차창 너머로 찍었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맑고 푸르른 경치!

 

날씨가 슬슬 전날마냥 찜통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우리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버스를 타자. 제일 먼저 위쪽에 있는 홍모성紅毛城까지 올라간 뒤, 거기서부터 걸어내려오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단수이 역으로 내려오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역 바로 앞에서 잡아탄 시내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홍모성 앞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여기에서 80NTD를 내면 근처의 소백궁小白宮과 또 다른 유적지 한 곳을 관광할 수 있는 통합 티켓을 살 수 있다. 이 때 팔뚝에 도장도 찍어 주는데, 티켓 대신 이 도장을 내밀어도 통과시켜 주니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하자!

 

티켓을 사면 도장을 찍어 준다. 판매원이 "도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하고 신신당부를 한다.

 

홍모성 요새와 그 옆의 부속 저택.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앞에 이 지역을 점유했던 세력의 깃발이 줄줄이 걸려 있다.

 

'홍모성'이라는 이름이 이채로운데, 처음 이 지역을 점유했던 서양 세력들을 보고 '붉은 털을 가진 놈들이 세운 성'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삼국지>에서 동오 지방에 살던 오랑캐들더러 '눈이 푸르고 털이 붉으며 얼굴이 누렇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볼 때 '털이 붉다'는 말은 비단 실제 터럭이 붉은 서양인뿐만 아니라 자기네(여기서는 한족)들이 보기에 오랑캐처럼 생긴 이들을 싸잡아 묘사할 때 쓰던 일종의 관용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찌 되었든 실제로 스페인이 이 곳을 처음 점유한 뒤 네덜란드와 영국 등 서양 세력들이 때로는 식민지배 시설로, 때로는 영사관으로 쓰곤 하였으니 서양 사람들의 성채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해는 간다. 더욱이 온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는 탓에 '붉은색'의 이미지는 더더욱 강조되기만 할 뿐이다.

 

홍모성은 크게 성채와 주거동의 두 건물로 구성되는데, 주거동의 경우 청나라 말엽에 주청 영국 영사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주거동의 내부 모습은 19세기 당시 이 곳에 거주했을 영국 영사 가족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해 두고 있었다. <킹스 스피치>에서라도 튀어나온 듯한 가구와 식기류, 영사 가족의 시중을 들며 생활했을 대만인 하인의 좁디좁은 방, 왕실의 문장을 정교하게 새긴 장식품 등을 보고 있노라니 묘하게도 그 시절 이곳에서의 생활상이 희미하게나마 그려지는 것이었다.

왕실 문장을 등지고 집무하였을 영사의 책상.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했을 저택 식당.
어린아이들을 위한 방도 있다.
햇볕이 눈부시게 비치는 회랑. 나는 이런 풍경이 좋더라.

홍모성을 나와 소백궁으로 가는 길에는 진리대학真理大学을 지났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촬영지 중 하나이기도 한데, 확실히 캠퍼스 자체는 아름다웠다. 대학 시절의 난개발로 가득했던 캠퍼스에 비하면 천지차이다. 대만 최초의 서양식 대학이라는 의의가 있다고 하는데, 깊이 들여다볼 만한 것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아 한 바퀴 둘러보는 것으로 갈음하기로 했다.

 

녹음이 우거진 캠퍼스와 고풍스러운 건물이 두드러지는 곳.

주걸륜이 다녔다는 담강중학교 앞을 지나, 이파리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골목길을 걸어나오니 소백궁小白宮에 도착했다. 원래 청나라 말엽에 타이완 관세청장의 관사로 지어진 이 건물은 온 벽이 새하얗게 회칠이 되어 있어 햇볕을 받으면 그야말로 눈부시게 빛난다. '작은 백악관'이라는 뜻의 '소백궁'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모습에서 유래된 별칭이다. 소백궁의 내부에는 19세기 청나라와 구미 열강의 무역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바깥으로 나오면 아름다운 아치웨이 너머로 잘 정비된 정원과 강 너머 우뚝 서 있는 경한령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관저를 이 정도로 지어 놨다면 망국의 관세청장 자리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 아니련가. 회랑에는 드레스와 턱시도를 차려 입은 선남선녀가 웨딩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듣자하니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라 웨딩 촬영을 오는 예비 부부가 많다고 한다. 소백궁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내리쬐는 햇볕으로 인해 점점 더위가 강렬하게 느껴져,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로 했다. 대만 특산이라는 석가로 만든 아이스 바를 사 먹었는데, 은은한 배 비슷한 향이 나면서도 크리미하게 부서지는 맛이 정말 훌륭했다. 씨앗이 너무 많다는 점을 제외하면. 왜 아이스바에 굳이 진짜 씨앗을 넣는 것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새하얀 회벽 위로 황토색 기와가 올라가 있어 타이완이라기보다는 지중해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웨딩 촬영하기에는 제격이다.
내부에는 소백궁의 구조를 재현한 모형이나, 건립 당시 청나라와 열강의 무역 관계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본건물 뒤쪽으로 나와도 파릇파릇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 먹는 아이스크림은 씨앗을 빼면 꿀맛이다.

소백궁에서 나와 조금 더 남서쪽으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이번에는 전형적인 일본식 목조 가옥이 눈에 들어온다. 일제강점기에 단수이 지역의 읍장을 지낸 일본인 타다 에이키치多田栄吉의 고택이다. 타다는 본래 고베에서 대대로 살아 온 지주 가문의 후손이었으나, 일제가 타이완을 점령하면서 단수이로 건너와 상회를 차리고 살면서 이 지역의 행정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식민지배 세력으로서 지역 유지였던 사람의 저택이라고 하기에는 건물의 크기는 비교적 아담한 편이나, 엔가와縁側(툇마루)에 앉으면 단수이 강의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훌륭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며, 실제로 타이베이 근교에서 가장 먼저 수도를 끌어다 쓴 집 중 하나라고 하니 나름대로는 위세를 자랑하는 이의 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교적 아담한 규모의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이지만, 마루에서 바라본 경치는 훌륭하다. 일본인 관광객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타다 에이키치 고택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은 단수이 옛 거리이다. '옛 거리老街'라는 이름이 나타내듯, 낮고 오래 된 건물들이 늘어선 대로변에는 퍽 오래 전부터 영업했던 것 같은 가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작은 골목길을 통해 해변 공원으로 빠져나온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러 가기로 했다. 해변공원변에 있는 '사가공작합대왕佘家孔雀蛤大王'이라는 가게인데, 2021년 기준으로는 폐업하고 강 건너 파리 지역으로 이사간 것 같으니 참조하시길(따로 지도는 달아 두지 않겠다). '공작합'이라는 건 중국말로 '홍합'을 가리키는데, 녹색으로 빛나는 껍데기가 마치 공작의 꼬리깃 같아서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2019년 10월 당시에 찍은 가게의 모습. 없어졌다는 게 아쉽다...
공심채볶음과 대만식 홍합찜, 바삭바삭한 새우 요리와 천상의 볶음밥.

가게 안은 무척 수수하고 테이블이나 그릇 또한 수수하지만, 음식만큼은 수수하지 않다. 아삭아삭 씹히는 공심채볶음과 생강 향이 싱그러운 대만식 홍합찜, 파삭파삭하게 잘 튀겨진 새우 모두 훌륭했고 가격도 나쁘지 않았다. 약간 양이 부족한 것 같아 볶음밥을 추가로 시켰는데, 이 볶음밥을 한 입 먹자마자 마치 <요리왕 비룡>의 요리비평가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에서 '삐로로롱~' 하는 소리와 함께 주위에 '美味'라는 글자가 떠오르는 것 같은 끝내주는 맛! 어딜 가든 볶음밥을 한 끼씩은 먹어 봤지만, 아무래도 볶음밥은 중화권에서 먹는 게 가장 맛있다는 깨달음을 새삼스레 받았다. 다만 홍합을 열심히 먹던 아내가 돌조각을 잘못 씹어 앞니가 살짝 깨지는 불상사가 있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기분 좋게 해안공원으로 나와 다시 찬찬히 단수이 역으로 향했다. 이제 뜨끈뜨끈한 온천을 조지러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