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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190526 Fiji | Sydney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7. 휴양 끝 관광 시작! 시드니에서의 첫 끼니와 시드니의 첫인상, 낮부터 밤까지

by 집너구리 2022. 2. 27.

* 이 여행기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9년에 있었던 일을 다룹니다.

 

(앞 에피소드는 여기)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6. 피지를 떠나 시드니로, 처음 해 보는 외국에서 외국으로의 비행

* 이 여행기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9년에 있었던 일을 다룹니다. (앞 에피소드는 여기)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5. 리조트를 떠나 피지 본섬의 힐튼 호텔로, 호텔에서의 느긋한 하 *

sankanisuiso.tistory.com

 

짐을 숙소에 풀어 놓고 바깥으로 나서 보기로 했다. 오늘 새벽까지(?) 휴양을 즐길 만큼 즐겼으니, 이제 남은 기간은 관광을 즐기면 된다.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의 2막이 열린 셈이다.

 

숙소 자체는 정말 별것 없는 비즈니스 호텔이지만, 우리 숙소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시드니, 그것도 그 중 가장 중심부인 시티 오브 시드니(City of Sydney) 구역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숙소 문을 나와 동쪽으로 3분 걸으면 호주에서 가장 오래 된 공원인 하이드 파크(Hyde Park)가 나오고, 서쪽으로 3분 걸으면 시티의 중심부인 시드니 타운 홀(Sydney Town Hall)이 나온다. 기껏해야 반경이 4킬로 남짓인 시티 구역 내에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가 몰려 있는 만큼, 우리 숙소에서 웬만한 관광지는 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최적의 요건을 갖췄다. 시설이 좀 열악하더라도 그걸 생각하면 다소 화가 가라앉는다.

 

시드니 타운 홀. 가 본 적 없는 영국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타운 홀 길 건너에 있는 종합쇼핑센터인 '퀸 빅토리아 빌딩(QVB)'. 앞에 위엄 있게 앉아 있는 빅토리아 여왕이 볼거리다.

타운 홀을 마주보고 바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역시나 고풍스러운 건물 하나가 웅장하게 서 있다. 종합쇼핑센터인 '퀸 빅토리아 빌딩(Queen Victoria Building)'이다. 이름값을 하려는 듯 건물 앞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까지 서 있다. 그가 남겼다던 명언 아닌 명언 '짐은 재미가 없느니라.'를 낄낄대며 되뇌어 본다.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우리가 이곳을 부랴부랴 찾은 이유는, 오후 2시에 이곳에 있는 티룸에 애프터눈 티를 예약해 뒀기 때문이다.

대대적인 개수가 있었다고 하지만, 건물 내부에는 여전히 고풍스러운 장식으로 가득하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엘리베이터가 인상적이다.

티룸의 이름은 '더 티 룸(The Tea Room)'. 본디 일반명사의 조합에 불과한 이름을 떡하니 가게 이름으로 쓰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다. 시드니에 오기 전날, 피지 힐튼에서 천문대 방문 예약을 한 뒤 이 티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더니 예약을 하고 오는 것을 추천한단다. 다행히도 평일 오후라 예약은 무리 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 다만 애프터눈 티의 이름을 '차와 곁들여 먹는 저녁식사'를 뜻하는 '하이 티(High Tea)'라고 적어 둔 것이 다소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호주 사람들은 애프터눈 티를 그렇게 (영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잘못') 부르는 습관이 있단다.

 

티룸 문 앞으로 다가가자 여성 직원이 친절하게 맞이해 준다. 이 때 처음으로 '호주 발음'이라는 것과 마주하게 되었다. 와,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죄송합니다, 뭐라고요?"를 영원히 반복하게 될 뻔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서쪽 창가에 있는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어차피 주위라고는 전부 빌딩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뷰 자체는 크게 상관이 없었으나, 기왕이면 하늘이 좀 내다보이는 곳에서 식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게의 실내 모습. 천고가 상당히 높은 공간에 고풍스러운 장식들이 눈에 들어온다.
샌드위치는 살짝 평범했지만, 전반적으로 훌륭한 티 세트였다.

장미 무늬가 예쁘게 들어간 도자기 그릇에 차와 음식이 서빙되고, 주전자와 차망, 우유 저그도 고풍스럽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어디 빈티지 가게 같은 데서 팔고 있다면 바로 하나쯤 사 오고 싶을 듯한 앙증맞음이다. 차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무엇을 골랐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대략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와 오렌지 페코를 시켰던 듯 하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직원이 차를 어떻게 우려서 마시는지, 우유는 어느 정도 넣어서 먹는지 친절하게 설명한 뒤 우아한 동작으로 사라진다. 이어서 스콘과 잼, 클로티드 크림, 그리고 식사 세트가 따라온다. 너무 달지 않으면서 적당히 촉촉한 스콘 위에 얹어 먹는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잼은 달콤한 행복의 맛이다. 과자류도 부담스럽지 않은 맛으로 티와 정말 잘 어울린다. 오이를 샌드위치에 굳이 넣어 먹는 영국식 입맛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다른 것들이 워낙 훌륭하니 넘어가기로 한다. 그렇다고 오이 샌드위치가 못 먹을 물건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쁘지는 않은데, 굳이 찾아 먹지는 않을 그런 맛이다. 오히려 페스토가 들어간 페이스트리가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랐다. 이렇게 먹는 것에 목숨을 거는 우리 부부의 시드니 첫 일정은 역시나 먹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유를 부리며 두어 시간 가량 느긋하게 티를 즐기다 보니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겠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찻값을 내고 밖으로 나온다. 이처럼 고풍스러운 유럽식 건물은 처음 경험하는 셈이라, QVB 안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구경해 보았다. 중간에 화장실도 다녀왔는데, 화장실마저 고풍스러워서 퍽 놀랐다. 소변기와 세면대가 한 수도관 주위로 빙글 돌면서 세워져 있는 모양은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정도에서나 봤던 풍경인데, 새삼 이 건물의 연식을 짐작케 하는 광경이었다.

 

장식벽과 그 구석에 나 있는 수수께끼의 문, 그리고 그리로 이어지는 수수께끼의 나선 계단.
천개와 현관에 모두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장식되어 있다. 이것이 제국주의 시절 대영제국의 부로군.
<반지의 제왕>을 모티프로 한 겁나게 비싼 체스 세트. 호주 출신으로 빅토리아 훈장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도 전시되어 있다.

낮에는 그렇게까지 잘 느껴지지 않았는데, 저녁 시간으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다소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역시 초겨울 날씨인 시드니, 긴팔 긴바지에 가벼운 재킷까지 걸쳤는데도 이대로 밤까지 돌아다니기에는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 옷을 한두 겹 더 걸치고 다시 나오기로 한다. 확실히 계절이 계절인 탓인지 해도 제법 빨리 지기 시작했다. QVB에서 나왔을 때가 다섯 시였는데 벌써 저녁놀이 지기 시작했고, 숙소를 들렀다가 다섯 시 오십 분쯤 다시 기어나왔을 때는 완전히 밤이 되어 있었다. 나름대로 방한 대책을 세워서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간간이 옷깃 새로 스며들어오는 찬 바람에는 여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따뜻한 피지에서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지냈는데, 하루 만에 이렇게 날씨가 추워지다니. 마치 내가 자진해서 겨울을 찾아오기라도 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녁놀 지는 타운홀. 이 건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수도 없이 사진을 찍었다.

여기서부터 다시 걸어서 이번에는 달링 하버(Darling Harbour)로 나간다. 어쩐지 연인들의 거리일 것만 같은 낭만적인 이름이지만, 그저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였던 랄프 달링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다소 깨는 명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화려한 조명으로 가득 찬, 다소 정신없는 장소다.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서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한데 모여 웅성거리며 기예사의 공연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고. 명성만큼은 못하지만 흥미로운 곳임은 분명하다. 장소가 흥미롭다기보단, 여기 모인 사람들이 흥미롭다는 느낌. 

 

달링 하버의 전경. 파노라마.
(좌) 소용돌이 형태의 수반 한가운데에서 느긋하게 핸드폰을 하고 있는 젊은이. 수둔술이라도 쓰는 걸까? (중) 횃불을 들고 현란하게 묘기를 선보이고 있는 기예사. 우리도 한참을 멈춰 서서 구경했다. (우) 의미를 알 수 없는, 마이크를 든 거대 로봇의 조형물.

달링 하버의 서안을 따라서 쭉 올라가다 보니 호주국립 해양박물관(Australian National Maritime Museum)이 나온다. 앞에는 호주 해군의 구축함 HMAS 뱀파이어와 잠수함 HMAS 온슬로가 정박되어 있고, 건물 자체도 퍽 멋지게 꾸며져 있었다. 다만 영업 시간이 고작 오후 4시까지라고 하여 아쉽게도 들어갈 시간을 얻지는 못했다.

 

대신 조금 더 걸어가면 나오는 '피어몬트 베이 유람선 정류장(Pyrmont Bay Pier)'에서 유람선을 타고 물길 구경을 좀 해 보기로 했다. 흥미롭게도 이 정류장 또한 시드니 대중교통 체계에 포함되어 있는 듯, 오팔 카드를 태그하고 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배는 30분에 한 번씩 온다는데, 정말 운이 좋게도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곧 배가 들어왔다. 정박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일단 한 번 타니 배는 금방 출발했다. 저녁 여섯 시를 훌쩍 넘긴 시각인데도 달링 하버 주위에 있는 고층 건물들은 휘황찬란하게 불이 켜져 있다.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는 늦게까지 일하는 노동자들로 인하여 이루어진다고 한다. 다들 고생이 많군 그래.

 

배는 여기에서 바로 건너편의 바랑가루(Barangaroo) 정류장에 한 번 들른 뒤, 시드니에서 가장 유명한 항구인 서큘러 키(Circular Quay)로 향한다. 도대체 원이랑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지형의 부두 이름이 '서큘러'인가 했더니, 원래 이름인 '세미서큘러 키Semi-Circular Quay'를 편의상 그렇게 줄여 부르던 것이 지금의 이름으로 정착했다는 다소 김 빠지는 이유였다. 하긴 부두라는 것의 생김새가 보통 반원 형태기는 하다. 서큘러 키로 가는 배는 정말 천천히 움직이는데, 바닷바람이 생각보다 무척 강해서 바깥에서 오랫동안 야경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깥 풍경을 찍다가 추워서 다시 선실로 돌아갔다를 몇 번 반복했을 때쯤, 드디어 눈앞에 웅장한 다리 하나가 나타났다. 저 유명한 시드니의 하버 브리지(Harbour Bridge)다. 시드니로 들어올 때 비행기 창을 통해서 이미 한 번 만나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 두고 보니 정말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철강시대의 영광을 자랑하는 듯한, 압도적인 위용이다. 다리의 아치 꼭대기에는 유니언 잭이 들어 있는 호주의 국기와, 검은색/붉은색/노란색의 강렬한 배색이 두드러지는 호주 원주민기가 같이 걸려 있다. 역시나 원주민을 탄압하며 세워진 역사가 있는 만큼, 오늘날 호주에서 국기를 게양할 때는 거의 모든 경우에서 원주민기를 같이 게양한다고 한다. 다리 밑으로는 어쩐지 모르게 보랏빛 조명을 켜 놓은, 저 유명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Sydney Opera House)가 수줍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호주에 체재하는 동안에 한 번쯤은 여기서 전통적인 오페라 공연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호주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오페라 공연 대신 현대예술 공연밖에 없다고 하여 포기했던 아쉬운 기억이 있다. 다음에 호주 여행을 올 때는 꼭 한 번 노려 봐야지. 배는 바닷바람을 가르며 하버 브리지의 바로 아래를 지나, 서큘러 키로 들어간다.

 

해양 쓰레기로 만든 상어 조형물을 배경으로 'MU/SEA/UM'이라고 의도적으로 개행한 표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바다 박물관'이라 이거지.
시드니 만의 유람선은 대중교통이기도 하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배를 타고 어디론가로 향한다.
무슨 전철 노선도마냥 유람선 노선도와 시간표가 잘 정리되어 걸려 있다. 배경 설명만 없으면 전철이라고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듯.
뱃전에서 뒤돌아 찍은 달링 하버의 전경. 고층 빌딩으로 가득한 번화한 도시의 풍경이 인상적이다.
하버 브리지의 밤의 위용. 그 바로 아래를 건너가는 것은 여간 강렬한 경험이 아니다. 한강 유람선을 여러 번 타 본 한국인이라도 그렇다.

유람선이 얼마나 느리게 움직이는지, 여섯 시 사십 분에 출발한 배는 삼십 분이 지난 일곱 시 십 분에야 우리를 비로소 부두에 내려 주었다. 웃기는 것은 여기에서 다시 식사를 하러 바랑가루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버 브리지 밑을 통과하면서 오페라 하우스를 구경했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었지만, 그래도 실없이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구 세관 건물을 활용한 도서관인 '커스텀스 하우스 라이브러리(Customs House Library)' 앞을 지나 서큘러 키 전철역으로 간다. 여기서 타운홀 쪽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한 정거장 가서 윈야드(Wynyard) 역에서 내린 뒤 조금 더 걸어가면, 스테이크하우스 '스티어슨(Steersons)'이 나온다.

커스텀스 하우스 라이브러리의 전경. 이날 따라 보라색 조명이 정말 많이 눈에 띄었다.

전에도 한 번 얘기했던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우리 부부가 여행할 때는 기본적으로 식사를 기준으로 동선을 짠다. 아내가 여행지 관련 리뷰를 쭉 읽으면서 흥미 있는 식당을 정리해 내게 주면, 내가 그것을 바탕으로 중간중간에 관광지를 넣어서 동선을 짜는 식이다. 이번에 가기로 한 '스티어슨'도 아내가 찾아온 가게다. 호주에 오면 뭐다? 스테이크다. 이곳의 스테이크가 제법 맛있다는 풍문을 듣고 찾아가 봤는데, 메뉴판부터 범상치 않았다. 가장 작은 사이즈가 160g부터 시작하고, 300-400g짜리 스테이크가 오히려 주력 메뉴라는 느낌이다. 한국에서 이 정도 사이즈의 스테이크를 먹으려면 얼마를 들여야 하는지 싫어도 계산을 할 수밖에 없는데, 몇 번 계산해 보고서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렇게 큰 덩어리를 이렇게 가성비 좋게 먹을 수 있다고? 

 

아내는 양이 많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200g짜리 필레미뇽을 시키고, 나는 300g짜리 립아이를 하나 시켜 보았다. 너무 고기만 먹는 것도 다소 양심에 찔릴 것 같아 가든 샐러드 하나도 추가로 시켰다. 상추와 양파가 주를 이루는, 한국인에게 당황스러울 정도로 익숙한 비주얼의 가든 샐러드도 물론 제법 맛이 괜찮았지만, 역시나 기대했던 것만큼 스테이크가 정말정말정말 훌륭했다. 촉촉하면서도 딱 알맞게 구워진 육질에, 입에 넣는 순간 몇 번 씹지 않아도 슬그머니 녹아내리는 듯한 맛. 밑에 깔린, 이렇게까지 부드럽게 만들 수 있나 싶을 정도의 매시드 포테이토와 함께 먹으면 천상의 맛이 따로 없다. 이래서 다들 호주에 오면 스테이크로 먹어 조지라는 말을 하나 보다 싶다. 한 끼만에 바로 납득했다. 다만 성격이 급한 한국인의 특성상, 식사를 다 하고서도 점원이 다가올 때까지 계산을 기다려야 하는 호주의 문화만큼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왜 나의 소중한 시간을 점원에게 좌우받아야 하는지 잘 납득이 가지는 않았으나,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처럼 식사 자체에 집중하는 사람들보다는 천천히 느긋하게 이것저것 먹으면서 대화를 중점적으로 하는 모습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호주는 식사와 함께 대화를 주고받는 것 자체를 식사에서 중요한 경험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좌) 아내의 필레미뇽.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중) 한국인 누구나 친숙하게 느낄 가든 샐러드. (우) 나의 립아이. 씹는 맛이 훌륭했다.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밖에 나왔는데, 아까보다 더욱 심한 추위가 우리를 덮쳤다. 항구도시라 빌딩 사이로 스며드는 바닷바람이 제법 살을 에인다. 배가 불러서 소화시킬 겸 숙소까지 1.3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가기로 했는데, 몇 번이고 후회를 했는지 모르겠다. 평소라면 1.3킬로미터 정도야 걷는 것도 아닌데, 얇은 옷을 입고 초겨울 날씨 속을 걸어가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추위를 잘 타는 아내는 어느 순간부터 말하는 것을 포기한 듯했다.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 옹송그리는 셈이다. 잰걸음으로 숙소에 들어와 난방을 켜고 따뜻한 물로 샤워하던 그 순간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그러나 사실 숙소에서 이 날 밤만 우리는 두 번이나 나쁜 의미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온 건물에 화재 경보가 울리더니, '모든 숙박객들은 계단을 통해 1층으로 피난해 주십시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옷을 대강 챙겨 입고 귀중품을 들고 내려왔는데, 한참을 점검하더니 오작동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포함한 투숙객들은 투덜거리며 다시 숙소로 올라가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밤이 되어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이고 잠을 자려 하는데, 밤 열한 시경에 다시금 화재 경보가 울리는 것이다. 이번에는 진짜인가? 싶어서 다시 옷을 챙겨입고 귀중품을 들고 내려왔는데, 또 오작동이란다. 뭐 어떻게 된 거야? 너무 오래 된 건물이라 이렇게 화재경보기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호텔 측의 설명이다. 아니 오작동을 하면 고칠 생각을 해야지... 식사하고 돌아올 때까지는 좋았는데, 마지막에 마음까지 피곤하게 된, 정말 어처구니없는 밤이었다. 그래도 다음 날 아침까지는 경보가 울리지는 않았으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이름이 흥미로워서 찍어 본 스트랜드 아케이드. 런던에서 지명을 정말 많이 따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