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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190526 Fiji | Sydney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8. 시드니에서의 둘째 날, 차이나타운에서의 말레이시아풍 식사와 마켓시티, 세인트 앤드류 대성당까지

by 집너구리 2022. 6. 18.

* 이 여행기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9년에 있었던 일을 다룹니다.

 

(앞 에피소드는 여기)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7. 휴양 끝 관광 시작! 시드니에서의 첫 끼니와 시드니의 첫인상, 낮

* 이 여행기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9년에 있었던 일을 다룹니다. (앞 에피소드는 여기)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6. 피지를 떠나 시드니로, 처음 해 보는 외국에서 외국으로의 비행 *

sankanisuiso.tistory.com

 

아침에 뭘 먹어야 할지 다소 고민하면서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일어나 보니 그런 고민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전날의 피로가 제법 누적된 탓에 아침 열 시에 가깝게 죽도록 잠을 잔 것이다. 무슨 놈의 아침밥이야. 피곤하니까 좀 더 자자고. 지금이야 내가 아내보다 아침잠이 많아졌지만, 막 결혼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아침잠이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수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제 날씨가 추워서 그랬나 싶기도 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점심을 조금 일찍 먹기로 했다. 느긋하게 일어나서 옷을 따뜻하게 걸쳐입고 길을 나선다. 딱히 큰 일정을 정해 놓지는 않은 채로 점심 식사를 할 장소만 대강 생각해 둔 상태였기 때문에, 식당까지 산책 삼아 걸어가기로 했다. 시드니 관광이 처음인 사람들에게 시드니는 제법 관광하기 편한 도시라고 할 수 있는데, 엔간한 식당이나 볼거리는 다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점심 식사를 하기로 한 말레이시아 식당 '마막Mamak'도 그리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다. 

 

시드니 시청(타운홀) 앞에서 남쪽으로 꺾어서 내려가는 길에 바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성당 하나. 호주 성공회 시드니 교구의 주교좌인 '세인트 앤드류 대성당St Andrew's Cathedral'이다. 성공회의 세가 강하지 않은 한국에서 살다가 영국인들이 세운 도시 시드니에 오니 바로 이렇게 멋진 고딕 리바이벌풍의 성당을 만나게 된다. 마침 시간도 여유로운 겸 한번 둘러볼까 했는데, 아쉽게도 오전 시간에는 행사가 있어서 예배당을 개방하지 않는단다. 일단 식사를 하러 갔다 와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호주산 사암으로 지었다는 세인트 앤드류 대성당. 이렇게 구구절절 내력을 영어로 적어 놓은 판때기를 보니 새삼 영어권에 왔다 싶다.
아마도 성당이 세워졌을 당시의 교구 문장들이 장식처럼 새겨져 있다.

세인트 앤드류 대성당을 지나 조지 스트리트(George St.)를 따라 쭉 남쪽으로 내려간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청명하다. 현대적 건물들 사이로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졌을 법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호주가 본격적으로 세계사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대략 그때쯤부터임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렇게 눈에 띄는 빅토리아풍 건물들은 의외로 백몇십 년의 연월을 자랑하는 녀석들일지도 모른다. 개중에 가끔씩 익숙한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는 것을 보고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한국 사람은 정말 우리 생각보다 꽤 어디에나 있다.

 

며칠 만에 만나게 된 '공차'(좌). '말하지 않는다, 보지 않는다, 듣지 않는다'는 일본의 전승에서 따 온 듯한 선술집 'Three Wise Monkeys'의 장식(우).
딱 봐도 오래 된 듯한 '센트럴 침례교회Central Baptist Church'(좌), 간판만 한국어로 바꾸면 그냥 한국의 신식 성당이래도 믿을 '성 베드로 율리아노 천주당'(우).

건물이 바뀐 것이 아닌가 싶은 침례교회와 천주교 성당을 연달아 지나다가 헤이 스트리트 교차로에서 서쪽으로 꺾는다. 이윽고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시드니 차이나타운이다. 한국인이 어디에나 있다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중국인도 만만치 않다. LA라는 특수한 케이스를 제외하자면 한국인들은 굳이 자신의 정체성을 건축물 같은 것으로 표현하려고까지 하지는 않는데, 화교들은 아니나다를까 차이나타운 입구에 패루를 떡하니 건설해 놓았다. 그래, 이래야 차이나타운이지. 원래부터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조성되어 있는 탓인지, 아니면 예전에 비해서 다소 쇠락한 것인지, 오전의 차이나타운은 비교적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거리를 따라 키 큰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어서 하늘을 완전히 가리다시피 하는 것이 퍽 멋있었다. 흥미롭게도 차이나타운 거리의 모든 가게가 중국풍은 아닌 듯, 한국 가게도 몇 개 눈에 띄고, 오늘 우리가 가려는 가게 또한 차이나타운에 위치했지만 중국계 음식점은 아니다. 가게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며 잠시 차이나타운 거리를 거닐어 본다.

차이나타운의 패루에는 뭔가 사해동포주의를 자극하는 문구들이 사방에 붙어 있다. 사해일가四海一家! 자유정의自由正義! 민주정신民主精神!
급작스럽게 나타나는 모닝글로리...

 

이렇게 그리 넓지 않은 차이나타운 메인스트리트를 한참을 거닐어도 가게 오픈 시간인 열한 시 삼십 분까지는 아직 시간이 이십 분 가량 남았다. 인기가 많은 레스토랑이라길래 그냥 오픈 전이라도 가게 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 보기로 했는데 웬걸, 정말로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우리 뒤로 줄이 주루룩 늘어서기 시작했다.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아무튼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을 우연하게도 체현한 셈이다.

 

말레이시아 식당 'Mamak'. 15 Goulburn St., Sydney NSW
(좌) 볶음면인 '미 고렝Mee Goreng', (우) 새우와 코코넛 튀김, 오이, 튀긴 두부 등에 땅콩소스를 얹은 샐러드인 '로작Rojak'.
(좌) 말레이식 빵인 '로티Roti'와 야채 커리인 '카리 사유르Kari sayur', (우) 닭고기 사떼Satay ayam.

덕분에 마수걸이로 식당에 입장하는 데 성공했다. 아침 겸 점심이기도 하고 다소 시장하기도 해서, 일단 식사 하나를 고른 뒤 일품요리 메뉴를 종류별로 시켜 보기로 했다. 먼저 식사로는 볶음면인 '미 고렝', 그리고 아내와 내가 아주 좋아하는 동남아식 고기 요리인 '사떼'를 시키기로 한다. 닭고기와 소고기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되어 있어서, 닭고기로 만드는 사떼인 '사떼 아얌Satay ayam'을 고른다. 다음으로 무엇을 시킬지 잠시 고민했는데, 호주에 온 이상 고기류를 매일 죽도록 먹을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 하에 최대한 야채나 해산물이 들어간 요리를 골라 보기로 했다. 우리의 결론은 말레이식 샐러드라는 '로작Rojak'과 야채 커리인 '카리 사유르Kari sayur'의 두 가지다. 말레이식 빵인 '로띠Roti'가 카리 사유르에 딸려 왔었는지, 아니면 따로 주문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나 주목할 만한 거리라면, 가게 주방이 오픈 키친 형태로 되어 있어서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요리사들이 쉴새없이 로띠 반죽을 해서 오븐에 구워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빵 냄새가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무척이나 맛있었다. 기실 나는 인도네시아 음식에는 그래도 익숙한 편이지만 같은 말을 쓰는 말레이시아풍 음식은 처음 먹어 보는데, 호주식으로 어레인지가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의외로 익숙한 맛이 났다. 불맛이 은은하게 피어나오는 사떼는 물론이고, 따끈하다 못해 뜨거운 로띠를 살짝 찢어 카리에 찍어 먹으니 담백하면서도 풍성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맛있다. 미 고렝은 생각했던 대로 다소 매콤했는데, 인도네시아식으로라면 튀긴 새우칩을 몇 개 얹어 주었을 것인데 여기에서는 구경할 수 없었다는 점이 신기했다. 말레이시아는 새우칩을 먹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냥 호주인들이 '어우 세상에 과자랑 면을 어떻게 같이 먹어?'라고 한 마디씩 해서 마지못해 없앤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로작의 경우, 땅콩 소스를 잔뜩 부어서 그런지 맛은 있었지만 아주 내 입맛에 착 달라붙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땅콩은 그대로 먹거나 과자의 형태로 먹는 것을 선호하고, 소스의 형태로 먹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코코넛 튀김과 오이는 의외로 신선한 조합이었다. 

 

배불리 식사를 하고 난 뒤에는 걸어서 오 분 정도 걸리는 재래시장인 '마켓 시티'를 구경하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해외여행을 가면 꼭 그 나라 마트나 시장 구경을 하곤 하는데, 순전히 그 나라에서 무슨 맛있는 것을 팔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서양식(?) 재래시장 느낌은 어떤지 한 번 들어가 보기로 하자.

 

(좌) 경전철 1호선의 전동차. 이 바로 앞인 '패디스 마켓' 역에서 정차하고 있다. (우) 마켓 시티의 커다란 건물.

마켓 시티 건물 1층에 있는 거대한 좌판 시장을 '패디스 마켓Paddy's Market'이라고 한단다. 안에 들어가 보니 의외로 거친 인테리어에 정신없이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제일 문 앞쪽으로는 기념품 가게. 남대문 시장에서 1층 상점가에는 전부 기념품을 진열해 놓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온통 호주스러운 물건들이 가득한데, 공산품은 아니나다를까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들이 많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호주의 상징인 코알라와 캥거루 인형이 즐비하다. 마그넷도 많이 샀다.
이... 이게 뭐람. 눈알이 크게 그려진 브라와 팬티 세트인데, 이런 걸 누가 입지?

기념품 가게는 많이 있는 것 같으니, 한 바퀴 돌아보고서 조금 더 싼 데에서 기념품을 사기로 하고 좀 더 안쪽으로 탐험을 나선다. 대뜸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식료품점이다. 숙소에 주방이 없다 보니 여기에서 뭘 산다고 크게 득 되는 것은 없기는 하지만, 영미권 나라에 처음 오는 거다 보니 도대체 얘네들은 뭘 먹고 사는지를 편린이나마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다. 

 

이렇게 서양배가 많이 쌓여 있는 광경은 처음 봤다. 서양배는 한국 배에 비하면 그다지 맛이 있는 편은 아니라고 해서, 크게기대가 되지는 않는다. 얌(마 종류)도 엄청 많이 팔고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에게 익숙한 식재료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무나 호박은 물론이고, 팔뚝만한 여주도 '비터 멜론Bitter melon'이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서양 입맛에 여주가 맞을 것 같지는 않기는 한데, 그냥 동양 사람들이 이 근처에 많이 사니까 갖다 놓으면 팔리기는 하는지도 모른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곳 근처는 중국인을 비롯한 온갖 동양 사람들이 섞여 사는 동네라서 그런 듯도 하다.

 

그러다가 이렇게 반가운 친구들을 만나기도 한다. 무려 경북 청도에서 온 버섯들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아주 많은 나라를 돌아다녀 본 것은 아니지만, 기묘하게도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마트나 시장에 가면 꼭 한국산 버섯이 튀어나오곤 했다. 이유는 통 모르겠다. 한국산 버섯이 뭔가 다른 맛이 나나?

 

왜 서양 사람들이 이걸 '계란풀'이라고 하는지 확실히 깨닫게 해 준 생김새의 큼지막한 가지들도 있고,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 걸 처음 본 방울양배추도 보고. 역시 먹는 것이 달라지니 시장에서 파는 물건들도 다 각기 다른 것이 재미있다. 이게 또 시장 구경의 묘미다.

 

다 돌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기념품 쇼핑을 할 때다. 피지 공항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마그넷을 위주로 한 번 사 보기로 한다. 우리가 집에다 간직할 것들도 있거니와, 결혼식에 참석해 준 회사 사람들에게 돌릴 답례품에 몇 개씩 넣어 주면 좋을 것 같아 여기에서 좀 대량으로 구매하기로 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특별히 병따개가 달린 마그넷을 골랐다. 술을 거의 안 마시기는 하지만 우리 몫으로도 한 개. 종류를 다양하게 골라 봐도 그렇게 비싸지 않다.

 

웬 푸드트럭이 마켓 안으로 들어와 있담. 바깥으로 나오면 적벽돌로 된 마켓 시티의 외벽과 다시 마주친다. 즐거운 시장 구경도 마쳤고, 기념품도 다 샀으니 이제 슬슬 다음 행선지를 고민해 보기로 한다. 시장까지 다 돌아보고 났는데도 시간은 이제 겨우 오후 한 시를 가까스로 넘겼다. 이따가 세 시쯤에 서큘러 키에서 스냅사진 작가님을 만나기로 했으니 아직도 두 시간 가까이 시간이 남았다. 느긋하게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에 한 번 더 아까 그 성공회 성당을 둘러보기로 했다.

 

뜬금없이 나타난 한국식당. '이 집이지'와 'easy busy'를 잘 엮었다.

이번에는 활짝 열려 있는 세인트 앤드류 대성당의 육중한 나무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다.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사방 어디에나 장식되어 있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이다. 날씨가 워낙 맑고 청명해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그야말로 성스러울 정도로까지 아름답다. 한국의 오래 된 성당들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고딕 리바이벌 양식 특유의 화려한 아치와 측랑 구조가 어딘지 모르게 친숙함마저 준다. 천장은 비취색에 가까운 청록색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중간중간에 오늘날의 호주 국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별 장식이 그려져 있다. 언제부터 호주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남십자성을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전기가 부족했던 시절에 저녁 성찬례 때 등불 너머로 저 별들을 보았다면 더욱 아름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마다 장식되어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와 별이 쏟아져 내려올 듯한 천장 벽화.
성당의 모습을 목조로 재현한 모형. 앞에 왜 기도용 장궤틀이 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성당의 건축가 E. T. 블래킷과 그 아내 사라 블래킷의 묘소.

성공회 성당의 특징인지는 모르겠는데, 세인트 앤드류 대성당은 유독 벽 구석구석마다 누군가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사진을 찍고 메모하기에도 모자를 만큼 많다. 성당을 건축한 건축가 부부의 묘소, 몇 대 성공회 뉴사우스웨일스 교구장 주교의 묘, 신부님의 묘 등등, 몇 발자국도 채 걷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의 묘소가 나오는 식이다. 한국 개신교 교회에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고, 천주교 성당이라손 치더라도 명동을 비롯한 주교좌 성당의 지하 성소에 가끔씩 성인들의 묘소가 몇 있는 정도지, 이렇게 성당의 일부분이 되다시피 한 사람들의 묘소를 보는 것은 매우 신선한 느낌이었다. 믿음이 이어지고 사람들이 이 성당을 계속 드나드는 한 그들은 영원히 사람들에게 기억되리라. 예전에 방송에 출연했던 어떤 법의학 교수님이 '사람은 생명을 잃었을 때 한 번 죽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완전히 죽는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서 한참 뒤에 들은 말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 성당의 일부가 된 이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이어지는 형태로 영생을 얻은 것이 아닌가도 싶다.

 

그건 그렇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각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그림들이 재미있게도 모두 신약 복음서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전에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에는 스테인드글라스나 벽화가 성경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복음서를 하나하나 읽지 않더라도, 그림에 대한 사제의 설명을 바탕으로 복음서의 내용을 따라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남녀 문해율이 90%에 가까워지는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에서도 이러한 중세 시대의 전통이 유지된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고딕 리바이벌이 당시의 보수주의적, 종교주의적 흐름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보면 더더욱 의미심장하다.

 

(좌) 성가대석 뒤에 자리잡은 열두 사도들. (우) 세례대의 배경으로 장식되어 있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예수의 스테인드글라스.
(좌) 최후의 만찬. (우) 탄생 후 동방박사에게 경배받고, 성장하여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예수의 모습.
(좌) 예수의 부활. (우) 수태고지로부터 예수의 탄생까지.
(좌) 예수의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이를 사도들에게 알린 마리아 막달레나. (우)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만난 예수.

상대적으로 고풍스러운 느낌의 건축이지만, 역시 성공회 성당이라 그런지 천주교 성당과는 조금 다른 부분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라면, 천주교 성전 건축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인 제대가 중요하게 그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성당 가장 안쪽 벽에 예수와 성인들의 상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간단한 제대가 준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천주교 건축에서 두드러지는 이른바 '벽 제대'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대신에 강론대가 상당히 강조되어 있다. 오히려 강론대야말로 이 성당의 가장 중심(에서 살짝 비껴 있는 부분)에 위치하며, 사방의 신자들에게 모두 잘 보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교회는 성공회 내에서도 특히 전통의례에서 거리가 먼 이른바 저교회(low church)파 복음주의 성향이라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 보면 많은 부분이 이해된다. 전통 전례식으로 성찬례를 진행할 자리가 마땅치 않다든가, 제대 앞에 성직자를 위한 공간이 거의 없다시피 한다든가. 천주교식 전통 성당 건축과 비교해 가면서 톺아보기 딱 좋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유독 툭 튀어나와 있는 강론대. 앞에 준비되어 있는 좌석은 성가대석일까?
강론대 바로 옆에서 본 웅장한 성당 앞부분.
파사드만 보면 그리 크지 않아 보이는 건물인데, 안으로 들어와 보면 무척 장엄한 느낌을 준다. 명동성당도 비슷한 느낌이지 않은가.
바깥으로 나오면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와 함께 시드니 타운홀 광장을 구경할 수 있다. 갈매기가 참 많은 도시다.

흥미롭게 성당 구경을 하고 나와, 짐을 풀어 놓기 위해 숙소로 나선다. 사진작가님에게 짐을 최소화해 줄 것을 요청받았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배터리 충전도 좀 더 해 놓고, 가방도 내려놓고, 옷도 조금 더 가볍게 입어 보자. 여행지에서 손에고 등에고 아무것도 지지 않고 나가려니 참 기분이 묘하다. 잠시 쉬면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슬슬 서큘러 키로 가는 전철을 타러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