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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은 거창하게/홈카페

카페 핀으로 베트남식 커피 내리기

by 집너구리 2022. 5. 9.

아버지가 최근에 베트남 출장을 오래 다녀오셨다. 실로 삼 년 만에 다녀오는 출장이라 더욱 들떴는지, 여기저기 나눠 줄 선물을 바리바리 사 들고 오셨다. 그 중 내게 돌아온 선물 봉투에는 무려 베트남산 커피가루 한 푸대가 들어 있었다. 베트남 글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읽을 수 없지만, 그래도 대강 눈에 들어온 글자들 몇몇을 조합하니 '핀(cà phê phin : 베트남 사람들이 쓰는 커피 드리퍼)용 커피가루'인 듯했다. 첨가물도 살짝 들어 있는 듯해서 그냥 하던 대로 핸드드립을 해 마시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마 명분이 있다 아입니꺼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답은 간단하다. 그냥 핀을 하나 당근마켓에서 사 오면 되는 문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포장도 뜯지 않은 핀을 당근마켓에 올려놓고 팔고 있다. 나도 한 개에 이천 얼마 하는 것을 손님 대접용까지 감안해서 두 세트 사 왔다.

크게 구성은 받침필터(좌상), 뚜껑(우상), 드립 바스켓(좌하), 누름쇠(우하).

완전 새 물건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내가 사 온 것은 스테인리스제 핀이므로, 손도 대지 않은 새 핀이라면 식용유를 묻힌 키친타올로 닦았을 때 분명히 연마제가 묻어나올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연마제를 닦아내느라 한참의 시간을 사용했다. 식용유를 묻혀 더 이상 연마제가 묻어나오지 않을 때까지 닦고, 베이킹소다를 묻혀 한번 더 닦고, 세제를 묻혀서 여러 번 더 닦고... 하는 것을 몇 번 반복하면 된다. 참 쉽쥬?

 

이제 설거지도 다 끝냈으니, 반짝반짝한 새 핀을 갖고 본격적으로 커피를 내려 보도록 하자.

 

요리는 닉김이야 커피도 닉김이야

1. 핀을 컵 위에 올린다.

어떤 컵이든 받침필터가 걸쳐질 수 있으면 된다. 다만 시각적 즐거움이랄까, 그런 것을 위해서 기왕이면 유리컵을 쓰는 것이 닉김이 있고 좋다. 자고로 커피는 닉김이야.

 

 

2. 핀에 물을 붓고 예열한다.

예열할 때의 물은 최대한 높은 온도로 해 주는 것이 좋다. 어차피 섭씨 100도의 물을 부어도 핀에 닿는 순간 온도가 팍 내려간다. 다만 이렇게 쓴 물은 어차피 버려 줘야 하는데, 핀이 무지하게 뜨거우므로 가능하면 집게나 천을 활용해 핀을 들고 그 밑의 컵에 고인 물을 버려 주도록 하자. 닉김도 좋지만 안전도 중요하다.

 

* 커피를 본격적으로 내리기 전에, 연유를 컵에 조금 담아 준 뒤 커피를 내리면 베트남식 연유 커피 '카 페 쓰어 농(Cà Phê Sữa nóng)'를 만들 수 있다. '쓰어'는 '우유'를 뜻하고, '농'은 '뜨겁다'는 뜻을 가진다. 말하자면 '뜨거운 밀크 커피'라는 뜻인 셈이다. 얼음(đá)을 넣으면 '카 페 쓰어 다(Cà Phê Sữa đá)'가 된다. 

 

3. 커피가루를 20그램 준비하여 드립 바스켓에 넣고 표면을 고른 뒤 누름쇠를 얹고 수평을 맞춰 눌러 준다.

20그램은 베트남 사람들이 커피를 내릴 때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하는 양이라고 한다. 채널링을 방지하기 위해 수평을 잘 맞춰 주는 것이 중요하다. 바리스타에 따라서는 누름쇠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데, 나는 초짜이므로 깝죽대지 않고 얌전히 누름쇠를 써 주기로 한다.

 

4. 누름쇠 위로 40g의 물을 붓는다.

베트남식 커피의 정석대로라면 보통 커피가루와 물의 비율은 (커피가루):(물) = 1:2로 잡는다고 한다. 물론 바리스타들에 따라서 커피와 물의 비율은 달리 잡기도 한다고 한다.

잠시 기다리다 보면 커피가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려오기 시작한다. 엄청나게 늦게 떨어지는데, 기본적으로 10-15분은 걸린다고 생각하는 게 좋은 모양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아침에 일하기 전에 한 이십 분 정도는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문화가 있다는데, 끽연가들은 커피를 내리는 동안 담배도 같이 피운다고 한다. 나는 혐연가이기 때문에 굳이 담배까지 같이 즐길 생각은 없지만, 커피를 한 잔씩은 꼭 마시는 습관이 있다 보니 퍽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이 일어나자마자 대충 밥만 먹고 바로 일터로 가는 건 너무 사는 맛이 안 나잖아. 

 

5. 맛나게 드씨요!

이렇게 해서 내린 커피는 무척 진하다. 다만 나는 연유를 내 생각보다 더 많이 부었던 탓인지, 아니면 이 커피가루 자체에 초콜릿이 들어가 있어서인지 과하게 달았다. 따뜻한 물을 좀 더 부어서 마셨더니 예전에 벳비엣에서 마셨던 연유 커피의 맛이 그대로 났다. 이 믹스커피스러운 달다구리하면서도 진한 커피, 너무 좋다.

 

핀이 관리가 무척 쉽고 내리기도 어렵지 않아서, 앞으로 또 한동안은 이렇게 내려서 먹어 볼 듯하다. 너무 맛있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