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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은 거창하게/홈카페

[취미생활은 거창하게] 수동 에스프레소 머신 Flair Pro로 에스프레소를 내려 보았다

by 집너구리 2021. 9. 13.

홈카페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런 사람일 수록 꼭 장비발을 세우고 싶게 마련인 모양이다. 한때는 모카포트만 보면 홀린 듯 사제끼다가, 지금은 잠시 소강기에 접어들기는 했어도 늘 나의 당근마켓 키워드알림 목록에는 커피 추출기구 관련 키워드가 등록되어 있었다. 거의 마지막인 지금까지 등록되어 있는 키워드 중, '수동 에스프레소'라는 키워드가 며칠 전 알림을 하나 울렸다. 다른 키워드알림에 비해서는 도통 울리지 않는 알림이기에 혹시나 하고 들어가 보았더니, 무려 나의 드림 머신 중 하나인 Flair Pro를 파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아, 이건 사야지!

 

가방부터 예쁜 거 봐....
구성품을 펼쳐 놓으면 이렇게 된다. 정신 없이 찍다가 기본 플런저는 찍지 못했다.

중고거래로 사서 그런지, 원래대로라면 한 개씩 있어야 할 추출부 부품들이 모두 두 개씩 들어 있었다. 아마도 판매자 분이 개인적으로 구해서 쓰다가 한번에 처분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오래 된 제품임을 감안하더라도 제법 싼 가격이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감사할 데가.

 

(좌) Flair Classic, (우) ROK Espresso Maker.

플레어 시리즈는 수동 에스프레소 머신 계에서는 ROK(한때 Presso라고도 불렸던)와 함께 이쪽 계열의 양대산맥을 달리고 있는 제품군이다. ROK는 양쪽에 달린 레버를 두 손으로 눌러 압력을 가해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형식인데, 플레어 시리즈는 한 개의 레버를 플런저 위에 대고 누르며 압력을 가하는 식이다. 둘 다 인테리어 관점에서도 훌륭하지만, 전기 없이 인력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에스프레소를 뽑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고평가를 받고 있다. 혹자는 ROK는 조금 더 부드러운 맛이 난다면 플레어는 조금 더 강렬한 맛이 난다고 하는데, 그거야 개인 차이고 나는 ROK는 사용해 보지 못한 관계로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자, 그럼 이놈의 기계를 가지고 신나게 에스프레소를 뽑아 보기로 하자.

0. 일단 레버부와 받침부를 결합해 준다. 

레버부 아랫부분의 화살표에 맞춰 받침부에 결합하고, 나사를 활용해 바닥에 고정해 준다. 

제대로 고정되지 않으면 균일한 압력을 가하기 어려울 수 있으므로 특히 주의할 것.

다 결합하고 나면 받침부에 샷잔 받침을 결합해 주면 되지만 저울을 활용할 경우 굳이 결합하지 않아도 된다.

 

1. 실린더와 샷잔을 예열한다.

예열 없이 바로 실린더에 원두 바스켓을 결합하고 뜨거운 물을 부어 버리면 물의 열량이 모두 실린더에 흡수되어 버리므로 먼저 예열을 해 두는 것이 좋다.

샷잔도 마찬가지다.

2. 원두 가루를 계량해 바스켓에 담고 탬핑을 한다.

이때 에스프레소용 굵기로 원두를 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귀차니스트들이라면 원두를 살 때 에스프레소용 굵기로 갈아 달라고 하겠지만, 플레어를 사서 쓰는 사람쯤이면 이미 집에 그라인더 하나는 장만해 두고 있을 공산이 무척 높다. 

원두는 그때그때 갈아 쓸 때 가장 향과 맛이 좋기 때문이다.

이번에 사용한 원두는 미디엄다크로 로스팅된 인도 마이소르너겟 15g을 사용했다.

 

3. 원두 가루 위에 샤워 스크린을 얹고 그 위에 실린더를 결합한다.

샤워 스크린은 압력을 가했을 때 원두 위에 물이 고루 뿌려지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실린더에는 직접 뜨거운 물이 담긴다.

플레어 프로 1의 샤워 스크린에는 고무패킹이 달려 있는데, 

잘못해서 바스켓 안에 빠지기라도 하면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므로 주의하자.

4. 바스켓에 결합된 실린더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온도는 섭씨 95도, 약 60g을 부었다.

실린더 내부에 상한선이 그어져 있는데, 여기에 맞추어 부으면 60g 안팎으로 잡힌다.

다만 에스프레소 세팅을 할 때에는 정확한 계량이 필요하므로 저울 위에 실린더를 올려놓고 물이 정량 들어가는지를 확인하며 붓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5. 금속 플런저에 압력계를 결합하고, 실린더에 플런저를 결합하여 레버 밑에 올린다.

물론 기본 플런저를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처음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사람이라면 압력계를 활용하여 실린더 내부에 걸리는 압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

틈바구니가 생기지 않는지 확인하며 물샐틈 없이 결합한 뒤, 레버 바로 아래의 받침대에 실린더를 올린다.

이것으로 준비 끝!

7. 레버를 내린다!

압력계에 표시된 'Espresso' 레벨에 도달하면 커피가 잘 뽑히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보다시피... 첫 시도는 그저 커피 대폭발로 막을 내렸다.

 

압력계는 대략 3기압 정도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커피는 여기저기에서 침을 찍찍 뱉고,

레버를 누르는 손에는 전혀 손맛이 안 느껴지고....

 

총체적 난국이다.

 

이렇듯 압력이 충분히 걸리지 않는 경우에 짐작할 수 있는 해결 방법이라고 하면

가) 결합부가 모두 제대로 결합되었는지, 잔 커피가루가 끼어 있지 않는지 확인

나) 원두 분쇄도를 더욱 가늘게 잡아서 분쇄

정도가 있겠다.

 

이 지점들을 의식하면서 대략 일곱 샷쯤 연습으로 내렸을 즈음...

드디어! 압력계가 'Espresso' 구간으로 들어가면서 뭔가 압력이 잘 걸리는 것 같더니,

마침내 그럴싸한 샷 하나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포장지에 적혀 있던 '허브, 스파이스, 바디감'의 세 문구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만큼 깊은 향미에 더불어 기분 좋은 쌉스레함과 끝에 살짝 묻어나오는 단맛까지, 제법 괜찮은 샷 한 잔이었다.

반자동 머신으로도 제대로 된 샷을 내리기 쉽지 않았는데, 오로지 사람의 손길만으로 이렇게 마실 만한 샷이 나오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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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낮 산책을 나가기 위해 이쯤에서 용구는 정리해 두었지만, 앞으로 재미있는 취미 하나가 생긴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들뜬다. 제임스 호프만 선생 왈 '에스프레소는 취미'라 하였으니, 다양한 종류의 원두를 가지고 서로 다른 조건에 맞추어 훌륭한 샷 한 잔을 뽑아내는 즐거움이 가정에서의 에스프레소 추출의 요체라는 것이다. 휴대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멋진 기구를 얻었으니 앞으로의 홈카페 생활이 더욱 기대된다.

 

 

부록. 

제임스 호프만 선생의 플레어 프로(초기 버전) 개봉기는 아래의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영어).

 

제임스 호프만 선생은 플레어 프로의 하위 모델인 플레어 네오(Flair Neo)도 리뷰하신 바 있다(영어).

 

한국어 버전의 사용기가 필요하다면, 남자커피 사장님의 플레어 프로 2 사용기도 아래에서 확인 가능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플레어 프로 1이지만, 어차피 지금 발매되고 있는 건 프로 2이므로 오히려 이쪽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