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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190526 Fiji | Sydney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10. 시드니에서의 마지막 하루(1) : 하이드 파크에서 맥쿼리 로드를 따라 MCA까지, 뉴사우스웨일스 역사 기행(?)과 최고의 피시앤칩스

by 집너구리 2022. 7. 31.

* 이 여행기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9년에 있었던 일을 다룹니다.

 

(앞 에피소드는 여기)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9. 스냅사진 촬영과 랜드마크 구경, 그리스식 저녁 식사와 밤의 천

* 이 여행기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9년에 있었던 일을 다룹니다. (앞 에피소드는 여기)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8. 시드니에서의 둘째 날, 차이나타운에서의 말레이시아풍 식사와 *

sankanisuiso.tistory.com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시드니에서 오롯이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뭘 할까 고민하다가, 역시 우리가 보통 여행을 갈 때 그러듯이 일단 식사 자리만 확실히 잡아 두고 산책삼아서 한번 밖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앞의 여행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시드니 시가지 내의 명소들은 대부분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번 다녀 보는 것도 여유 있고 괜찮았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되고, 모레는 출근해야 하는 빡센(?) 일정의 마지막을 이렇게 여유작약하게 마무리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먼저 숙소 바로 옆에 있는 하이드 파크로 향하기로 했다. 시드니 시티 권역 내에서 가장 큰 공원이다. 도심 속에 이런 공원이 있나 싶을 정도로 녹음이 우거졌으면서도, 옛 영국 식민지 시절의 정취랄까, 감성이랄까, 그런 것들이 물씬 묻어나오는 공간이다.

 

스타벅스 앞 길을 건너 하이드 파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아 주는 것은 거대한 석물이다. 일단 '국왕과 나라를 위하여'라고 쓰여 있는 머릿돌 아래로 '시드니 시에 기증된 이 석물은 제1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분쟁에 참여했던 구성원들을 기리며 오드 펠로스 대연합에서 드림'이라고 되어 있다. 오드 펠로스 대연합Grand United Order of Oddfellows이 도대체 뭐야? 이 사진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이름 한번 괴이쩍네 하고 넘어갔는데, 나중에 찾아보니까 의외로 역사가 매우 오래 된 계몽주의 비밀결사의 이름이란다. 이런 걸 왜 호주 최대 도시 한복판에 심어 놓은 겨. 여기저기 일없이 느긋하게 걸어다니는 비둘기와 갈매기, 따오기 무리를 뒤로 하고 공원으로 들어간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듯한 나무와 풀들이 그득하다.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왕왕 있다.
지나가는 길에 찍은 유대교 회당(시나고그). 길게 뻗은 양버즘나무 갈잎 뒤로 살짝 가려져 있다.
그림같이 맑은 가을하늘 아래, 시드니 타워 아이가 보이는 풍경.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이지만 잔디밭도 나무도 아직 푸른 기가 가득하다.
시드니의 오래 된 공원에는 이렇게 두어 아름 정도는 되는 굵기의 거목들이 자리잡고 서 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잔디밭과 숲 사이로 난 길을 걷다 보면 머지않아 탁 트인 넓은 원형의 공간이 나타난다. 방사형으로 난 산책로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분수가 있고, 주위는 이런저런 동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동쪽을 돌아보면 전날 구경했던 성공회 성당과 비슷한 느낌의 고딕 리바이벌 양식이지만 두어 배는 더 큰 듯한 거대한 성당 하나가 나타난다. 천주교 시드니 대교구의 주교좌인 '세인트 메리 대성당St Mary's Cathedral'이다. 가을 하늘 아래에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황갈색의 첨탑이 공원의 푸른색 풍경과 어우러져 제법 장관이다.

 

시드니 성모 마리아 대성당(St Mary's Cathedral, Sydney)

앞에서 '분수가 있다'라고 잠깐 언급한 바 있는데, 이 분수가 정말 멋진 물건이다. 이름을 '아치볼드 분수Archibald's Fountain'이라고 하는데, 세 갈래의 물길 위로 그리스 신화의 명장면들이 역동적인 모습으로 표현된 청동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다. 세인트 메리 대성당이 있는 동쪽을 가리키고 있는 한가운데의 남자는 금琴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아폴론이고, 세 물길 위로는 각각 미노타우로스를 때려잡는 테세우스, 사슴을 쓰다듬으며 활을 겨누고 있는 아르테미스(다이아나), 양들을 돌보는 목신 판이 묘사되어 있다(사실 양과 함께 있는 남자 조각상은 처음에는 황금 양털을 깎으러 간 이아손인 줄 알았는데 시드니 시의 공원 정보에 의하면 판이란다). 제법 규모도 큰 분수이고, 조각상의 풍취도 멋있어서 그저 구경하기에만도 충분히 즐거운 조각상이었다. 이래서 타이쿤 게임을 하면 그렇게 분수를 이것저것 참 다양하게도 준비해 놓는 모양이다(?).어쩌면 내가 그저 분수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평온한 시드니의 오전 풍경을 상징하는 곳이라고나 할까.

 

세 개의 큰 물길을 거북이 조각상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조각상의 동세.
아폴론은 태양신이라 동쪽을 가리키는 걸까? 우연히도 천주교 건축물을 정면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 쓸데없이 의미심장하다.
하늘은 더없이 파랗다. 구름도 몽글몽글.

하이드 파크의 북쪽 출구(사실 공원에 울타리라는 것이 마땅하게 존재하지는 않는다)로 나오면 바로 마주치는 다갈색 동상이 있다. 누가 봐도 영국이 여기저기 식민지를 잔뜩 건설하던 시절의 군인일 것 같은 차림을 한 이 남자는 뉴사우스웨일스의 초대 총독인 라클란 맥쿼리Lachlan Macquarie이다. 이 동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서큘러 키 동안까지 쭉 이어지는 대로를 '맥쿼리 스트리트Macquarie St'라고 하는데,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어진 도로다. 시드니의 도시계획을 이룩하고 맥쿼리 스트리트를 따라 뉴사우스웨일스의 주요 관공서를 쭉 지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단다. 

 

길을 건너기 전에, 맥쿼리 스트리트 양 옆으로는 위엄 있는 회청색 동상이 각각 하나씩 서 있다. 빅토리아 여왕과 그 남편인 앨버트 공의 동상이다. 호주 식민지가 '호주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국가화했을 때의 초대 국왕이다 보니 아무래도 시드니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마치 영국 어딘가의 거리를 거닏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 아마도 관공서가 늘어선 시드니 중심가의 시작점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좌) 라클란 맥쿼리 전 총독의 동상. (우) 앨버트 공의 동상.

여기서부터는 그야말로 여기가 영국인가 호주인가 싶을 만큼, 철저히 영국계 지배층을 위해 세워졌던 다양한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다. 맥쿼리 스트리트의 기점에 있는 옛 감옥인 '하이드 파크 배럭스'는 '호주의 교도소 유적들'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건물들 중 하나란다. 조금 더 걸어가면 회색 지붕 아래로 하얗고 길게 뻗은 발코니가 인상적인 길다란 건물이 등장한다. 전형적인 영국 식민지 건축의 모양을 한 이 건물은 뉴사우스웨일스 조폐국이다. '더 민트The Mint'라고만 심플하게 적혀 있는 간판이 제법 강렬한 느낌을 준다.

 

하이드 파크 배럭스Hyde Park Barracks.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 개척 당시, 이 근처에서 노역하던 기결수들을 수용하기 위한 감옥으로 세워졌다.
(좌)퀸스 스퀘어Queen's Square와 '세인트 제임스 성공회 성당'. (우) 뉴사우스웨일스 주 대법원. 퍽 현대적인 건물이다. 호주는 연방제 국가라 주마다 대법원이 있다.
뉴사우스웨일스 조폐국The Mint. 전형적인 영국 식민건축 형태로 지어져 있다. 대만 단수이의 '샤오바이궁'과도 비슷한 느낌이지만 더 크다.
조폐국 담벼락에 피어 있던 이름 모를 예쁜 꽃.

조폐국을 지나서 조금 걸으면 시드니 시립병원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맞은편으로는 청동 첨탑이 인상적인 오래 된 교회 건물이 서 있다. 하나같이 호주스러운 황갈색 벽돌로 외벽을 세운 것이 흥미롭다. 본국 영국에서 일일이 벽돌을 수입하기보다는 근처에서 나는 재료로 직접 벽돌을 구워 만드는 것이 편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영국에서 당시에 수입했던 벽돌이 이런 종류였던 걸까? 영국 말고 다른 나라에서 수입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 본다.

 

(좌) 시드니 시립병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우) 세인트 스티븐 연합교회St Stephen's Uniting Church.

그리로부터 조금 더 길을 따라 걸어가면 조폐국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자주색 기조로 칠해진 영국 식민지풍의 2층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조폐국보다는 조금 더 크고 어딘지 모르게 웅장한 느낌을 주는 이곳은 뉴사우스웨일스 주의회 의사당이다. 왼쪽으로부터 호주 국기, 뉴사우스웨일스 주기, 그리고 호주 원주민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다. 나는 원래부터 큰 도시에 가면 그 동네의 관공서를 흥미롭게 구경하는 다소 희한한 여행 취향을 가지고 있기는 한데, 이렇게까지 뉴사우스웨일스의 식민 역사가 담긴 관공서 건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구경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맥쿼리 스트리트 초반에는 사법부, 여기서는 입법부를 구경했으니 다음에는 행정부만 남았네.

 

뉴사우스웨일스 주의회 의사당의 모습이다. 그 큰 주를 다 관할하기에는 다소 작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뉴사우스웨일스 전체의 인구를 다 합쳐도 800만이다. 서울시 인구가 950만 정도임을 감안하면 서울시의회 의사당이 너무 작아 보인다.
의사당 앞 보도에 장식되어 있는, 여기에 있던 옛 교회를 기리는 동판. 다른 건 모르겠고 이름이 '철의 교회'라 너무 간지나서 한 번 찍어 봤다. 무슨 왕좌의 게임도 아니고 교회 이름 한 번 끝내준다.

주의회 의사당을 지나면 비교적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온통 영국 식민시대의 느낌을 풀풀 풍기는 건축물들만 구경하다가 보니 제법 신선하다.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의 별관이다. 조금 더 걸어가면 마치 그리스 신전처럼 생긴 거대한 황갈색 건물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게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이 본관이다. 무려 100년도 더 된 이 멋들어진 건물이 설립 초기부터 오로지 장서의 목적만을 위해 존재해 왔다는 것이 퍽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고전주의적인 웅장한 구관과 그리스식 신전 건축을 르코르뷔지에 식으로 재해석한 듯한 신관의 조화가 훌륭하다(건축에 문외한이라 다소 헛소리가 섞여 있다). 국가로서의 호주의 역사가 비록 짧기는 하지만, 이렇게 멋진 도서관을 독립하기도 더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내심 부럽기도 하다. 한참을 도서관 건물을 구경하다가, 도서관 앞 대로를 건너 다시 북쪽으로 향한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식민지 시대부터 지금까지 정부관서로 사용되었거나 사용되고 있는 건물들이 즐비하다.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 신관의 모습. 그리스 신전의 기둥들을 재해석한 느낌의 외벽 기둥이 신선하다.
(좌)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 본관.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장식된 거대한 파사드가 위압적이기까지 하다. (우)로고 장식이 너무 멋있어서 볼 때마다 사진을 찍었더니, 나중에 사진 정리할 때 보니까 이 로고만 다른 각도에서 한 네다섯 장을 찍었다.
'영국의사협회 뉴사우스웨일스 지회'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건물. 당시에는 호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리라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뉴사우스웨일스 관방청사Chief Secretary's Office Building. 주지사와 주 내각관방부의 사무실이 위치해 있다. 아직도 명패에는 '식민지관방Colonial Secretary'라고 쓰여 있다. 입구 위에 장식된 영국 왕실의 상징물이 눈에 띈다. 브리지 스트리트로 이어지는 건물의 모서리에는 위로부터 '자비mercy', '정의justice', '지혜wisdom'를 상징하는 여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브리지 스트리트 맞은편에 있는 구 재무부 청사. 지금은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부속건물로 쓰이고 있다.
맥쿼리 스트리트와 브리지 스트리트의 교차로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에드워드 7세의 기마상(우) 앞으로 번화한 시드니의 중심가가 펼쳐져 있다(좌).

맥쿼리 스트리트와 브리지 스트리트가 만나는 교차로에서 서쪽으로 꺾어 브리지 스트리트를 탄다. 열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밥을 먹으러 갈 때도 되었다. 길을 따라 걸어가는 동안에도 흥미로운 빅토리아풍의 건축물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유럽에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지만, 온 사방 천지에 영어만 있는 길거리에서 영국인들이 전성 시대에 세운 유럽풍 건축물들을 지나다니다 보면 희한하게도 유럽 같은 느낌이 난다. 어찌 보면 일석이조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그건 그렇고, 당대의 영국인들은 - 이게 영국인들만의 특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 - 참 건물 자체에다가 글씨 새겨 넣기를 좋아했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를 처음 개척할 때에는 자기들 나름대로 청운의 꿈(?)을 안고 와서, 이 식민지가 영영 영국 땅으로 남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온통 '식민지 어쩌고', '영국 어쩌고'를 새겨 두었겠지만, 지금 와서 외국인의 시선으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자니 어떤 골계미마저 느껴진다. 예전에 우리도 그런 비슷한 게 있었더란다. 조선총독부 청사라는 이름의. 아마도 내 나이 대의 사람들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실제 눈으로 본 기억이 있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좌) 구 NSW 교육부 청사. 코린트식 기둥으로 장식한 발코니가 눈에 띈다. (우) 구 NSW 토지부 청사. 왕의 머리를 나타낸 듯한 조각상 옆으로 '공용 출입구Public Entrance', 그 밑으로는 '토지부Department of Lands'라고 쓰여 있는데, 동아시아인의 시선으로는 왕권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아무리 봐도 효수한 죄인의 머리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호주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브리지 스트리트를 따라 또 한참을 걸어가다가, 이번에는 조지 스트리트와 만나는 교차로에서 다시 북쪽으로 꺾는다. 여기서부터는 익숙한 거리다. 고속도로 고가 아래를 지나 조금만 더 걸어가면 어제도 한 번 온 적 있었던 시드니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s이 나온다. 현대미술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우리 부부가 왜 이 곳을 찾았느냐 하면, 재미있게도 이 미술관에 부속되어 있는 카페테리아가 맛집으로 유달리 소문이 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피시 앤 칩스가 유명하다나 뭐라나. 

 

일단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 카페테리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탄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벌써 카페테리아 안에는 사람이 제법 많지만, 그래도 대기까지 할 정도는 아니다. 노련하게 자리를 안내해 주는 직원의 도움으로 빈 자리를 찾아 앉은 뒤, 직원이 가져다 준 메뉴판을 보면서 고민에 빠진다. 여기서 일단 고른 다음에 카운터로 가서 주문과 계산을 하면 직원이 자리로 음식을 가져다 주는 식의 시스템이다. 주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핑거푸드 위주의 구성이다. 재미있게도 메인 메뉴에 '김치 마요'라는 것이 살짝 눈에 띄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별로 중요한 메뉴는 아니다. 오로지 피시 앤 칩스를 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 곳에 온 것이다.

 

피시 앤 칩스 1인분 외에 무엇을 시킬까가 관건이다. 아까 얘기했던 대로 김치마요가 들어간 프라이드 치킨은 논외(물론 프라이드 치킨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어차피 내일 한국에 돌아갈 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스모크 햄과 치즈가 들어간 키쉬로레인, 캥거루 고기가 들어간 듯한 소시지 요리, 그리고 앵거스 쇠고기로 만든 햄버거 세트 중에서 고르는 거였는데, 이 중에서는 그래도 앵거스 쇠고기로 만든 패티 맛이나 한 번 보자는 느낌이 들어서 그 녀석을 시키기로 했다. 요리는 레모네이드 한 잔과 밀크쉐이크 한 잔을 시켰다. 듣자 하니 감자칩을 밀크쉐이크에 찍어 먹는 게 그렇게 맛있다나(2019년 기준의 이야기이다). 

 

(좌) 이렇게 생긴 메뉴판을 보고 원하는 메뉴를 시키면 된다. (우) 설탕 통과 나이프, 포크, 휴지가 담긴 통. 간단하고 정갈한 구성이다.
(좌) 내가 마신 밀크 쉐이크, (우) 아내가 시킨 레모네이드. 화딱지 나게도 종이빨대를 꽂아 준다. 레모네이드는 그렇다 치고 밀크쉐이크를 이걸로 빨아먹으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결국 컵에 입을 대고 마시고, 빨대는 밑바닥에 남은 쉐이크를 긁어먹는 데 썼다.

요리는 한 10분 가량을 기다리자 나왔다. 자못 평범한 느낌의 감자튀김들 위에 무심한 듯 얹어진 잘 튀겨진 흰살생선, 그리고 단촐한 듯 풍성한 구성을 자랑하는 햄버거. 햄버거는 반 잘라서 둘이 나눠 먹기로 하고, 생선튀김은 개수를 맞춰서 나눠 먹기로 했다.

 

과연 앵거스 쇠고기를 쓴 보람이 있는지 햄버거는 퍽 맛있었다. 육향이 터져 나오는 잘 구워진 패티와 맛있는 야채, 부드러운 빵의 조합이 훌륭했다. 그러나 제법 괜찮은 편이었던 햄버거의 맛을 완전히 압도해 버릴 만큼, 생선튀김이 너무나도 맛있었다. 파삭하게 부서지는 바삭하면서도 딱딱하지 않은, 딱 좋은 느낌의 튀김옷과, 간이 딱 맞으면서도 촉촉하고 탱글한 흰살생선의 맛까지. 완벽한 조화. 튀김을 그냥 한 입 베어 물어도 좋고, 케이퍼가 들어간 아이올리 소스에 찍어 먹어도 훌륭하다. 레몬을 뿌려 먹어도 그럴싸하다. 사실 피시 앤 칩스라는 메뉴 자체에 대해서 그다지 엄청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도 하고 우리 부부도 그랬지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유달리 이 피시 앤 칩스의 맛은 이번 신혼여행에서 먹었던 모든 요리들 가운데 순위권을 다툴 만큼 훌륭하게까지 느껴졌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생각날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 하랴. 그 뒤로 여기저기에서 피시 앤 칩스를 시켜 먹어 보았지만 아직 이 때 먹었던 녀석만큼 우리 입맛에 딱 맞는 피시 앤 칩스를 차마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좌) 아내에게는 이 피시 앤 칩스의 맛이 어떤 이데아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나도 비슷하다. (우) 충분히 맛있었지만 피시 앤 칩스에 눌려 콩라인이 되어 버린 안타까운 햄버거. 그래도 정말 괜찮은 맛이었어.
어쩌면 우리가 느꼈던 그 때 그 맛과 그 때 그 감정의 한 20% 정도는 이 풍경 덕분인지도 모른다. 하버 브리지를 내다보면서 즐기는 한 끼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