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190526 Fiji | Sydney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12. 시드니 마지막 날(3):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 구경과 세인트 메리 대성당에서의 미사, 그리고 호주에서의 마지막 밤

by 집너구리 2022. 10. 3.

* 이 여행기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9년에 있었던 일을 다룹니다.

 

(앞 에피소드는 여기)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11. 시드니 마지막 날(2) : 눈이 번쩍 뜨이는 메시나 아이스크림과 시

* 이 여행기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9년에 있었던 일을 다룹니다. (앞 에피소드는 여기)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10. 시드니에서의 마지막 하루(1) : 하이드 파크에서 맥쿼리 로드를 *

sankanisuiso.tistory.com

시드니 왕립식물원 입구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바로 거대한 그리스 신전풍의 건물이 나타난다. 다만 시드니의 많은 공공건물들이 그렇듯 황적색 벽돌로 덮인 외벽체 덕분에 여기가 그리스가 아닌 호주라는 것은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여기가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Art Gallery of New South Wales이다. 이것 또한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건립된, 말하자면 호주에서 가장 오래 된 미술관들 중의 하나다.

벽면의 장식이 퍽 독특한데, 유명한 화가들의 이름이 벽에 줄줄이 새겨져 있다. 겉에서 보기에 왼쪽 벽면에는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인물들의 이름이, 오른쪽 벽면에는 조금 더 익숙한 지오토나 라파엘로, 렘브란트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의 서양미술이 있기까지 큰 공헌을 한 유명 화가들을 기념하는 명예의 전당 같은 느낌인 모양이다.

 

이런 멋들어진 청동 스핑크스도 있고. 한 쌍으로 되어 있다. 인근의 잔디밭에는 당시에 저런 소형 놀이기구들도 있었는데, 아마도 임시로 전시되어 있었던 것인 모양이다. 지금 위성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없다.

파사드를 정면에서 마주하면 그리스 신전의 느낌이 더욱 확연히 다가온다. 이오니아식 기둥머리에 세모진 문윗장식이 얹혀 있고, 영어로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이라고 새겨져 있는 모습이 제법 웅장하다. 실제로 규모가 있는 건물이기도 하고. 모르긴 몰라도 당시에 이 건물이 세워졌을 때에는 시드니 시내에서도 아주 눈에 띄는 건물이었을 듯하다.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은 특별전시 일부를 제외한 모든 상설전시 관람료가 무료이다. 심지어는 일부 특정 구역만을 제외한다면 플래시 없이 사진을 찍는 것도 허용하고 있다. 절대 전시물의 사진을 찍어선 안 되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던 한국에서 온 관광객 입장에서는 다소 놀라운 관행이다. 주위 사람들이 하나같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나도 자연스레 카메라를 들어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찍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작품들이다.

 

 

 

프레드릭 맥커빈Frederick McCubbin,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86.
고든 커츠Gordon Coutts, <기다림Waiting>. 캔버스에 유채, 1885 추정.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이 'NSW 식민지의 예술 컬렉션을 영구히 보관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건립되었던 만큼, 대부분의 전시품들은 호주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흥미롭게도 작가 약력으로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고, 언제 호주에 왔으며,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에 대한 정보들이 깨알같이 기재되어 있곤 한다.

NSW 식민지 초창기의 초상화 작품들은 당연하지만 대부분 빅토리아풍 복식을 한 인물들을 그리곤 하는데,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동시대 유럽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살짝 색의 선택이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유럽과는 전혀 다른 기후와 지질환경 속에서 나름대로의 타협책을 마련한 것이리라.

WC 피궤니트Piguenit, <1890년 달링의 홍수The flood in the Darling 1890>, 캔버스에 유채, 1890.

달링 만의 홍수를 그린 이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편견일지는 몰라도, 이것이야말로 호주에서 살아 본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회화라는 느낌이 들었다. 황량하고 거칠어 보이는 자연환경, 그것을 똑같이 거칠게 그려낸 필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침'이 '천박함'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잘 짜인 구성과 색채. 마치 1890년 홍수 이후 아무것도 남지 않은 달링 만에 서 있는 듯한 현실감이 빽빽하게 몰아친다.

 

에밀리 메스턴Emily Meston, <포도 연구Study of grapes>, 캔버스에 유채, 1895.

아예 호주에서 태어나고 죽은 화가들의 작품도 당연히 많다. 에밀리 메스턴의 이 포도 그림은 호주의 상징과도 같은 황적색 배경을 바탕으로 잘 익은 포도를 묘하게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아주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손을 뻗으면 따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생생함. 본래 정물보다는 초상화를 잘 그리던 화가였다는데, 정물도 상당히 마음에 든다. 그림 소개글에 적혀 있는, '예전에는 여성들이 그린 커다란 크기의 초상화보다는, 여성들이 으레 잘 그리는 소재라는 편견이 있었던 정물화류만 주로 모으곤 했다'는 낯부끄러운 제들 역사의 고백은 덤이다.

메리 스토다드Mary Stoddard, <땅과 바다로부터From earth and ocean>, 캔버스에 유채, 1889.
E. 필립스 폭스Philips Fox, <미술 학생들Art Students>, 캔버스에 유채, 1895.

멜버른에서 태어나 멜버른에서 세상을 떠난 필립스 폭스의 이 작품은 당시에는 상당히 도발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다수의 여성들이 편한 자세로 서거나 앉아 그림을 그리고, 바닥에는 물감 방울이 지저분하게 흩뜨려져 있는 모습이 '여성적이지 않다'고 지탄을 받았다나. 그러나 결국 이 그림이 살아남아, 당대의 미술학원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작품으로 재평가받으며 주립미술관에 떡하니 전시되고 있을 줄은, 이름조차 잊힌 그 때의 평론가들은 아마 영영 알지 못하리라.

조지 램버트George W. Lambert, <헬렌 보클럭 양Miss Helen Beauclerk>, 캔버스에 유채, 1914.
바실 르뫼니에Basile Lemeunier, <에두아르 드타유의 초상Portrait of Edouard Detaille>, 캔버스에 유채, 1891.
에두아르 드타유Edouard Detaille, <황제 폐하 만세!Vive l'Empereur!>, 캔버스에 유채, 1891.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소작농의 두상Head of a peasant>, 캔버스에 유채, 1884.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오래 된 주립 미술관이라고 해서 반드시 호주 작품만 전시하라는 법은 없다. 이름을 들어 본 화가의 작품이거나, 언젠가 어딘가에서 한 번쯤 봤던 작품을 마주하게 됐을 때의 기쁨은 마치 오래 전 연락이 끊겼던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전철 안에서 만났을 때와 같은 반가움이다. 에두아르 드타유의 <황제 폐하 만세!>는 보불 전쟁을 다룬 책에서 종종 보곤 했던 그림인데, 이렇게 직접 목도하고 보니 정말 무지막지하게 큰 작품이었다. 실제 사람보다 훨씬 크게 그려진 프랑스 기병대원들이 칼을 휘두르며 프로이센 군대를 향해 달려나가는 그 역동감! 가히 압도적이다. 재미있게도 드타유의 동료 바실 르뫼니에가 <황제 폐하 만세!>를 그릴 적의 드타유를 보고 그린 초상화가 같이 전시되어 있어서, '프랑스 최고의 군대화가'라는 평을 받던 드타유의 작업실을 살짝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흐의 '두상 연작' 중 하나인 <소작농의 초상>도 볼거리이다. 커다란 전시실의 한구석에 수줍게 전시되어 있는 작디작은 그림인데, 누가 봐도 고흐의 작품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특유의 터치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그림 설명에 따르자면, 저 유명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인물들 중 하나가 이 작품을 기반으로 하여 스케치되었다고 한다.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Freud, <그리고 신랑은And the bridegroom>, 캔버스에 유채, 1993.

여러모로 상당히 도발적인 작품이라 이걸 글에 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는데, 일단은 실어 두기로 한다. 루시안 프로이트의 <그리고 신랑은>이라는 작품이다. A. E. 하우스만의 시 <슈롭셔에서 온 사내A Shropshire Lad>에서 제목을 따 왔다는 이 작품은 헝클어진 침상 위에 서로를 등지고 누워 있는 나체의 남녀를 그린 작품이다. 크기도 엄청나게 커서 도저히 눈을 피할 수 없다. 과연 그림 설명 그대로, 그림을 보고 있자면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이리저리 상상할 여지가 많아지게 된다. 결혼식 날 밤일까? 여기는 어딜까? 프로이트 자신의 작업실일까? 서로의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모델의 이름은 이미 알려져 있지만, 해설가는 '그들의 이름을 알 필요는 없다. 화가로서의 프로이트의 관심사는 그들이 '누구인지'보다는 그들이 '어떠한 상태이고, 어떠한 관계인지'였다'라고 언급한다.

 

회화 전시실을 나오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시아의 다양한 조각상들을 모아 놓은 전시관이다. 미술관의 아시아 콜렉션에서 엄선했다는, 아시아 여러 문화권의 신상神像들이다.

 

쿠베라 신상, 1500년대, 히말라야 티베트 불교 유물.
(좌) 메이지 시대의 일본식 관음상. (우) 헤이안 시대의 목조 신토 신상들.
청나라 시대의 동방삭 신상. 도교 사원에서 모셔지던 것이다.
필리핀 이푸가오족의 곡물신상. 쌀의 신인데, 오묘한 표정으로 서 있거나 앉아 있다.
힌두교의 지혜의 신, 가네샤 신상.

신상 전시관을 돌아서 나와 본격적으로 현대미술 코너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관내 방송이 나온다. 폐관 시간인 저녁 다섯 시가 다가온다는 안내이다. 허겁지겁 현대미술관을 수박 겉 핥기 하듯 보고 나오려는데, 우리 부부의 발걸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린 작품이 하나 있었다. 

메리 웹Mary Webb, <생의 기쁨Joie de vivre>, 캔버스에 유채, 1958.

우리 부모님과 비슷한 연배에 태어난 작품. 호주를 대표하는 추상화가 메리 웹의 <생의 기쁨>이다. 나로서는 흑백 기록영화 속의 이미지로만 상상할 수밖에 없었던 1950년대 말, 그는 이토록 밝은 색채와 춤추는 듯한 터치로 커다란 캔버스를 채워냈다.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한색의 색상들은 오로지 기쁨만으로만 존재할 수 없는 인간 삶의 이면 같은 것일까? 어떤 자료에는 1917년 멜버른 태생이라고도 하고, 어떤 자료에서는 1901년 시드니 태생이라고도 하는 이 화가의 초반부 인생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면 마치 환희의 노래가 들려오는 것만도 같은 이 그림을 통해, 웹의 인생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혹은 그가 그렸던 '생의 기쁨'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편린이나마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이 그림 앞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네 시 오십오 분이 되어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부리나케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아주 힙스터 느낌이 가득한 비둘기

여기에서 느긋하게 산책하듯 걷다 보면 시드니에서 가장 큰 성당 중 하나인 '세인트 메리 대성당'을 다시 만난다. 오전에 하이드 파크에 들렀을 때에도 마주했던 바로 그 성당이다. 잠시 성당에 딸린 화장실에 들렀다가, 호주에서의 마지막 관광 일정이라고 할 수 있는 미사 참례를 위하여 예배당으로 들어간다. 이 때의 소회를 담은 글은 따로 적어 두었다.

 

 

[세계 성당 방문기] 06. 호주 시드니 대교구 세인트 메리 대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 Saint Mary's Cathedral 등급 주교좌성당(대성당) 소재지 St Marys Rd, Sydney NSW 2000 Australia 관할 천주교 시드니 대교구 찾아가는 길 시드니 메트로 '세인트 제임스St James' 역에서 도..

sankanisuiso.tistory.com

 

미사 후 성당 구경까지 마친 우리는 드디어 호주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위해 길을 나섰다. 성당에서 12분 정도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킹슬리즈 오스트레일리안 스테이크하우스Kingsleys Australian Steakhouse'다. 찾아가기가 다소 어려운 편인데, 아파트 건물 1층 한가운데 아주 작게 트여 있는 개구멍 같은 문간이 있는데, 여기로 들어가면 갑자기 넓은 공간이 뿅 하고 나타난다. 별안간 고풍스러운 돌벽 느낌의 가게 건물이 서 있고 녹색 문에 'STEAKHOLDERS'라고 쓰여 있다. 제법이야.

메뉴는 위와 같다(2019년의 자료이므로 지금은 다소 달라졌을 수 있다). 근데 봐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역시 미식여행을 하기에 가장 필요한 재주는 외국어 능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너무 무리하지 않는 가격 선에서, 그리 크지 않은 고기로 시키자는 방향성을 잡고 나면 그나마 고르기가 좀 쉽다. 둘 다 배가 그다지 고프지 않기도 하고, 저녁에 근처 슈퍼에 가서 안주거리를 좀 사다 피지 맥주라도 나눠 먹는 게 어떨까 싶어 아내는 프티 필레Petite Fillet, 나는 필레 미뇽Fillet Mignon으을 주문했다. 요즘 너무 야채를 안 먹은 것 같아서 가든 샐러드도 하나.

 

Petite Fillet YG
Fillet Mignon with bacon and garlic butter
Garden Salad

전반적으로 상당히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식사였다. 가격만 봐서는 가장 급수가 낮은 고기일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향이 잘 살아 있고 부드럽게 잘 구워져 훌륭했다. 가니시로 나온 매시드 포테이토와 야채 샐러드도 잘 맞았다. 특히 내가 주문한 필레 미뇽에는 갈릭 버터가 같이 나왔는데, 이게 또 한국인의 정서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버터 조금을 잘라 고기와 매시드 포테이토와 같이 먹으면 은은히 퍼져 나오는 마늘 향이 포인트가 된다. 가든 샐러드는 재미있게도 우리가 익히 한국의 고깃집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비주얼의 샐러드였는데, 단적으로 말하자면 적양파와 상추가 주가 된 조합이었다. 뜻하지 않게 호주에서의 마지막 식사에서 호주와 한국의 합일을 느낀 것만도 같았다.

 

즐겁게 식사를 마친 후에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울워스Woolworth 슈퍼마켓에 들렀다. 돌이켜 보면 우리 부부는 해외에 나가서 꼭 그 나라의 슈퍼마켓을 돌아보는 것을 일과로 삼고는 하는데, 피지에서는 당연히 불가능했거니와, 호주에 와서도 아직까지 그럴 일이 잘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일정은 슈퍼 구경이다.

상당히 동아시아인의 민족 감정을 건드리는 괴이쩍은 음식이다. 바닐라 크림 라이스 통조림이라니. 사실 소문에 의하면 영국에는 라이스 푸딩rice pudding이라고 해서 쌀로 만들어 먹는 디저트가 있다고 한다. 이게 그 종류인 모양이다. 

다민족 국가인 호주답게 향신료 코너도 다채롭다. 고춧가루 종류도 이것저것 많이 있고, 덩어리져서 갈아서 써야 하는 홀 넛맥 같은, 한국에서는 요즘에 들어서야 마트에서 종종 볼 수 있게 된 향신료도 있고. 지금처럼 요리에 진심이 되기 전이라, 이 향신료 코너를 찍은 사진을 보고 있자니 '그 때 여기서 뭐라도 좀 사올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델리 코너다. 이렇게까지 가공육이 많았던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가공육이 쌓여 있고, 가격도 저렴하다. 가공육 옆에는 절임요리와 샐러드류가 가능하다. 그 중 대부분이 재미있게도 올리브다. 서구권 사람들이 올리브에 환장한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사실 가장 부러웠던 것은 바로 이곳, 정육 코너의 양고기 진열대였다. 정육점에서 양고기를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한국과는 달리, 목축이 발달하고 양고기 소비량이 많은 덕인지 동네 슈퍼에도 이렇게 온갖 부위의 양고기가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당연하겠지만 값도 저렴한 편이다. 뭐라도 하나 사 갖고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고기는 함부로 사 들고 가면 서슬퍼런 검역을 피할 수 없다. 누가 호주산 양고기 수입해서 우리 집 근처에 양고기 식육점 같은 거 안 내주나. 아주 뻔질나게 드나들 텐데.

이렇게 애들 학원 간식으로 딱 좋을 법한 컵케익 묶음포장도 팔고 있고.

식사용 양산빵 종류도 다양하다. 또르띠야는 물론이고, 중동 쪽에서 먹는 피타나 인도 음식점에 가면 늘 볼 수 있는 난 같은 빵들도 여러 가지 포장지에 담겨 놓여 있다. 심지어는 아예 저탄수 제품이라고 선전하는 녀석들도 있다. 맛이 퍽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한국에서 안 파는 종류의 한국산 컵라면도 있다. 하나에 2달러 50센트라니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가격이기는 하지만. 

방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작게나마 이번 여행의 결산을 해 보았다. 시드니 현대미술관에서 구입한 <시드니의 모든 건물들All The Buildings in Sydney>라는 책은 제임스 걸리버 핸콕이라는 삽화가가 시드니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다양한 건물들의 모습을 스케치한 도록이다. 펼쳐 보니 이번 여행에서 다녀왔던 곳들의 대다수가 정교하면서도 유쾌한 터치로 그려져 있다. 여기도 갔었지, 저기는 어땠지 하면서 시드니 여행을 반추하기에는 딱 좋은 책이다. 

안주로는 세라노 햄과 할루미 치즈, 그리고 피지 비터 맥주가 함께 했다. 아내는 배가 부르다며 채 몇 점을 다 먹지 못하고 술기운이 올라 자리에 누웠고, 나는 짐 정리를 주섬주섬 하다가 햄 한 조각을 주워먹고, 또 사진 정리를 좀 하다가 치즈 한 조각을 잘라 먹고, 창 밖을 내다보면서 피지 비터 맥주를 한 모금 홀짝 하다가 하면서 밤을 보냈다.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한 경험들이 가득해, 이대로 잠들어 밤을 보내 버리기에는 아까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일 아침 비행기는 새벽에 출발해야 한다. 억지로 억지로, 잠을 청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