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190526 Fiji | Sydney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13. 귀국

by 집너구리 2022. 10. 4.

새벽에 눈을 떴다. 나는 대략 네 시쯤, 아내는 네 시 반쯤에 비척비척 일어났다. 짐은 전날 얼추 다 싸 두었으니, 남은 건 대강 얼굴에 물 좀 묻히고 비척비척 일어나 체크아웃 후 전철로 향하는 것뿐이다. 새벽 다섯 시 십오 분경에 공항으로 가는 전철을 타야 한다. 한국 개그만화계에 한 획을 그은 전설적인 작품 <선천적 얼간이들>에서 작가님의 호주 워킹홀리데이 시절 새벽 네다섯 시쯤에 반쯤 좀비 상태로 전철을 타러 가는 묘사가 등장한 바 있는데, 기차역만 다를 뿐 그야말로 그 만화 그대로의 행색이다. 한밤중에 가까운 새벽 다섯 시경, 앞으로 한동안 못 볼 시드니의 밤거리를 걸어 뮤지엄 역으로 향한다.

시드니에 처음 도착했던 날에도 느꼈던 바이지만, 시드니 지하철은 전반적으로(가 본 적은 없는) 런던 지하철의 레거시가 가득하다는 느낌이 든다. 흔히 '라운덜roundel'이라고 불리는 원형 역명판, 런던 지하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MIND THE GAP' 문구, 영국식 지명이 가득한 출구 이름이나 행선지 전광판 등. 열심히 여행을 다니던 지난 며칠 동안은 깊이 있게 관찰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좀더 자세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다니 얄궂은 일이다.

모 위키에 따르자면 시드니 공항으로 가는 객차 중 가끔씩 몇십 년은 된 낡아빠진 기차가 걸리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언제 작성된 정보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2019년 초여름경에 하루에 두세 번씩 뻔질나게 지하철을 타 보면서 경험한 바로는 지금 돌아다니는 객차의 대부분은 신형 2층차인 듯하다. 짐의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에, 전철에 올라타서도 1층이나 2층 객실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간에 대강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시피 했다. 시내에서 공항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기 때문에 이대로도 충분했다.

이윽고 공항 국제선 청사 역에 도착. 여기에서부터 걸어서 체크인까지 가야 한다. 정말 한참을 걷는다. 기억하기로는 하네다 공항도 터미널 한구석에 전철역이 붙어 있어서 세월아 네월아 걸어가야 하는데, 시드니 공항은 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체감이다. 대한항공 체크인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보세 구역으로 들어간다. 언제 기내식을 줄지 모르기도 하고, 너무 일찍 일어난 나머지 배고픔과 졸림이 한데 뒤섞여 도저히 인간다운 기분이 아니었기도 해서 공항에서 대강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를 찾아나섰다. 돌아다니다 발견한 카페 평점을 아내가 검색해 봤는데 나쁘지 않은 평점이어서, 여기에서 식사를 하기로 한다.

아침으로 나는 플랫 화이트 한 잔, 그리고 같이 먹을 수 있도록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한 접시를 시켰다. 센스 있게도 삶은 달걀이 두 개! 호주까지 왔는데 플랫 화이트 한 잔도 못 마시고 나갈 수 없다는 마음에 시켰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뭔가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먹는 라테보다는 조금 더 고소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느낌이다. 새벽 시간에 빈속에 마시는 커피이지만 이건 이것대로 괜찮아. 역시 영국식 아침은 든든함을 위해 먹는 거라더니, 저 접시에 담긴 식사를 둘이서 반 나눠 먹었음에도 제법 속이 든든하니 정신이 좀 든다.

커피 한 잔을 즐기면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점차 동이 터 오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이라(시드니 공항은 심야 운행제한이 걸려 있다)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다소 느긋한 기분으로 비행기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다. 출발 시간이 비행 준비 미비로 인해 10분 정도 늦어지는 등의 사소한 사건이 있었지만, 무사히 비행기 탑승에 성공했다. 이제 현실이 기다리는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시드니 국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일단 상공에서 한 바퀴 유턴을 한 뒤 케언스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를 호주의 동해안.

비행기는 유유히 하늘을 날아간다. 호주의 너른 평야 지대를 지나, 구름이 가득한 어딘가의 하늘도 통과해 간다.

이 때쯤 되니 첫 번째 기내식이 나온다. 시드니에서 인천까지의 비행 시간은 대략 9-10시간 정도 된다. 총 기내식 두 번에 간식 한 번이 나온다. 첫 기내식은 빵과 샐러드, 치즈케이크와 미 고렝 스타일의 볶음국수가 나왔다. 나쁘지 않은 맛. 식사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기내판매 카탈로그를 뒤적거리다가, 음료수 모양의 립밤을 발견하고 고등학생인 처제에게 하나 사다 주기로 했다. 귀여우니까 오케이입니다.

이것은 다소 흥미로운 경험. 아내는 도중에 잠들고, 나는 핸드폰을 만졌다가 책을 봤다가 하면서 깨작깨작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바깥을 내다보았다. 바다 위로 아까 보았던 호주의 지면과 다른 느낌의 육지가 떠올라 있다. 부리나케 항로 정보를 확인해 보니 파푸아뉴기니 상공을 지나고 있다. 앞으로 가 볼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나라의 하늘을 비행기로 지나가는 기분이 제법 묘했다. 파푸아뉴기니를 지나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아서, 한동안 또 딴짓을 하다가 다시 창문을 봤더니 어느덧 우리 비행기가 뉴기니 섬의 북쪽 해안을 지나고 있었다. 이렇게 오세아니아를 완전히 떠나고 있다.

파푸아뉴기니 북쪽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도 지나가고. 아마도 마남 섬Manam Island인 듯하다. 여기를 떠나면 한동안 바깥에는 그저 바다만 가득히 펼쳐진다. 창문을 닫고 잠시 잠을 청한다.

잠시 눈을 붙이고 있다가, 그새 깨어난 아내가 라면을 주문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나를 깨워서 잠이 달아났다. 그래, 언제고 비행기에서 컵라면 한 번은 먹어 보고 싶었다. 승무원 선생님에게 부탁을 했더니 얼마지 않아 가져다 주셨다. 남들 다 자고 있는 가운데 라면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어두운 비행기 좌석에 앉아 먹는 라면은 기가 막혔다. 심지어 나는 신라면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음식 맛의 태반은 분위기에서 온다는 말이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재미있게도 우리가 라면을 시켜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변에서 너도나도 승무원 선생님들에게 컵라면을 부탁하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한국 사람들은 라면 냄새는 못 참는 법인 모양이다. 물론 라면 외에 기본 간식도 나온다. 대한항공은 예나 지금이다 마켓오 브라우니다. 이건 나중에 집에 가서 먹어야지.

오후 네 시쯤 되었을 때 두 번째 기내식이 나왔다. 착륙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서 나온 음식이다. 해산물과 닭고기 중 고르라길래 각각 하나씩 주문했는데, 해산물 식사로는 새우가 들어간 볶음국수가, 닭고기 식사로는 완두콩이 들어간 닭고기 덮밥이 나왔다. 이건 그냥저냥 무난했던 맛인 모양이다. 맛이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마치 닭장에서 사료를 끊임없이 공급받는 닭이 된 마냥 먹다 자다, 먹다 자다 하는 시간이 영겁처럼 계속되는 것 같더니, 어느 새 바깥에 익숙한 풍경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의 신혼여행, 피지와 호주라는 두 나라를 조금씩 맛봤던 즐거운 나날들은 끝이 났다. 인천공항에 내려서 짐을 찾으러 갈 때의 그 헛헛함이란. 심지어 일요일에 도착했기 때문에 바로 내일이면 출근해서 답례품을 돌려야 한다. 이를 어찌하면 좋담. 여행 후 현실로 돌아올 때 느껴지는 압박감이, 묘하게도 신혼여행이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큰 듯한 느낌이다. 나는 분명히 오늘 아침에 시드니 뮤지엄 역에서 전철을 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 집 앞 지하철역 엘리베이터를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꿈이라도 꾼 것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꿈 같은 경험이었으니, 뭐, 아주 틀린 느낌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 지금까지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시리즈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