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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20911 싱가포르

06. 오처드로드 TWG에서의 티타임과 송파바쿠테에서의 저녁 식사, 클락키 보트투어에서 본 싱가포르의 야경

by 집너구리 2022. 11. 14.

 

이순 역에서 싱가포르 MRT 남북선(North-South Line)을 타고 오처드(Orchard) 역으로 향한다. 단순하게 싱가포르 섬의 남북을 한 번 종단할 것 같은 이름이기는 하지만, 남북선은 주롱에서 출발해서 싱가포르 섬을 마치 오메가Ω 모양으로 주행하는 괴이한 선형의 노선이다. 앙모키오(Ang Mo Kio) 역까지 줄곧 고가선로를 달리다가 시내에 가까워지면 본격적으로 지하 구간으로 돌입한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싱가포르 교외의 경치를 전차 안에서 구경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위 사진에 나와 있는 로워 슬레타 저수지(Lower Seletar Reservoir) 같은 광경 말이다. 싱가포르 초심자라면 으레 싱가포르의 이미지를 도시 관광지로서만 생각하기 쉽고 나 또한 그런 초심자 중 하나였으나, 은근히 이렇게 자연 보호 구역이 많은 동네다. 이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섬 안에 정말 웬만한 건 다 있다.

오처드 역은 싱가포르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은 들르게 되는 쇼핑몰 구역인 '오처드 로드(Orchard Road)'에 있다. 이름만 봐서는 퍽 목가적인 광경이 예상되지만(영어 '오처드Orchard'는 과수원이라는 뜻이다) 실제로는 온통 정신없는 상업지대이다. 원래는 오처드 로드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살 것이 있으면 살까도 생각했는데, 돌아다니기는커녕 둘 다(특히 아내의) 다리가 땡땡 부어올라 그냥 좀 쉬는 게 낫겠다 싶어 찻집을 가기로 했다. 싱가포르는 TWG 티룸이 여기저기 있어서 차를 한 잔 곁들이며 쉬기 좋다. ION 오처드 쇼핑몰에 있는 TWG 티룸으로 향한다. 시간은 서너 시를 갓 넘긴 무렵. 사람이 적지도 많지도 않을 듯한 평일 시간대이다.

 

 

1837년이라는 연도를 상당히 강조하고는 있지만 TWG가 설립된 것은 1837년도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상당히 최근인 2008년도에 창립되었다고 하지만, 고급화 전략이 제법 먹혀들어간 모양인지 TWG 티 하면 한국에서도 제법 인지도가 많기는 하다(트와이닝Twinings의 짝퉁 취급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TWG 티룸도 한껏 고급진 느낌을 내기 위해 노력한 티가 난다. 사실 태국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에 가면 이렇듯 갖가지 상품들로 가득한 쇼핑몰 한가운데에 혼자 고고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TWG 티룸을 왕왕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다지 낯선 풍경까지는 아니다.

아무래도 대기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엄청 오래 기다리지는 않는다. 시간이 살짝 애매한 덕에 다들 차 한 잔만 마시고 가거나, 아니면 티푸드를 살짝 곁들인 정도의 티타임을 갖고 떠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대기하면서 확인한 바로는 본격적으로 애프터눈 티 세트 같은 것을 주문해서 먹고 마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티에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다양한 핑거푸드는 물론이고,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차 이름이 가득한 메뉴판도 볼거리다. 

물론 이렇게 찻잎 선물세트와 각종 다구를 선물용으로 팔고 있기도 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집에는 웬만한 다구는 갖춰져 있고 거기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다. 보이차는 아직 집에 많기도 하거니와 굳이 TWG 브랜드를 사기보다는 망원동에 있는 보이차 전문점에 가서 차 한 잔 얻어먹고 추천받는 것이 낫지 싶기 때문이다.

한 5분쯤 기다린 끝에 자리에 앉는 데 성공했다. 당시만 해도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곳이 싱가폴 등 몇 안 되기 때문이었는지, 바로 옆자리 사람들도 우리처럼 한국인인 다소 미묘한 경험을 했다. 아내는 오렌지 뭐시깽이(정확한 명칭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를, 나는 모처럼 말레이시아 근처에 왔기도 하니 말라카 골드를 시켰다. 홍차는 웬만해서는 따뜻하게 마시는 것을 선호하는 나는 따뜻하게, 아내는 더위에 지쳤기 때문에 아이스로. 덧붙여 스콘 세트도 시켰다. 홍차를 마시러 왔는데 스콘이 빠지면 섭섭하지.

주위에 사람들이 계속 왔다갔다하다 보니 살짝 정신없긴 했는데, 식사하러 가기 전 애피타이저를 겸한 휴식 시간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아내의 차는 어쩐지 느끼한 느낌이 들어서 그다지 우리 입맛에 맞지는 않았는데, 내 말라카 골드는 제법 정석적인 홍차 맛이라 좋았다. 스콘과 잼의 합도 괜찮았지만, 크림이 클로티드 크림이 아닌 그냥 생크림이었던 점이 다소 아쉬웠다. 차 한 잔에 만 원 정도 할 것 같으면 기왕이면 크림도 좀 괜찮은 것을 써 주시면 좋았을걸. 

한 시간 정도 느긋하게 티룸에 앉아서 차를 홀짝거리며 사진 정리도 하고 도란도란 얘기도 하다가, 식사를 하기 위해 다시 전철역으로 향했다. 세 정거장을 가서 시청(City Hall) 역으로 향한다. 도시국가에 웬 시청이냐 싶었는데, 독립 이전까지 영국 식민지로서 싱가포르 시청이 있던 곳이라서 아직도 동네 이름이 '시청'인 듯하다. 당시의 싱가포르 시청 건물은 지금 싱가포르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Singapore)으로 쓰이고 있단다. 고젝 광고를 하고 있는 친숙한 얼굴들을 지나 밖으로 나간다.

이름과는 달리 싱가포르 구 시청사보다 더 먼저 우리를 마주하는 것은 고풍스러운 느낌의 성당 건물이다. 성공회 주교좌 성당인 '성 앤드류 대성당'이다. 일전에 시드니 여행을 갔을 때도 느꼈지만, 행정 중심가 근처에 잉글랜드의 국교인 성공회 주교좌가 붙어 있는 것은 영국 식민지의 전통 아닌 전통 같은 것인 모양이다. 시드니 시청(Sydney Town Hall) 바로 옆에 있던 성공회 주교좌 성당도 마침 이름이 성 앤드류 대성당이었다. 안드레아 성인을 도대체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흑과 백으로 멋지게 장식된 고딕 양식의 성당 건물이 상당히 멋있어서 한 번 구경을 가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내부 수리 중이라 지금은 못 들어간단다. 

싱가포르 강을 향해 남서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유독 관공서스러운 느낌을 풀풀 풍기는 건물 하나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싱가포르 국회의사당(Parliament House)이다. 총리가 실권을 휘두르는 의원내각제 국가인 싱가포르에서는 사실상 가장 중요한 정부기관 중 하나이다. 한국 국회의사당처럼 강을 면해 세워져 있고, 주위로 온갖 금융기관의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어 사뭇 익숙한 느낌마저 든다. 이 뒤쪽에 있는 구 국회의사당인 아츠 하우스(The Arts House)는 싱가포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건물이라고 하는데, 거기까지 구경하지는 않고 바로 다리를 건너 식사를 하러 가기로 한다. 

싱가포르 만을 끼고 쭉 늘어서 있는 식당가인 보트 키(Boat Quay)와 싱가포르 국회의사당 앞을 잇는 다리의 이름이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이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들을 가져다가 영국박물관에 전시한 것으로 악명 높은 영국의 정치가 7대 엘긴 백작의 이름과 똑같은 '엘긴 다리(Elgin Bridge)'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찾아보니 정말로 연관이 있는 이름이다. 정확히는 문제의 엘긴 백작 본인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닌, 그의 아들이자 인도 총독을 지낸 8대 엘긴 백작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기실 8대 엘긴 백작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로부터 홍콩을 할양받은 장본인이니 여러모로 느낌이 미묘하긴 하다. 

엘긴 다리를 건너오면 보트 키로 이어지는 뒷골목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 곳의 풍경이 퍽 멋있다. 에어컨 실외기가 가득한 다분히 홍콩다운 뒷골목을 지나, 다양한 식당과 주점이 즐비한 이면 도로 앞에서 한 번 더 길을 건너면 오늘 저녁 식사를 할 송파 바쿠테로 이어지는 길목이 나온다.

 

 

한국인들이 '송파구에 있는 바쿠테 집'이라고 농담삼아 말할 정도로 한국인에게는 이름이 짜한 맛집, 바로 이곳이 송파 바쿠테(Song Fa Bak Kut Teh)이다. 한자를 풀어보니 '송파'는 소나무松가 발흥한다發는 뜻이다. 중국식으로 읽어 발음이 '송파'가 된 모양이다. 바쿠테肉骨茶라는 이름을 풀어 보면 '고기와 뼈를 끓여낸 것'이라는, 다분히 직관적인 이름이다. 돼지고기를 뼈와 향신료와 함께 푹 고아내서 만든 일종의 국물요리인 셈이다. 여기가 그렇게 한국인들에게 잘 먹히는 맛이라면서요. 그렇다면 궁금해서라도 와 보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도 다소 이른 시간에 와서 그런지 대기 없이 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주문은 테이블에 있는 QR코드를 찍어서 인터넷으로 넣는 형태이다. 앞서 물티슈 두 장과 잘게 자른 홍고추 한 접시를 받았는데, 싱가포르에 오면 물티슈 하나 땅콩 한 접시에도 돈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레 겁먹고 돈을 받는 거냐고 물어봤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단다. 고추 소스와 간장 같은 것도 같이 놓여 있었지만, 일단은 본연의 맛을 즐겨 보기로 했다. 일반 바쿠테 하나, 목살이 들어간 바쿠테 하나, 그리고 야채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 청경채볶음을 하나 시켰다. 물론 공깃밥도 두 개.

호쾌하게도 껍질도 안 깐 마늘이 통으로 들어 있는 돼지고기 국물이 어쩐지 정겹기까지 하다. 동남아시아다 보니 싱가포르의 쌀밥은 풀풀 날리는 안남미로 지은 밥이지만, 고슬고슬한 밥이라고 생각하고 국물에 말아 먹으니 이건 이것 나름대로 괜찮다. 아니 국물이 너무 맛있는데? 고기 누린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뒤에 살짝 치고 올라오는 돼지고기 냄새에 다소 당황할 수 있겠으나, 돼지고기 국물을 환장할 정도로 좋아하는 나와 아내에게는 오히려 이 정도의 야성미는 환영이다. 청경채 볶음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이 다소 아쉬웠지만, 바쿠테 자체는 정말 맛있었다. 싱가포르에 며칠씩 있었던 사람들이 한식이 그리워졌을 때쯤 해서 여기 오면 딱 좋을 것 같다. 다만 홍고추는 굳이 먹고 싶다면 조금씩만 쳐서 먹을 것. 역시 동남아 고추라 그런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맵다. 아내는 별 생각 없이 서너 점을 넣어 먹다가 마지막에는 매우 매워했다. 나는 오히려 매운 것을 잘 못 먹기 때문에 한두 조각만 넣고 먹었더니 딱 좋을 정도로 시원한 맛이 나서 기분이 좋았다. 정신없이 흡입한 뒤, 나중에 집에서 직접 해 먹을 요량으로 바쿠테 스파이스를 서너 박스 구매하기까지 했다. 이 집 잘 하네.

송파 바쿠테 앞에 있는 이것은 놀랍게도 즉석에서 오렌지 착즙 주스를 만들어 주는 자판기이다. 싱가포르의 거리를 거닐다 보면 상당히 자주 발견할 수 있다. 한 잔에 싱가포르 달러로 2달러니까 한국 돈으로는 약 2천 원 정도다. 생각보다 가격도 퍽 괜찮은 편이다. 호기심에 한 잔 내려서 마셔 보았는데, 생각보다 시원하지 않다는 것만 빼면 상당히 싱싱하고 괜찮다. 날씨도 더운데 조금 더 시원하게 해 주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 같은데 냉장 설비를 넣지 않은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다. 

구 힐스트리트 경찰서 건물(Old Hill Street Police Station). 9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식민지 건축물이다.
콜먼 다리(Coleman Bridge)에서 바라본 엘긴 다리와 국회의사당, 그리고 저 너머에 보이는 마리나 베이 샌즈(Marina Bay Sands).
클락 키(Clarke Quay)의 저녁 모습.

여기저기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키(Quay)'라는 단어는 대강 부둣가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실제로 '키'라는 이름이 붙은 지명들은 대부분 옛날에 실제로 선착장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항구도시 싱가포르도 역시나 여기저기에 선착장 자리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클락 키(Clarke Quay)이다. 두 단어를 떼어 놓고 보면 '클라크 키'라고 표기해야 할 것 같지만 아무도 그렇게 발음하지 않으니 그냥 클락 키라고 쓰도록 하겠다. 여기도 상당한 규모의 상업지구가 형성되어 있는 곳인데, 북쪽 강가에 리버크루즈 선착장이 있다고 해서 여기에서 뱃놀이나 한 번 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더 이상 걷기에는 둘 다 지쳤기도 하고, 배를 타면 적어도 앉을 자리는 있겠지 싶었던 것이다. 일곱 시 반경에 배가 출발하면 여덟 시에 시작하는 마리나 베이 샌즈의 레이저 쇼를 짧게나마 볼 수 있다고 해서 일단 그 시간에 탈 수 있도록 표를 구매하고 줄을 서기로 했다. 이 동네는 바가 많은 모양인지,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는 가수들의 노랫소리와 잔뜩 신이 난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정신 없어. 인싸들의 감성을 이해하기란 역시 쉽지 않다.

 

 

이 티켓 가판대에서 티켓을 구매하기 앞서, 바우처 구매 앱에서 교환권을 구매하면 비교적 빠르게 티켓을 살 수 있다. 줄이 훨씬 짧다.
타오르는 붉은빛 노을을 잠시 감상하시겠습니다.
...이윽고 완전히 밤이 찾아왔다.

배가 몇 시에 출발하는지 정확히 알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구글링해 보니 대강 15분에 한 번씩 배가 출발하는 모양인데, 실제 티켓 부스에는 배 시간이 전혀 적혀 있지 않다. 결국 줄을 대강 눈치 보면서 서 있다가 앞 사람들을 조금씩 먼저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가족 단위의 여행객이 벌써부터 상당히 많은 듯, 우리 앞뒤로 삼삼오오 모여 배 시간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제법 보였다. 개중에는 물론 영어를 사용하는 관광객들도 있었지만, 한국어도 심심찮게 들렸다. 이거 불안한데. 배 타면 다 한국인인 거 아냐? 

 

그런데 슬픈 예감은 왜 틀리는 적이 없는지. 우리는 운 좋게도 가장 먼저 배에 올라탈 수 있었는데, 배 가장 뒷전에 있는 좋은 자리에 올라타자마자 여기저기에서 한국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우리 옆, 건너편, 맞은편 모두 한국인인 것 같았다. 아무리 싱가포르가 한국인들 여행하기에 가장 편한 나라였다지만 이건 다소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다. 일전에도 여러 번 얘기한 바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해외 여행에서 한국인의 밀도가 높은 것을 다소 견디기 어려워한다. 별달리 동족혐오 같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외국에 온 느낌을 오롯이 즐기고 싶은 마음이 강하기 때문인데, 이래서야 그냥 한강유람선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 별수없이 우리는 최대한 야경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아내는 이미 싱가포르에 오면서 새로 산 오즈모 짐벌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진 찍을 만전의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가 탄 보트는 싱가포르에서 옛날부터 사람들이 늘상 타고 다니던 전통 선박인 범보트(Bumboat)의 형태를 하고 있다. 커다란 곤돌라 같은 느낌의 배 위에 캐노피가 있고, 배의 이물과 고물은 뻥 뚫려 있는 형태의 선박이다. 누가 크루즈 아니랄까 봐 관광 포인트에 도달할 때마다 각 포인트의 역사와 이름의 유래 같은 정보들을 안내방송으로 열심히 틀어 준다. 아내는 좀 조용히 구경하고 싶어하는 티가 역력했지만, 나는 무척 흥미롭게 들으며 야경 구경을 했다.

클락 키의 터닝포인트. 우리가 탄 범보트(Bumboat)는 여기쯤에서 반 바퀴 돌아 본격적으로 싱가포르 강을 따라 하구로 나아간다.
낮에 봤을 때와는 또 다른 화려함을 자랑하는 구 힐스트리트 경찰서 건물.
이것이 싱가포르의 불야성입니다. 이제 퇴근합시다 여러분...
보트 키(Boat Quay)의 야경. 역시 물가에 비친 불빛의 모습은 최강으로 아름답다. 
구 국회의사당이자 싱가포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건축물인 아츠 하우스(좌), 그리고 아시아 문명박물관(우). 
퇴근...퇴근합시다 여러분
아시아 문명박물관을 끼고 돌면서 뒤쪽으로 보이는 보트 키의 전경. 야트막하게 세워진 강변 가게들의 불빛이 아름답다.
싱가포르 강에 뛰어드는 소년들을 묘사한 유명한 조각 '더 퍼스트 제너레이션The First Generation'.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 것이 아쉬웠다.
싱가포르의 유일한 현수교인 카베나프 다리Cavenagh Bridge.
앤더슨 다리Anderson Bridge의 야경. 싱가포르의 영어식 명칭이 보통 그렇듯 해협 식민지 총독 앤더슨의 이름을 땄다.
에스플러네이드 대교Esplanade Bridge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마리나 베이로 진입한다. 대관람차인 싱가포르 플라이어가 보인다.
풀러튼 호텔The Fullerton Hotel과 머라이언Merlion의 전경. 설명에 의하면 싱가포르 정부에 의해 공인된 '진짜' 머라이언은 딱 네 개 있다고 한다. 이 녀석이 바로 그 중 원조다.
마침내 마리나 베이 샌즈Marina Bay Sands의 전경을 마주했다. 인간이 이런 건축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에스플러네이드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푸른색 경사면처럼 보이는 것은 수상 경기장인 더 플로트The Float이다.
풀러튼 권역에 있는 구 세관Customs House. 지금은 식당 및 쇼핑센터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아직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스탠다드차타드StandChartered 은행 사옥. 이쯤 되면 퇴근하라는 소리도 다소 민망스럽기까지 하다.
잔잔하기 짝이 없는 마리나 베이를 둘러싼 건물들의 야경. 낮은 옛날 건물들과 높디높은 현대의 고층 빌딩의 조화가 뛰어나다.
'빅 두리안The Big Durian'이라고도 불린다는 에스플러네이드 극장The Esplanade. 바로 별명을 납득할 수 있는 생김새를 하고 있다.
마리나 베이 샌즈와 아트사이언스 뮤지엄의 전경.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꼭 저 꼭대기 수영장에 가 봐야지.

우리를 태운 보트가 마리나 베이를 한 바퀴 돌았을 때쯤, 드디어 마리나 베이 샌즈에서 뭔가 빛기둥 같은 것이 쏘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게 레이저 쇼의 시작인 모양인데, 아쉽게도 우리 배는 이미 마리나 베이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뒤로 엄청나게 화려한 느낌의 레이저 쇼가 보였는가 하면 사실 그것도 아니었다. 레이저 쇼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구경하지 못하게 된 것은 살짝 아쉽기는 했지만, 야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나머지 크게 불만은 없었다. 아내의 개인적인 감상에 의하자면, 싱가포르의 건물들이 홍콩이나 시드니의 건물들보다 불이 좀 덜 켜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싱가포르의 잔업 비중은 생각보다 낮은 편이라고 한다. 남의 잔업을 구경하면서 잔업하지 말고 집에 좀 들어가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취하기는 했으나 이 얘기를 듣고 나니 다소나마 마음이 놓인다.

우리를 태워 줬던 고마운 범보트.

30분 남짓의 즐거운 리버 크루즈를 마치고, 조금이나마 에너지가 충전된 우리는 느긋하게 밤의 싱가포르 강을 건너 클락 키 전철역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동북선을 타고 패러 파크 역으로 돌아간다. 들어가는 길에, 지하 상가에 있는 슈퍼인 '페어프라이스'에 잠깐 들렀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현지 슈퍼 구경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 

원예의 도시 싱가포르쯤 되니까 마트에서 파는 관엽식물의 종류도 장난이 아니다.
다양한 향신료를 보고 있자면 기분이 참 좋그든요.

과일 코너에서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에 먹을 과일로 파파야와 용과를 좀 산 뒤, 마트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무엇을 파는지 이것저것 구경했다. 역시 화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 그런지, 식육 코너에 돼지 염통 같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팔고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사진은 일부러 올리지 않았다). 관엽 식물도 한국 마트에서 파는 간단한 종류는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다양한 종류가 팔리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몬스테라와 스킨답서스는 팔리고 있지 않았는데,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잡초처럼 자라고 있는 풀이라 영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우리 부부가 돌아보고 싶었던 곳은 역시나 향신료 코너다. 아니나다를까 중화식 향신료를 비롯해서 말레이시아식 음식에 들어가는 향신료, 페이스트, 각종 조미료 등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다만 아직 싱가포르에서의 본격적인 식사는 딱 세 끼밖에 하지 않았고, 앞으로 이것저것 더 먹어 본 뒤에 뭘 살지를 정하자는 요량으로 일단은 구경에만 만족하기로 했다. 호텔 방에 들어와서는 파파야를 즐겁게 까 먹은 뒤, 걸레짝처럼 늘어지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샤워를 한 뒤 이불 속에 파묻혔다. 지쳤지만, 즐거운 하루가 이렇게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