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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20911 싱가포르

08. 낮의 싱가포르 구도심 산책과 음료가 제일 맛있었던 점심식사, 그리고 차임스로(3일차-02)

by 집너구리 2023. 1. 14.

싱가포르는 참 꽃이 아름다운 도시다. 늘여름의 나라라서 그런가 어딜 가든 본 적 있는 꽃 본 적 없는 꽃을 막론하고 한 번은 길거리에 핀 예쁜 꽃을 구경할 수 있다. 요 녀석은 이파리는 망고같이 생겼는데 전혀 상관없는 협죽도과의 '플루메리아'라는 꽃이란다. 여름의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은 아름다운 꽃이다.

 

느긋하게 길거리를 걸어 점심 식사를 하러 간다. 아르메니아 성당에서 보트 키 쪽으로 나가면 되는데, 식당이 여는 시간에 비해 시간이 좀 과하게 남았다. 다리가 아프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길가에 딱히 앉아 있을 만한 곳은 없다는 것이 이 시점에서는 주된 문제이다. 이럴 때는 조선 시대 양반에 빙의해서 최대한 천천히 경치 구경이라도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자고로 양반은 뛰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 어디 신가파新嘉坡 저잣거리 유람이나 떠나 보자꾸나. 걷는 김에 사진을 하도 많이 찍은 관계로 이번에는 사진 위주로 주석을 다는 느낌으로 글을 적어 보고자 한다. 자료에 주석 달기라니 이 또한 그야말로 양반이 할 법한 일이다. 팔자 좋다는 뜻이다.

클락 키에서 바로 내다보이는 무지갯빛 창살로 유명한 '구 힐스트리트 경찰서' 건물 앞을 지난다. 여기는 지금은 정부 부처로 사용되고 있는 모양인지, 정문 앞에 '문화공동체청소년부', '커뮤니케이션 및 정보부'라고 쓰인 멋없는 현판 두 개가 붙어 있다. 대강 이 건물의 역사에 대해 적은 전시자료도 훑고 넘어간다. 낮 열한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인데도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 이 건물 현관에 잠깐 들어가 햇볕을 피하며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우리 말고도 몇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콜먼 다리를 다시 건넌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낮의 클락 키는 너무나도 조용해서 어제의 그 정신없는 곳이 맞나 싶다. 하긴 밤 장사가 더 성한 동네는 다 비슷비슷한 느낌이다.

어제 식사하러 왔던 송파바쿠테 앞에서 길을 다시 건너 조금 들어가면 보트 키의 뒷길인 서큘러 로드로 나온다. 여기는 좀더 고풍스러운 엘긴 다리 쪽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여기에서 중심가 쪽을 돌아보고 찍었더니 뭔가 비행접시마냥 생긴 건물이 하나 찍혔다. 저게 싱가포르 대법원 건물이라고 한다. 저렇게 힙한 대법원은 생전 처음 봤다.

어제도 한번 지나갔던, 야트막한 상점 건물들이 늘어선 이면도로를 잠깐 지나서 강가 쪽으로 나가 본다.

그러면 이런 광경이 나타난다. 여기가 보트 키다. 물론 여기도 아까의 클락 키처럼 늦게 여는 가게들이 많아 퍽 조용하다. 이런저런 외국 식당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특히 일본식 이자카야가 많다는 느낌이다. 보도를 사이에 두고, 각 건물 1층에 세들어 있는 가게들의 좌석이 보도 맞은편에도 천막이나 가건물의 형태로 펼쳐져 있다. 싱가포르 강가를 바라보면서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기에 딱 좋을 특등석들인 모양이다. 밤에 오면 에지간히 정신 없을 듯하다.

(좌) 싱가포르 국회의사당, (중) 구 국회의사당(아츠 하우스), (우) 아시아 문명박물관. 모두 싱가포르 근현대사의 시작을 함께 한 건물들이다.
영국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과 현대적인 철근콘크리트제 마천루들의 대비가 극명하다. 그 가운데로 내다보이는 마리나 베이 샌즈가 인상적이다.
보트 키의 수많은 강변 가건물들 사이로 내다본 부두의 모습이 장관이다. 저게 다 식당의 특등석 좌판들이다.
생각보다 물이 더럽지 않아서 다소 놀랐다. 작은 물고기들이 여럿 부둣가를 헤엄치고 있었다.
보트 키 남쪽에서 내다본 싱가포르 구시가지. 현대적 건물과 옛 건물의 조화는 언제나 훌륭하다.
보트 키의 연혁을 설명하는 안내문.
보트 키의 가장 끄트머리까지 걸어왔다. 전형적인 페라나칸 스타일의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보트 키의 강변길은 기껏해야 600미터 정도 되는, 그리 길지 않은 길이다.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 번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밤의 관광선을 타고 구경했을 때의 휘황찬란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야말로 보트 키의 진면목이겠지만, 손님이라고는 없는 오전 시간의 보트 키는 오히려 강변에 늘어선 건물들 자체를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어서 나름대로 괜찮았다. 싱가포르 강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건물군들의 모습을 둘러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 포인트이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머라이언 공원이기는 한데, 아내의 발 상태가 그리 좋지 않기도 하고 슬슬 점심식사 예정인 가게의 개점 시간이 다가오기도 해서 일단 여기에서 발걸음을 돌리기로 한다.

 

오늘의 점심식사는 만두 가게인 '덤플링 달링(Dumpling Darlings)'에서 하기로 했다. 점심으로 뭘 먹을지 구글지도를 켜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정한 곳이다. 이름부터 '덤플링'이라고 쓰여 있으니 만두나 원 없이 먹어 볼까 하는 심산으로 가게를 찾았다. 다소 현대적인 느낌의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점심 시간이라고 '런치 스페셜'을 주문할 수 있다면서 종이 메뉴판과 연필을 가져다 주었다. 낯선 싱가포르의 음식점에서 느낄 수 있는 김밥천국의 향수. 우리가 영어가 짧아서 점원이 하는 말을 백 퍼센트 다 이해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한 사람당 음료 하나에 만두 하나, 메인 메뉴 하나는 시켜야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까지 시키면 배가 부를 것 같은데... 싶기는 했지만, 어쨌든 골라 보기로 한다. 아내는 자몽 타임 그린티 한 잔에 구운 만두, 버섯 미소비빔면 한 그릇을 시켰고, 나는 패션후르츠 진저 티에 물만두, 그리고 양념돼지고기가 올라간 비빔국수를 시켰다.

결론적으로 봤을 때 이 가게의 음식 자체는 객관적으로는 괜찮은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음료가 정말 맛있었다. 날씨가 워낙에 더워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청량하고 새콤달콤한 느낌이 모두 최고였다. 패션후르츠와 생강이 이렇게 어울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자몽과 그린티는 나름대로 어울릴 거라는 추측이야 했는데 타임이 들어가니 또 다른 느낌이 난다. 방금까지 흘렸던 땀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다. 상큼한 과일을 써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시럽이 분명 제법 들어갔을 텐데도 그렇게까지 달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음식의 경우에는 뭐랄까, 우리가 여행에서 지향하는 식사에서는 다소 일탈했던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는 제법 어레인지가 잘 된 동아시아식 식사였다. 특히 버섯 미소비빔면이 정말 괜찮았다. 그러나 주문하고 나서 제일 먼저 나온 음식이 한국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콩나물무침이었던 시점에서 '아, 잘못 들어왔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물론 나도 좋아하는 반찬이기는 한데, 이걸 굳이 여행 와서까지 식당 밑반찬으로 먹고 싶지는 않거든. 면 요리는 다분히 일본식 마제소바를 지향하고 있었고, 구운 만두는 일본식으로 구운 교자, 물만두는 중국식으로 삶은 물만두의 느낌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중일 삼국의 음식을 적절하게 어레인지해서 제법 괜찮은 맛으로 만들어 내놓고 있는 식당이기는 하지만, 싱가포르까지 와서 이만큼의 돈을 들여서까지 먹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내가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야 매력적인 식당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아, 음료는 정말 맛있다. 적극 추천한다.

약간 아쉬운 식사를 마치고, 다시 엘긴 다리를 건너서 중심가로 나선다. 중심가의 관광명소 중 하나인 차임스를 둘러본 뒤 그 근처의 싱가포르 주교좌 성당에서 미사를 참례할 요량이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위 사진처럼 생긴 거대한 관광버스 같은 것이 지나간다. 보아하니 수륙양용차 비슷한 차량을 관광버스로 개조해서 시내 투어를 하는 모양이다. 역시나 버스에도 관광객이 많이 타고 있다. 승객들이 우리를 포함해서 횡단보도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기에, 현지인이 아닌 우리도 일단은 손을 흔들어 줬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어제도 지나갔던 시티 홀 역 앞 거리를 걸어서 차임스로 향한다. 세인트 앤드류 성당을 지나서 캐피톨 호텔 앞으로 두 번 횡단보도를 건넌 뒤, 보도를 따라 북서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반지하로 내려가는 어두운 통로 하나가 나온다. 차임스 권역으로 들어가는 여러 출입구 중 하나인 모양이다. 안에는 아래 사진과 같은 안내판들도 서 있다.

'차임스'라는 발음만 들었을 때에 섣불리 상상하기 어려운 'J'가 뜬금없이 철자에 들어가 있는 이유는, '차임스CHIJMES'라는 이름 자체가 줄임말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성스러운 아기 예수 수녀회 중등학교(Convent of Holy Infant Jesus, Middle Education School)'의 약자를 영단어 발음법으로 읽으면 '차임스'가 되는 것이다. 바로 길 건너에 싱가포르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 있고, 조금 더 북동쪽으로 나가면 천주교 성당이 두 개나 더 있는 그야말로 가톨릭 밀집 구역이다 보니 이렇게 대규모의 수녀원 겸 학교 겸 고아원이 있었다는 것도 납득이 된다. 여기 있던 수녀회와 학교는 외곽의 주거단지인 토아 파요 쪽으로 이전했고, 건물만 남아 있던 것을 대대적으로 상업 구역으로 탈바꿈시킨 것이 지금의 차임스라고 한다.

(좌) 학교 겸 고아원 건물로 쓰였던 권역. (우) 차임스 홀(구 수녀회 성당)의 모습.
차임스 권역의 어느 식당 의자에 걸터앉아서 보는 풍경. 눈앞의 울타리 너머로는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과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차임스 홀의 내력과, 2차 대전 당시 수녀회가 겪었던 일을 서술한 안내판.
차임스 홀의 전경. 앞에 튀어나와 있는 제단부 밑으로 지하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 무척 흥미롭다. 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차임스 권역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이자 조지 D. 콜먼의 작품인 콜드웰 하우스(Caldwell House).
조경수에 반다(Vanda sp.)속의 난초가 잔뜩 붙어 있다. 싱가포르는 어딜 가든 길거리에 이렇게 난초로 꾸며 놓은 나무들이 많다.
차임스 홀과 콜드웰 하우스를 묶어서 국가기념물로 지정했다는 표지.

차임스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곳이었다. 경건하기 짝이 없는 곳이어야 할 수녀회 건물을 국가가 사들여 상업지구로 리모델링했다는 사실 그 자체도 신기하게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이 공간 자체를 둘러보면서 순간순간 찾아오는 유쾌한 위화감 같은 것이 있었다.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면 19세기 말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종교건축물이 있는데, 또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일본 라멘집이나 샐러드 집 같은 크고 작은 식당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회랑이 보이는 것이다. 고즈넉하고 경건했을 옛날의 정취를 느끼다가도 어느 순간 21세기의 현실로 멱살 잡혀 끌려오는 듯하달까.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 진을 치고 있던 상인들과 도둑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했는데, 되려 모양새로서는 성전 건물이 세속에 물들어 버린 셈이니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싱숭생숭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싱가포르라는 나라 자체가 원래 있던 것들을 최대한 살려서 활용하는 방안 이외의 선택지를 오랫동안 가지지 못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형태의 '재활용' 또한 나름대로 납득이 간다. 덮어놓고 부수고 새 건물을 지었다면 그저 그런 중심가의 한 블록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오히려 이렇게 재활용함으로써 신선한 느낌을 주는 관광지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열심히 사진을 찍는 젊은 관광객들을 지나 한 바퀴 돌아보고 나니, 미사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는데 어디서 쉬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상황이 되었다. 아내의 제안에 따라 아직 열지 않은 브라질 음식점 앞 차양 친 벤치에 한동안 앉아서 다리를 쉬었다. 아무래도 아내의 발에 물집이 잡힌 것 같아, 저녁에 숙소에 가서 한 번 처치하기로 했다. 종아리를 서로 주물러 주면서 낮의 습한 바람을 쐬고 있자니 힘이 절로 빠진다. 덥기는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