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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세계 성당 방문기

[세계 성당 방문기] 08. 싱가포르 착한 목자 대성당과 성 베드로・바오로 성당

by 집너구리 2023. 1. 24.

(이 글은 '220911 싱가포르 여행기 09'로부터 이어집니다.)

 

착한 목자 대성당
Cathedral of the Good Shepherd
등급 주교좌성당(대성당)
소재지 A Queen St., Singapore
관할 천주교 싱가포르 대교구
찾아가는 길 싱가포르 MRT 'Bras Basah' 역에서 도보 3분, 'City Hall' 역에서 도보 6분
미사 시간 평일 13:15~
토요일 특전 18:00~
일요일 8:30, 10:30, 18:00~
(평일에 낀 공휴일에는 미사 없음)

 

차임스에서 길을 하나만 더 건너면 바로 주교좌 성당입니다. 싱가포르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대교구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싱가포르 대교구장 윌리엄 고(William Goh)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승품되었는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성당 밖에 크게 벽보가 나붙어 있습니다. 한국인 천주교 신자라면 유흥식 라자로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이 추기경으로 승품되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말하자면 유 추기경과 고 추기경은 추기경 승품 동기인 셈입니다.

 

흥미롭게도 차임스 주위의 권역에는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천주교회 본당이 세 곳이나 됩니다. 차임스가 아직 수녀원이던 시절까지 치면 이 동네에만 성당이 네 개 있는 셈입니다. 그 중 주교좌인 '착한 목자 대성당'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 된 천주교회입니다. 이 성당의 이름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로랑 앵베르 신부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에서 따 온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이다 싶으시다면 그 생각이 맞습니다. 서울대교구의 제2대 교구장이자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앵베르 주교는 당시 신부 신분으로 싱가포르에 입도했으며 싱가포르 섬에서 최초로 미사를 봉헌한 사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조선에서 신자들을 돌보다가 박해를 받아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그의 순교 소식과 함께 유고가 싱가포르에 전달되었습니다. 당시 새 성당을 짓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신자들은 싱가포르 천주교 공동체의 개척자나 다름없었던 앵베르 주교의 유고에서 성당 이름을 따오기로 한 것입니다. 그가 싱가포르에 머무른 것은 1년 남짓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천주교 신자이거나 천주교에 관심이 많은 한국인이라면 놓칠 수 없는 인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참고로 당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기 전 남긴 글은 이렇습니다.

착한 목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양 떼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해외에서 주교좌 성당에 가 본 적은 자주 있습니다만, 르네상스 양식의 주교좌 성당을 방문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명동성당의 위아래로 길쭉한 실루엣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착한 목자 대성당은 다소 낮고 얕게 퍼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제대가 동쪽(정확히는 동남쪽)으로 나 있는, 십자가 모양의 전형적인 고전적 성당의 모습입니다. 

성당의 내력을 적은 머릿돌.

평일 미사에 참여한 뒤 성당 내를 둘러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관련 정부 조치로 인해 2022년 9월 당시에는 미사 외의 시간에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성전 내부를 구경하기 위해서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성당 내부는 상당히 정갈하고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180년 된 성당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만, 이미 한 번 리모델링을 싹 한 건물이라고 하니 납득이 됩니다.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거의 중국계 싱가포르인으로 보였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주된 집단으로는 중국계, 말레이계, 타밀계가 있는데, 이 세 집단을 구분짓는 기준 중 하나가 바로 종교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아우르는 기독교는 중국계의 대표적인 종교이지요.

앞에서도 말했듯 제대 쪽은 전례적 동쪽(Ad orientem)을 상징합니다만, 실제로도 동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습니다. 네 개의 정사각형 틀 안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오래 된 성당이다 보니 당연하게도 벽 제대와 탁자 제대가 모두 있습니다. 모두 눈의 부시도록 하얀 색인 것이 특징입니다. 사진에 가까스로 잡혀 있는, 제단 한구석의 주교좌도 눈에 띕니다. 

성가대석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고풍스러운 나선 계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리로 올라가면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있습니다. 다만 평일 미사라 이 오르간이 연주되지는 않았습니다. 평일 미사는 어딜 가나 다 간소하게 하는 모양이예요. 사람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아무튼 평일 미사는 평일 미사입니다. 기왕 이렇게 멋들어진 파이프 오르간이 달려 있는데 한 번쯤 연주해 줄 법도 하겠습니다만 그것은 여행객의 투정에 불과하겠습니다.

벽에는 십자가의 길 성화와 함께 간간이 이 성당에 기여한 이들의 내력을 적은 비석 비슷한 부조물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착한 목자 대성당의 창문은 아치부에 조그맣게 장식되어 있는 것들이 스테인드 글라스의 전부입니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성당 내부가 취향인 신자라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겠으나, 이건 이것대로 정갈한 맛이 납니다. 

미사가 끝나면 칼같이 본당 밖으로 신자들을 내쫓기(?) 때문에, 위의 내부 사진 몇 장만 가까스로 찍고 바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붕 위로 뾰족하게 솟은 종탑의 조형미가 퍽 아름답습니다. 규모가 큰 성당이면 보통 제대를 마주한 문이 세 개 나 있는데, 가장 가운데 현관에는 문설주 위에 큰 예수 성상이 서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싼 요한복음 10장 11절의 '나는 착한 목자다(I am the good shepherd)'라는 문구가 성당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 보입니다.

성전 밖으로 나와서 뭐 또 구경할 곳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렇게 되어 있는 유리 입구를 발견했습니다. 영어가 짧으니 'Perpetual Adoration'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대강 아는 뜻으로 때려맞혀 보자면 '끊임없는 사랑' 뭐 이런 비슷한 뜻인 것 같습니다. '채플(경당)'이라고 써 있는 걸 보니 소성당인가? 보통 대성당 근처에는 소성당이 딸려 있기 마련이니 이렇게 추측한 것입니다. 한번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지하로 통하는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이렇게 유리문으로 된 공간이 나타납니다. 영어로는 'Crypt'라고 쓰여 있습니다. 보통 '지하묘지'라고 번역되는 말인데, 여기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 보기에는 약간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이 들어 일부러 확인하러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나중에 사진으로 보니 정말 누군가의 묘비명 같은 것이 적혀 있긴 합니다. 그 옆은 기도실입니다. 어떤 몸가짐으로 들어와서 어떻게 기도하라는 안내판이 친절하게 적혀 있습니다. 알고 보니 'Perpetual Adoration'이라는 표현은 흔히 한국에서 말하는 '성체조배'를 뜻하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조배'라는 말에 '아침에 예배한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보니 한번에 연결시키지 못한 탓입니다. 일본 천주교회에서도 아예 '성체예배聖体礼拝'라는 표현을 쓰고 있더라고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표현은 바로잡는 것이 어떨까 하고 잠시 생각해 봅니다.

울타리 기둥에 붙어 있는 주먹만한 달팽이 친구를 지나칩니다. 착한 목자 대성당은 흔히 말하는 '박물관 구역'이라는 곳에 있는데, 알고 보니 이 박물관 구역에 싱가포르 최초의 식물원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남아 있는 흔적이라고는 이 작은 팻말뿐이지만요. 이 식물원의 역사를 잇고 있는 것이 지금 싱가포르 섬 한가운데에 조성되어 있는 싱가포르 식물원이니 한번 찾아가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성 베드로와 바오로 성당
Church of Saints Peter & Paul
등급 본당
소재지 225A Queen St., Singapore
관할 천주교 싱가포르 대교구,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
찾아가는 길 시드니 메트로 'Bras Basah' 역에서 도보 3분
미사 시간 평일 7:20~, 18:00~ (목요일 17:30~)
토요일 특전 17:30~
일요일 8:30(표준중국어), 11:00(영어), 14:00(광둥어), 16:00(영어)

싱가포르 미술관을 지나서 퀸 스트리트를 따라 조금 더 걸어내려가면 성당이 또 있습니다. 규모는 크지 않은데, 의외로 존재감이 있는 성당입니다. 무려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을 한 방에 주보로 모시고 있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성당'입니다. 싱가포르에 있는 천주교 성당 중에서는 세 번째로 오래 된 곳이라고 합니다.

웬만한 싱가포르의 건물 표지판에는 영어 외에도 몇 개의 언어 표기가 덧붙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영어 외의 어떤 언어가 붙어 있느냐로 그 건물에 드나드는 인종 집단을 대강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보다시피 여기에는 중국어가 병기되어 있는데, 이로써 이 성당은 주로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많이 다닌다고 짐작이 가능합니다.

아까 방문했던 착한 목자 대성당이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다면, 이곳 성 베드로와 바오로 성당은 전형적인 고딕 리바이벌 양식으로 세워진 건물입니다. 고딕 양식의 성당이 유달리 많은 한국에서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대성당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더 내부를 구경할 수 있으면 좋았겠으나, 아쉽게도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날 누군가의 장례 미사가 이루어지고 있어 성당 안쪽까지 들여다볼 순 없었습니다. 성당 현관 양 옆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거대한 상이 있는데, 무척 볼거리이므로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찍더라도 영구차를 비출 수밖에 없어 사진을 찍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기실 남의 장례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을 마구잡이로 찍는 것이 예의바른 행동은 아니잖아요. 

대신 주위를 조금 둘러봅니다. 성당 부지 옆에는 성물방이 있습니다. 해외에서 만난 성물방 치고는 규모가 제법 큰 편이기도 하고, 너무나도 한국의 그것과 비슷한 모양이라서 친근감마저 들었습니다. 뭔가 사 갈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에 잠시 숙소에서 쉬었다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여기에서 시간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성당 부지 옆으로는 가톨릭계 미션 고등학교 표지판이 붙은 건물이 있습니다. 운동장 같은 것이 없는데 괜찮은 건가 싶었습니다만, 다행히도(?) 지금은 진짜 고등학교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인 모양입니다. 내부를 둘러보지 못하니 이 성당에서 뭔가 더 다른 것을 할 것이 없어, 일단은 숙소로 향해 봅니다. 이렇게 한 구역에 성당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경험을 아시아 국가에서 하기란 쉽지 않을 터이니, 여유가 있으신 여행객이라면 한 번 쭉 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