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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의도치 않았던 사회공헌) 타일벽화 그림 그리기

by 집너구리 2021. 4. 10.

지난번 도토리 사건(2021.02.21 - [잡담] - 집씨통 참여하기: 도토리나무 재배일지 01)도 그랬지만, 아내가 이번에도 뭔가 자기 회사의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내게 해 보겠느냐고 물어봤다. 내용이 뭔고 하고 물어봤더니, 뭔가 미술 같은 프로젝트인 모양이다. 여러 개의 퍼즐로 구성된 타일 벽화를 그려서 지역 아동복지시설에 기증하는 프로젝트로, 신청한 사람에게 무작위로 번호가 배정된 빈 타일을 주고 그것에 정해진 색으로 색칠을 해서 다시 제출하면 된다고 한다. 이것을 구워서 완성된 형태로 아동복지시설에 전달된다고. 좋은 취지인 것 같기도 하고, 손을 놀리는 것을 좋아하기도 해서 일단 해 보자고 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 아내가 봉투에 담긴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언젠가의 기시감이 느껴지는 듯도 했는데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니까 오른쪽과 같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 왼쪽 같은 세트를 한 사람씩 나눠준다. 

 

아내가 가지고 온 봉투를 열어 보니 대략 이런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타일이 담긴 노란색 충격방지 봉투와 미리 물감을 짜 둔 팔레트, 가느다란 붓 한 자루, 그리고 칠해야 할 조각의 도안이 구성품의 전부이다. 딱 필요한 내용들만 담은 단촐한 구성이다.

 

본격_아재_아지매_판별기.expo

봉투에는 '11'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전체 도안 중 11번째 타일이라는 뜻인 모양이다. 근데 매직으로 그어진 '11'이라는 글자를 보고 있자니 아 이건 못 참지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만 꿈돌이를 그려 버리고 말았다. 노란색에 일자눈이면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태어난 사람들은 가만 있을 수가 없는 게 국룰 아닌가!

 

 

이렇게 타일과 도안을 비교해 보니 사이즈의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도안의 사이즈는 엄지손톱보다 조금 작은 정도인데 비해, 타일은 제법 커다란 접시 정도의 크기이다. 미리 짜여져 있는 팔레트 위의 물감에 물을 타서 묽게 만들고, 도안에 맞춰서 타일에 색을 칠하면 된다. 보다시피 스케치를 미리 해서 보내 주시기 때문에 사실상 색칠 말고는 할 일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버리려고 했던 보관그릇 하나에 물을 담아와서 물감에 물을 타고, 스케치에 맞춰서 느긋하게 색을 칠한다. 붓이 제법 가느다란 덕에 꼼꼼하게 터치를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만화를 즐기고 그림을 따라그리게 되면서 미술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지, 그 전에는 도무지 미술 시간을 즐기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 중에 가장 힘들었던 때가 바로 수채화 시간이었다. 색을 좀만 잘못 칠해도 전부 번지고, 윤곽선 없이 어떻게 색의 변화와 형태의 덩어리를 표현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붓만 대면 그림을 망치기에 바쁘니 즐거울 래야 즐거울 수가 없다. 그나마 아크릴화 시간은 해 볼 만했는데, 아크릴 물감이란 것은 잘못 그리더라도 그 위에 덮어씌우면 번짐 없이 그대로 올라앉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편한 걸 두고 왜 그 골치만 딱딱 아픈 수채화를 시키는 것인지 어린 마음에는 당최 알 수 없었거니와, 사실 지금에 와서도 그 생각은 지우기 어렵다.

 

이번에 받은 타일 그림 세트(?)에 들어 있는 물감 세트는 흥미롭게도 도자기 전용 안료로 만든 것이어서, 당장 칠할 때는 발색이 잘 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가마 속에서 구워져 나오면 선명한 발색으로 되살아난다고 한다. 과연 색을 칠해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연하게 나와 약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구워지면 선명해진다고 하니 그나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색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완성했더니 대략 이러한 모양새가 나왔다. 들어 있던 파란색 물감을 도저히 어떻게 칠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도안 속에 연한 파란색으로 얼룩져 있(다고 내가 굳게 믿)었던 부분을 윤곽 없이 대강 칠하기로 하였다. 아이들 보기에는 영 부끄러운 모양새일 수도 있겠지만, 아저씨가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누군가는 알아 주겠거니 싶은 생각을 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붓을 놀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모처럼 어린아이 시절의 미술 시간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새삼스레 수채화 재능이 요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도 한, 그래도 나름대로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일정 액수를 기부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재미있는 활동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신. 그래서 우리 도토리는 도대체 언제 싹을 틔우려고 아직도 감감 무소식인지 모르겠다. 죽었나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