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헌혈을 한 번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창졸간에 들은 이야기라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긴 했는데, 헌혈 자체는 한 번 하러 가긴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어서 나름대로는 기꺼운 일이었다. 아내와 나는 같은 대학에서 만나 결혼에 이른 사이인데, 며칠 전에 학내 커뮤니티 사이트의 졸업생 게시판을 돌아다니던 아내가 한 동문이 올린 지정헌혈 요청 게시글을 본 모양이다. 아내 또한 금방이라도 돕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혈액을 필요로 하는 환자와 혈액형이 달라서 고민하다가 마침 같은 혈액형인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듣자하니 딱한 사정이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집 근처에 있는 혈액원에 다녀오기로 했다.
알다시피 무작정 혈액원에 쳐들어가 헌혈을 해 달라고 하더라도 쉽사리 헌혈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최근 외국에 다녀온 일이 있는지, 말라리아 위험 지역에 체류한 일은 없는지, 경구로 복용하고 있는 금지약물은 없는지 등을 꼼꼼이 따져 보고 검사 등도 진행한 다음에야 비로소 내 피를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2008년 팔팔하던 고등학생 시절에 학교에 온 헌혈차를 통해서 한 전혈 헌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탓에 요새 헌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는데, 흥미롭게도 애플리케이션을 통해서 혈액원 예약과 자가문진을 바로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앱을 켜서 개인정보를 등록하면 이제까지 자기가 진행한 헌혈의 횟수와 종류를 표시해 준다.
구글 플레이 :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sk.redconnect
애플 앱스토어 : App Store에서 제공하는 레드커넥트 - 300만 헌혈자를 위한 공식 헌혈 앱 (apple.com)
1단계)
하단의 '예약' 탭으로 들어가면 예약을 진행할 수 있다.
헌혈의집을 선택하지 않으면 아래의 양식 중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으니, 반드시 헌혈의집부터 먼저 고르도록 하자. 위치정보 수집을 켜 두면 자기 위치 근처에 있는 혈액원을 확인할 수 있는데, 적십자사 소속 혈액센터를 중점적으로 표시해 주니 이 점은 참고하도록 하자. 나는 홍대 근처에 살고 있는데, 홍대에는 적십자사 혈액센터뿐만 아니라 한마음혈액원 소속 헌혈카페도 있지만 이 리스트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2단계)
원하는 날짜와 헌혈 종류, 시간대를 선택한다.
헌혈에는 시간이 제법 걸리는데, 가장 짧은 전혈헌혈만 해도 30분은 기본으로 걸리고 성분헌혈은 최대 1시간 30분은 너끈하게 걸리므로 무턱대고 혈액원에 갔다가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성분헌혈의 경우 보통 혈액원마다 자리가 한 곳 정도밖에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욱 심하다). 자기 일정에 맞춰서 시간대를 잘 선택하는 것이 좋다. 특히 헌혈하고 나면 한동안 땀 흘리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안내를 받게 되는데, 여름이라면 한낮의 더위 속에서 땀을 안 흘릴 사람이 오히려 드물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날씨의 영향도 감안하는 것이 좋겠다.
3단계)
일정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예약을 완료한 뒤, 헌혈일로부터 3일 이내에 전자문진을 진행한다.
예약이 완료되면 카카오톡으로 예약 내역이 날아온다(카카오톡으로만 연락이 날아오는 것 자체는 극혐하지만...). 전자문진표의 경우, 미리 작성해서 서버에 제출해 두면 당일에 문진 절차가 얼마 걸리지 않기 때문에 훨씬 편리하다. 다만 이미지에도 적혀 있듯이 전자문진 결과는 딱 3일 가기 때문에 유의할 것. 문진표를 읽다 보면 제한사항이 정말 많은데, 뭔가 내가 이 중 하나에 해당되는 것 같은데 석연치 않다(특히 약물 관련) 싶으면 바로 대한적십자사 고객센터(1600-3705)로 전화해서 물어보도록 하자. 나도 습진치료용으로 바르는 약이 있어서 혹시나 싶어 물어봤더니 지역 혈액원을 연결시켜 주셨고, 그쪽에서도 상세히 답변해 주셨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4단계)
사진이 나온 신분증(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학생의 경우)학생증 등)을 지참하고 혈액원으로 쳐들어간다.
혈액원에 들어가면 대기표를 뽑는데, 혈압 측정과 문진표 작성, 지정헌혈 대상자 명부 작성 등을 위해서이다. 예약을 하지 않고 갔다면 '일반방문자' 대기표를, 예약을 하고 갔다면 '사전예약자' 대기표를 뽑고 기다린다. 안내해 주시는 분이 사물함에 자기 물건을 보관하도록 안내를 해 주시는데, 휴대폰과 보조 배터리, 또는 가볍게 읽을 만한 책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는 그냥 사물함에 쑤셔넣는 게 좋다. 나는 한 손으로라도 타자를 쳐서 일을 할 요량으로 태블릿과 휴대용 키보드를 가져갔는데, 일은 개뿔이고 한 손이 완전히 못 쓰는 상태에서는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리는 게 고작이었고 손짐이 많아 불편하기만 했으니 참조하면 좋을 듯하다.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다 번호가 불리는 문진실로 들어간다. 인적사항과 신분증을 확인한 뒤 혈압 측정을 하는데, 정말 미친 듯이 혈압이 높거나 하지 않는 한(수축기 90 - 179mmHg, 이완기 100mmHg 미만) 웬만하면 헌혈 가능 범주에 들어간다. 다음으로는 검사 채혈을 하는데, 성분헌혈의 경우 한쪽 팔은 검사채혈용으로 구멍을 뚫고 다른 한쪽 팔은 헌혈용으로 구멍을 뚫기 때문에 100%의 확률로 양쪽 팔에 다 구멍이 나는, 위상기하학적으로 무척 흥미로운 꼴이 된다. 검사채혈이 끝나고 지혈대로 팔을 동동 감은 뒤에는 안내대로 화장실을 다녀온 뒤 물을 연거푸 들이키는 것이 좋다. 수분이 미친듯이 빠져나가는 행위이다 보니 물은 마셔 두는 게 좋고, 오래 걸릴 것을 대비해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을 추천하는 것이다.
성분헌혈은 공여자 자신도 여러모로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 많다. 아예 담당 간호사가 안내문을 주고 꼭 읽어 보라고 하는데, 커프가 조여지고 피가 빠져나갈 때에는 압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먹을 살짝씩 쥐어 가면서 압력을 가해 주는 게 좋다고 한다. 물론 커프가 풀리고 적혈구들이 다시 몸으로 돌아올 때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아니 하면 안 되겠지). 다만 항응고제 성분으로 인해 저림, 식은땀, 구역질이 날 수 있는데, 그럴 때는 꼭 간호사를 불러 달란다. 다행히도 나는 한 시간 내내 그런 일은 겪지 않았다.
성분헌혈 과정 자체는 한 시간 안팎으로 걸렸다. 담당 간호사가 "혈관이 얇아서 조금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했는데, 웬걸 생각보다 더 이른 50분 남짓 만에 헌혈이 끝났다. 일정한 주기로 팔에 감긴 커프가 죄여지면서 혈액이 빠져나갔다가, 좌석 옆에 붙어 있는 분리기에서 분리작업을 거쳐 나머지 피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 눈앞에 보인 관을 통해 훤히 보였다. 뭔가 외부로 내 혈관이 이어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묘했다. 한편으로는, 신부전 환자들이 이 지긋지긋한 과정을 하루 종일 하면서 피를 전부 투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깜깜한 생각만이 들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이며, 혈관은 또 얼마나 너덜너덜해질 것인가...
한동안 멍하니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담당 간호사가 와서 무슨 기념품을 받아가시겠냐고 물어본다. 재미있게도 성분헌혈자들에게는 그들만을 위한 전용 기념품 메뉴(?)가 벽에 붙어 있어서,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다(사진을 찍어 두긴 했지만 이건 혈액원마다 다를 수 있으니 굳이 올리지 않기로 한다). 다양한 기념품들이 있었지만 뭘 고를 지 막막해하다가, 마지막에 가까워서야 커피쿠폰 만 원 어치를 달라고 했더니 헌혈이 끝날 때쯤 헌혈증과 함께 쿠폰 두 장을 가져다 주셨다. 포카리스웨트 하나와 각종 과자들이 담긴 바구니, 그리고 헌혈의 날 기념으로 주신다는 무시무시한 길이의 장우산도 함께 받았다. 아니나다를까 핏빛 붉은색의 강렬한 우산이라 뭔가 웃음이 나왔다.
왼쪽에 달린 계기판에 헌혈이 완료되었다는 알림이 뜨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여유롭게 뽑아 둔 혈액을 다시금 몸으로 돌려보내는 과정을 거친 뒤, 모든 것이 완료되면 팔에서 바늘을 뽑고 지혈을 한다. 그러고서는 5-10분 정도 그 자리에 앉아서 안정을 취하다가, 과자 박스와 헌혈증을 주섬주섬 들고 바깥으로 나가면 된다. 과자박스 안에 무려 10분짜리 타이머가 달려 있어서 이것을 켜 두고 바깥 대기실에서 10분 정도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으라는 안내를 받는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부작용 때문인 듯하다. 이 때 물이나 과자류를 좀 먹어 두는 것이 좋긴 한데, 코로나 시기이다 보니 밖에 나가서 나중에 먹는 것도 영 나쁘지는 않은 선택지라 하겠다. 나는 목이 말라져서 음료수만 한 캔 마셨다.
레드커넥트 앱에는 오늘도 혈액량 부족의 알림이 뜨고 있다. 헌혈센터에 가면 다행히도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 피를 내어주겠다는 충만한 의지를 품고 대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부라는 것은 넘치듯 하는 것이 도리어 나은 일이다. 한번씩은 기분전환 삼아서 헌혈을 하러 다녀오고, 그 김에 자기 혈액이 얼마나 건강한지 확인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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