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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의도치 않았던 사회공헌) 점자책 만들기 봉사를 해 보았다

by 집너구리 2021. 9. 6.
 

(의도치 않았던 사회공헌) 타일벽화 그림 그리기

지난번 도토리 사건(2021.02.21 - [잡담] - 집씨통 참여하기: 도토리나무 재배일지 01)도 그랬지만, 아내가 이번에도 뭔가 자기 회사의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내게 해 보겠느냐고 물어봤다. 내용이 뭔

sankanisuiso.tistory.com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이 갑자기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설마하니 '의도치 않았던 사회공헌'이라는 말머리가 시리즈 비슷한 무언가가 될 줄이야 나도 미처 알지 못했다.

 

발단은 여느 때와 비슷했다. 아내로부터 온 메시지 한 마디, '점자책 만들기 봉사 같이 할래요?'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나도 반쯤 소재거리로 괜찮겠다는 생각에 덥석 받아무는 경지에 이르렀다. 바로 그날 저녁에 퇴근한 아내의 손에는 흰 봉투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또 일거리가 생겼다.

 

받아만 놓고 한 주 동안 일이 너무 많아서, 주중에는 살짝 맛만 보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다가 제출 기한이 다 되었을 때쯤에야, 일요일 오후에 비로소 손을 댈 수 있게 되었다. 손으로 하는 작업을 잘 하는 편이라서, 나름대로 재미있게 할 수는 있었지만 끝나고 나니 다소 어깨와 목이 뻐근했다. 망할 거북목.

 

이런 박스가 들어 있다.
구성품은 이렇게 돼 있다. 

'볼로기 임대용 키트'라고 되어 있는 상자 뚜껑을 열면, 점자 일람표와 휴대형 점자 인쇄기, 활자용 핀과 핀셋, 그리고 점자 인쇄에 쓰이는 스티커필름이 한 묶음 들어 있다. 점자가 인쇄되면 볼록하게 올라오기 때문에 이름이 '볼로기'인 모양이다. 귀여워.

따로 들어 있는 봉투에는 점자를 인쇄해 붙일 동화책과 동화책 내용을 적은 점자표, 그리고 인쇄용 스티커필름이 두어 묶음 더 들어 있다. 점자 일람표를 보면서 하나하나 옮겨 인쇄할 수도 있겠지만, 거의 문자 체계 하나를 새로 배우는 것이나 진배없는 일인데다 제출해야 할 시간도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부러 동화책 내용을 전부 점자로 옮겨서 보내 준 모양이다. 친절하다. 다만 정신없이 점자 찍기를 하다 보면 자주 반복되는 패턴의 점자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게 된다. <셜록 홈즈의 모험> 수록작인 <춤추는 인형>에서 인형 모양으로 적힌 메시지를 해독하는 홈즈와 왓슨의 기분을 편린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점자를 찍어 보자.

 

1. 볼로기의 맨 윗칸만 들어내고, 점자표에 맞춰 인쇄용 핀을 꽂는다.

띄어쓰기 부분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정신줄 놓고 꽂다 보면 밀리거나 당겨지는 건 일상다반사이다.

미리 점자표의 각 행에 번호를 적어 두면 나중에 인쇄된 점자필름을 책에 붙이기 편하다.

2. 고정용 핀의 모양에 맞추어 인쇄용 스티커 필름을 활면 위에 얹는다.

스티커 필름의 매끈한 부분이 위로 가도록 얹어야, 나중에 종이를 벗겨 내고 책에 붙일 수 있게 된다.

 

3. 볼로기의 윗면을 필름 위로 얹고, 한쪽 면에 고정핀을 꽂는다.

인쇄 전의 마지막 단계이다. 이 위에 압력을 가해서 점자를 인쇄하게 된다.

4. 인쇄용 압축기에 볼로기를 끼우고, 힘차게 3-4번 왕복시켜 준다.

스티커필름에 핀 모양을 압착시켜서 늘림으로써 점자를 필름에 고착시키는 작업이다.

힘을 잘 줘서 3-4번 이상 왕복시켜 줘야 보다 도드라지게 점자가 인쇄된다.

5. 압축기를 뺀 뒤 볼로기 윗면을 제거하고 스티커필름을 분리한다.

필름을 분리할 때 활자용 점자핀들이 마치 코팩에 붙은 피지마냥 쭉 딸려올라올 수 있으니, 잘 달래 가면서 작업하자.

다음 인쇄를 위해서 핀들은 전부 다시 통으로 옮겨 담아야 한다.

중간층을 제거한 다음, 반으로 접혀 있는 점자일람표를 핀 보관함에 기울어지게 걸치고 볼로기를 털어 주면 분리가 깔끔하게 된다(오른쪽 사진 참고).

스티커필름에는 점자표에 미리 적어 둔 번호를 하나하나 적어 두면서 진행해야 뒤탈이 없다.

6. 인쇄된 스티커필름을 동화책에 붙인다.

아까 적어 둔 번호가 마침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필름에 적어 둔 순서를 바탕으로, 동화책의 내용에 맞춰 붙여 준다.

점자책은 압력이 가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보관의 요체이기 때문에,

되도록 점자 필름이 책 전반에 고르게 배포하도록 붙이는 것이 중요하다.

제목까지 꼭꼭 맞춰서 붙여 주면 끝.

 

 

오래간만에 손으로 꼬무럭꼬무럭하는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재미도 있는 데다가, 저시력 아동들에게도 재미있는 그림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 준다는 의미도 있어서 더욱 즐겁게 작업했다. 다만 이 활동을 신청해서 해 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부디 목 건강과 어깨 건강을 신경 써 가면서, 자주 스트레칭을 하고 먼 산도 보면서 진행하실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