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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아내의 머리카락을 기부해 보았다

by 집너구리 2022. 2. 7.

내 아내로 말할 것 같으면, 내게도 이런저런 사회공헌 활동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잘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스스로도 이런저런 기부나 봉사활동을 자주 하는 사람이다. 그런 아내가 늘 가장 해 보고 싶어했던 기부 중 하나가 머리카락 기부였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잘라서 기부하면 암환자들을 위한 가발을 만드는 데 쓸 수 있는데, 머리카락 기부를 받는 단체들 중 많은 경우가 '염색하지 않은 머리' 또는 '컬이 들어가지 않은 머리'를 조건으로 걸고 있곤 했다. 그런 단체들이 너무 빡빡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머리를 가지고 만드는 가발이 가장 가공하기도 편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줄 테니까. 다만 아내의 경우 이미 진갈색으로 한번 염색을 했고 펌도 약하게나마 했던 터라, 기부를 하고는 싶어도 언감생심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트위터를 하던 내 눈에 흥미로운 링크 하나가 들어왔다. '어머나운동본부'라는 곳인데, 이 곳은 머리카락 길이가 25센티미터만 넘는다면 딱히 조건을 따지지 않고 받아 주신다는 것이다. 당시 이런저런 사유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기르고 있던 아내에게 이 글을 보여 줬더니, 드디어 자기도 머리카락 기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며 신나 했다. 나도 머리카락을 단발에 가깝게 길러 본 적이 있지만, 뒤로 묶을 수 있는 머리카락의 길이가 25센티가 넘어갈 만큼 기른다는 것은 엄청난 인내력과 번거로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감고 나서 말리는 것도 한세월이고, 물 먹은 머리카락은 무겁기 짝이 없으며, 겨울이라도 되면 머리카락이 꽁꽁 얼어 몽둥이마냥 변하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길렀는지도 모를 만큼 오랫동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두었더니, 마침내 아내의 머리카락은 제법 길어서 허리춤에 닿을 수준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때는 이 때다.

'어머나운동본부'에서 알려주는 머리카락 기부 방법.

 

'머리카락 25센티미터 이상'의 기준이 어디까지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머리를 묶지 않고 풀었을 때 딱 보기에도 어깨 아래 선에서 머리카락 끝까지 쟀을 때 30센티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좌). 기부용 머리카락을 자를 때에는 일단 자를 부분 바로 아래를 고무줄로 묶어서 고정한 뒤 가위로 잘라낸다고 한다. 시험삼아서 집에서 포니테일로 묶은 뒤 머리카락 길이를 다시 재 봤는데, 30센티미터 남짓 잘라내도 어깨선 근처에서 잘 마무리되리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우). 이제 남은 것은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이걸 봉투에 담아 부치는 것뿐이다.

풀었을 때(좌), 포니테일로 묶었을 때(중), 묶은 머리카락의 길이 재기(우)

 

나도 마침 컷을 할 때가 되어서, 부부가 나란히 손을 잡고 미용실에 갔다. 내 커트는 얼마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가 머리를 마무리할 때까지 잠시 밖에서 시간을 죽였다. 오랜만에 머리도 자르고 컬도 다시 넣어서 기분이 퍽 좋아(졌지만 동시에 무척 피곤해)진 아내에게 미용사가 잘라 둔 머리카락을 비닐봉투에 담아서 건네 주었다. 받아 드는데 느낌이 퍽 묘했다. 성인의 유해를 성유물로 모시는 가톨릭 전통이 괜스레 생각나기도 하고, 바로 방금까지도 아내에게 달려 있던 부분이 저렇듯 잘려서 무기물로 돌아오는 것이 영 어색하기도 하고.

 

역시나 길이는 거뜬히 30센티미터를 넘었다.

 

집에 와서 다시 한 번 머리카락 길이를 재 본 뒤, 안심한 우리는 녀석을 봉투에 담아서 부치기로 했다. 아내의 회사 근처에는 우체국이 없기 때문에, 재택근무 중인 내가 아침 시간을 활용해서 우체국에 다녀왔다. 다만 머리카락은 물건이므로 등기가 아니라 택배 취급으로 보내야 한다고 하니, 혹시라도 어머나운동본부를 통해 머리카락을 보내실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란다. 직접적인 비용은 기본 배송비 4천원뿐인데, 이렇게 기부한 머리카락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부부로서는 참 뿌듯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서 또 할 거냐, 라고 물어본다면? 아내는 그럴 마음이 없지는 않은 모양인데, 나는 아무래도 영 안 될 듯 싶다. 머리카락이 어느 정도 이상 길어지면 스스로 도저히 근질거려서 버틸 수가 없다. 이런 번잡스러운 것을 늘 이기며 사는 많은 여성분들과 일부 남성분들께 깊은 경의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