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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 여기저기 답사기

20220212 서북서울 탐방 : 서울역에서 서촌 노가든을 지나 세검정에서부터 홍제천 따라가기

by 집너구리 2022. 2. 13.

봄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지표가 몇 가지 있다. 나무마다 맺히기 시작하는 꽃망울, 다시금 꺼내 입게 되는 코트, 온 하늘을 뒤덮는 미세먼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미세먼지가 희뿌옇게 서울 하늘을 흐리기 시작한 것을 보아하니, 춥디춥던 올 겨울도 이제 곧 북쪽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슬슬 기어나가 볼까 싶다.

 

 

전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나간다. 주말 낮이라 기차를 타러 나온 사람들은 많지 않다. 잠시 서울역 옥상정원을 들른다. 한적하고 탁 트인 곳에서 서울 중심부를 내다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여기 있는 '알맹상점 리스테이션'에 모아 둔 우유팩과 소형 플라스틱 쓰레기를 가져다 주고, 집에 없는 물건이 있나 한번 쭉 둘러본다. 요행인지 아닌지 필요한 물건은 딱히 없어 보인다. 필요없는 물건을 과하게 사는 것도 비환경주의적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일 것까지도 없이, 그냥 망원동 알맹상점을 하도 자주 가다 보니 사 둘 만한 것은 얼추 다 사 놓았기 때문이다.

 

아빠 손을 잡고 산책 나온 꼬마 친구들과 주인을 반쯤 끌고 산책 나온 치와와 선생님들을 잠깐 지켜보다가, 서울로7019를 타고 청파동으로 내려간다. 자전거를 빌려서 여기서부터는 북쪽으로 향한다. 서소문역사공원 앞에서 한 번, 염천교 사거리에서 한 번 꺾어 서소문로로. 이번에는 세종대로로 나갈까 싶다가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중간에 길을 한 번 건너 덕수궁로로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아, 길을 잘못 들었구나, 싶다. 세종대로로 나갔다면 사람은 많을지언정 지대는 평평하다. 반면 덕수궁로 쪽 뒷길로 나가게 되면 사람은 적지만 언덕빼기를 몇 개를 지나야 한다. 물론 그리 높은 언덕은 아니지만 따릉이의 하찮은 3단 기어를 가지고 화려하게 변속한다는 것도 못할 노릇이고, 그냥 귀찮게 계속 페달을 밟으면서 씩씩대는 수밖에 없다. 마스크를 끼고 있으니 숨은 더욱 차오른다.

 

새문안교회 앞에서 한글학회 회관 쪽으로 올라가면 내자동 로터리 쪽으로 나갈 수 있다. 다만 또 언덕빼기를 올라가야 한다. 미칠 노릇이다. 이 동네는 물릴 정도로 걸어다녀 이미 익숙할 터인데, 자전거를 탈 때는 언덕이 더욱 강하게 의식된다. 서울경찰청 민원실 앞에 따릉이를 반납하고 다시 북쪽으로 나가면 널찍한 사직로와 그 건너편의 내자동 로터리가 나온다. 여러모로 시위의 성지인 곳이다. 아니나다를까 또 시위가 있다. 태극기를 든 한 무리의 노인들이 왁자하게 구호를 외치며 청와대 쪽으로 인도를 따라 행진하고 있다. '애국 고교연합' '청년 일동' 등의 글씨가 쓰여 있는 천막을 머리가 희끄무레한 분들이 들고 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어떠한 골계미마저 느껴진다.

 

 

내자동 로터리에서 북쪽으로 길을 건너 시위대의 맞은편 인도를 따라 북쪽으로 걸어간다. 통인시장에 못 미쳐 왼쪽으로 꺾으면 화원 '노가든'이 나오는데, 그 전에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는 '통인동 커피공방'을 찾는다. 통인동 근방에는 이 이름을 내건 가게가 두세 곳 있는데, 그 중 하나이다(운영주체는 같다). 커피 원두가 다 떨어져서 한 팩을 살 요량이다. '경복궁의 겨울'이라는 이름의 강배전 원두가 나와 있다. 이전에 사 먹었던 '경복궁의 봄'이 무척 좋았어서 이번에도 한번 시도해 보려고 한다는 나의 말에 점원이, 아마 '봄'과는 많이 다른 맛일 거예요, '봄'은 기억하시겠지만 약배전이거든요, 라고 말하면서 커피를 내릴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을 추가로 설명해 준다. 친절하다. 계산하고 나오면서 커피 봉투의 가스 배출구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본다. 구수하고 묵직한 향기가 난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후회가 된다. 사진을 왜 여기서는 한 장도 안 찍었을까.

 

 

다음으로는 '노가든'을 찾는다. 이전에 한 번 소개한 글이 있으니 자세한 리뷰는 그쪽을 보면 좋을 듯하다. 다만 이전에 갔을 때와는 또 다른 식물들이 들어와 있고, 식물들의 배치도 퍽 바뀌어 있었다. 사장님 부처가 퍽 바지런한 분들이라는 인상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그 인상이 확신으로 바뀐다. 

 

오늘은 굿즈를 먼저 둘러본다. 가게 바깥에도 전시되어 있었던 미니멀하고 예쁜 아크릴 스탠드 하며, 관엽식물의 이파리 모양을 한 그립톡과 열쇠고리 등이 퍽 마음에 들었다. 가격은 흉악했지만. 아내에게 사진을 보내 줬더니 분홍색 칼라디움 그립톡을 마음에 들어했는데, 가격을 듣자 곧 단념한다. 돈 열심히 벌어야 덕질도 한다. 식물들을 둘러보는데, 마오리 소포라와 함께 놓여 있는 퍽 소포라스럽게 생긴 식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수형은 소포라와 비슷한데 이파리가 하트 모양이라 귀엽다. 뮬렌베키아 애스토니Muehlenbeckia astonii라는 뉴질랜드 출신 관목이란다. 오늘의 식물은 너로 정했다. 사장님들이 곱게 신문지로 싸서 주시면서, 화분에 겉흙은 말라 보이겠지만 속에 물이 많이 있으니 바로 물을 주지는 마시라고 당부를 하신다. 소포라처럼 키우면 되냐니 그렇단다. 그렇다면 자신 있다. 우리 집 소포라는 관목을 넘어서 교목이 될 기세로 성장하고 있거든.

 

 

 

노가든에서 만족스러운 식물 쇼핑을 한 다음에는 버스를 타고 세검정洗劍亭으로 향한다. 창의문에 올 때 몇 번 버스로 지나가기는 했지만 직접 가 본 적은 없어서 늘 궁금했기 때문이다. 풍경이 무척 좋다는 얘기도 들었거니와, 저 인조반정 때 반정파가 세검정에서 칼을 씻으며 훗일을 도모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에 퍽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설에 불과한 이야기인지라, 서울시에서 세워 둔 세검정 터에 대한 안내문에서는 '검을 씻으며 평화를 도모한다'는 취지로 해석을 해 두었다. 반정파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나름대로 이해가 가는 해석이기는 하다.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세검정이 있는 곳은 인왕산에서 물이 흘러내려 이루는 홍제천의 상류이다. 그늘진 곳이라 물이 얼어 있어 아이들이 그 위를 지치며 놀고 있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은 경치가 좋은 곳이면 꼭 정자 하나씩은 세워 놓고 거기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에야 제방이 세워져 있고 그 위에는 차로가 놓여 있는 곳이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암괴석들이 깔려 있는 계곡가에 세워진 세검정의 모습은 제법 운치 있었다. 산 너머 서촌에 살았다던 송강 정철이 <장진주사>에서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라고 읊었던 곳이 바로 이 곳이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의 상상도 해 본다.

 

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복원된 것이다. 따라서 유적으로서의 명칭은 '세검정 터'다.

 

 

세검정에서 채 몇백 미터도 되지 않은 길을 비탈을 따라 내려가면 (행정구역이 '종로구'에서 '서대문구'로 바뀜과 동시에) 바로 성문이 하나 보인다. 일반적인 수도권 사람들에게는 '홍지문터널'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와 본 사람은 많지 않을 바로 그 '홍지문弘智門'이다. 홍지문은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관문이었는데, 탕춘대성은 거의 다 무너지고 홍지문 근처의 일부만 남아 있다. 문 자체도 문루가 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7년에 들어서 복원했다고 한다. 성이 바로 홍제천 위를 지나기 때문에 물길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오간수문이 바로 홍지문 옆에 붙어 있다. 한적하다 못해 여기가 서울이 맞나 싶은 곳에 이렇게 떡하니 성문과 성곽이 있는 모습이 제법 이채롭다.

 

홍지문을 정면에서 본 모습. 현판은 좌횡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작품이다. 이 양반은 왜 현판을 꼭 이렇게 좌횡서로 썼는지 모르겠다.
(좌) 홍지문과 함께 본 오간수문, (우) 그 옆으로 쭉 뻗어 있는 복원된 탕춘대성. 이런 데에다 어떻게 성을 쌓았나 몰라.

여기서부터 홍제천을 따라 쭉 내려가다 보면 집 근처로 닿을 수가 있다. 내려가는 길에 문득 생각지도 못했던 고풍스러운 절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옥천암'이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창된 것은 구한말 명성황후가 이 곳에 기도도량을 세우라는 명을 내렸을 때라고 한다.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검정로에서 홍제천을 가로질러 절 일주문까지 세워져 있는 다리 '보도교'가 마치 이승과 피안을 잇는 다리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밑에 있는 마애불이 그야말로 장관인데, 찾아보니 '보도각 백불'이라고도 불리는 옥천암 마애좌불상(보물 1820호)이라고 한다. 무려 고려 시절에 새겨진 대불이란다. 조각 양식 등을 따지건대 고려 초기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태조 이성계가 여기에서 기도했다는 전승마저 있다고 한다. 온통 조선의 것으로 도배되어 있다고만 생각했던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웅장한 마애불이 떡하니 좌정하고 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열심히 사진을 찍는 내 옆을 여러 신도들이 지나가다가 한 번씩 멈추어 합장을 하곤 절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름은 '암자'이지만 일주문도 있고, 제법 구색이 잘 갖춰져 있는 절이다. 일주문을 지난 곳에서 바라보는 보도각과 홍제천의 모습이 장관이다.
천 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며 무수한 발원을 받았을 불상 앞에서, 오늘도 누군가가 발원을 올린다.&nbsp;

 

옥천암의 경치에 한참을 취해 있다가,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해 홍제천을 따라 내려간다. 내부순환로 고가 아래로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왔다가 하는 지난한 여정이다. 이쪽 동네들은 하나같이 오래 된 건물들로 가득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마주한, 어떠한 기묘한 형태의 건물이 있었다. 홍제천 위에 세워져 있는 '유진상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무시무시한 외관에, '유진맨숀'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 옛날식 맞춤법의 건물 이름, 그리고 그 아래로 끝없이 늘어서 있는 가게들. 전형적인 1970년대풍의 주상복합 건물이다. 얼핏 가좌역 앞의 '좌원상가아파트'나 서소문역사공원 근처의 '서소문아파트', '성요셉아파트' 등과도 닮은 느낌이다. 바로 옆을 내부순환로가 지나가고 있는데, 나도 운전하면서 몇 번 지나쳤을 법한 위치다. 이런 건물이 있었는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나는 또 이런 건물을 무척 좋아한다. 이후에 이 건물의 내력을 찾아보다가 좋은 글 하나를 발견했으니, 혹시라도 이 글을 읽어 주시는 이가 있다면 일독을 권하고자 한다.

1층 상가 앞을 지나다가 화원을 하나 마주친다. 아주 젊은 점원 하나가 지키고 있는데, 바깥에 라벤더 포트가 놓여 있길래 가격을 물어보려고 했다(아내가 라벤더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 내 앞에 들어간 중년 부부가 꽃을 고르면서 점원과 한참 동안 대화를 하는 통에, 내 차례가 돌아오기까지는 5분 정도 더 기다려야만 했다. 삼천 원이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한 포트를 샀다. 마스크 너머로도 톡 쏘는 라벤더 향이 느껴진다. 향을 맡다가, 길을 찾다가 하며 홍제천을 따라 쭉 걸어가니, 이제부터는 익숙한 거리가 나타난다. 서대문구청 앞으로 나온 것이다.

 

영욕이 느껴지는 유진상가 A동. B동은 내부순환로가 건설되면서 상부 일부가 철거되었다.

 

이렇게 벼르고 별렀던 하루의 답사 겸 운동은 끝을 맺었다. 아내에게서 부탁받은 버블티를 사 들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지쳤지만 가볍다. 오늘은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