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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 여기저기 답사기

[국내 여기저기 답사기] 경기도 파주시 '파주삼릉'

by 집너구리 2022. 6. 5.

수도권에만 몇십 개 존재하는 조선왕릉 중에서도 이른바 '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얼마나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진 사람의 무덤이느냐가 그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여주의 '영릉英陵'이라든가, 정조와 사도세자의 무덤인 경기도 수원의 '융건릉隆健陵' 같은 곳은 누구나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 보았을 명소이다. 하다못해 조선을 실제로 지배한 스물일곱 국왕의 능은 누구의 것이라는 설명을 해 주면 대강 알아듣는 척이라도 할 수 있겠으나, 누구의 몇 번째 왕후의 능이라든지, 실제로 옥좌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후대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추존받은 왕의 능과 같은 경우에는 이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 아내와 같이 파주 쪽에 다녀오면서 들른 '파주삼릉'이 바로 소위 존재감 없는 분들 몇의 능침이 모인 곳이다. 8대 왕 예종의 첫 부인이자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난 장순왕후 한씨의 '공릉恭陵', 그 누이로서 성종의 첫 부인 공혜왕후 한씨가 잠든 '순릉順陵', 영조의 큰아들이지만 일찍 세상을 떠났고 우여곡절 끝에 황제의 위를 추존받은 진종 소황제와 부인 효순황후의 '영릉永陵'이 한데 모여 '파주삼릉坡州三陵'이라고 한다.

 

토요일 낮이라는, 행락객들이 북적이기에는 딱 좋은 시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사람은 많지 않았다. 주차장에는 차가 많이 주차되어 있었는데, 묘한 노릇이다. 물 한 모금씩을 나눠 마시고 안으로 들어간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돌기둥 위에 해태가 익살맞은 표정을 하고 납작하게 붙어 있다. 왕릉을 지키겠다는 거니? 귀엽다.

왕릉 입구는 다 비슷비슷한 느낌이다. 매표소가 있고, 종합안내도가 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안내표지가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위를 모 정신나간 몇몇 기업들 때문에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왕릉 입구에서 재실 쪽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계수나무(가츠라)가 울타리마냥 심어져 있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게 퍽 예쁘다. 그 어귀에는 파주삼릉역사문화관이라는 건물이 서 있는데, 각 왕릉의 주인과 유래에 대해서 설명하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어린이들이 관람하면서 같이 이야기 나누기에 좋을 듯했다.

 

재실은 겉보기에는 전형적인 양반집 가옥마냥 생겼다. 나는 조선 건축에서 신분의 위계를 한 공간에서 확인하기 가장 좋은 곳은 왕릉이라고 늘 생각하는데, 그 단적인 예시가 바로 단청의 유무다. 건물들 가운데 능참봉을 비롯한 관리들과 아랫것들이 상주하며 관리 목적으로 사용하는 건물들에는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다. 재실이 대표적인 예시이고, 가끔씩 왕릉의 부속건물로 딸려 있는 수복방이나 수랏간도 단청이 없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이나 비석이 모셔져 있는 비각의 경우, 왕이 직접 행차하는 건물이거나 능의 주인의 내력을 모셔 두는 곳이기 때문에 단청으로 꾸며져 있다. 덕분인지는 몰라도 재실에 들어오면 늘 무언가 친근한 느낌이 든다.

 

가장 먼저 우리가 찾을 장순왕후의 공릉으로 가는 길에는 뜬금없이 전통놀이 체험장이 있다. 능침 높은 곳에서 전통놀이를 즐기며 웃고 떠드는 후세인들을 굽어다보는 이들의 심경은 어떠할까? 무엄하게도 왕릉 앞에서 웃고 떠든다며 화를 낼까, 그러려니 별 생각이 없을까, 아니면 나도 저기 가서 좀 끼어 놀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하려나?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겠으나, 만민이 평등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이처럼 잘 드러내 보이는 곳도 얼마 없을 것이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늦봄의 반짝이는 햇살을 따라 길을 걸어가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산들바람에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얼마 걷지 않아도 공릉은 머지않아 모습을 드러낸다. 예종의 첫 부인 장순왕후는 저 유명한 세조대의 권신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일곱 딸들 중 하나인데, 왕세자빈이던 시절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욕열에 걸려 17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그리 이른 결혼은 아니었다지만, 말 그대로 애가 애를 낳다가 죽은 셈이다. 그럴 바에야 왕세자빈의 지위가 다 무엇이고 죽은 뒤에 왕후로 추존되어야 무슨 소용이랴. 하물며 그 아들 인성대군도 고작 태어난 지 한 해를 남짓 넘겨 세상을 떠났으니, 기구하기 짝이 없는 삶이다.

 

왕릉의 이름을 달고는 있으나, 공릉의 구성은 세자빈의 그것을 따르고 있어 퍽 단촐한 편이다. 다른 왕릉을 이곳저곳 다녀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조선에서는 사후에 추존이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그 무덤의 격까지 높여 새로 조성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던 듯하다. 물론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능침에까지 공연히 매번 돈을 써서 백성들을 귀찮게 할 바에야 인식 및 제도 상으로만 격을 올리고 그에 맞춰서 대접하면 된다는 인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공릉 권역을 벗어나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이번에는 조금 더 넓은 왕릉 권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승하 당시 파주삼릉의 주인들 중 유일하게 현직 왕후였던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의 무덤 순릉이다. 그 때문에 순릉을 올려다보면, 앞에서 둘러본 공릉이나 앞으로 둘러보게 될 영릉과는 달리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각 한 쌍씩 봉분 앞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왕세자/세자빈의 예로 조성된 다른 두 능침은 문인석 한 쌍씩만을 가지고 있다). 흥미롭게도 8대 왕 예종은 9대 왕 성종의 숙부인데, 각각의 부인이 모두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들이다. 그러니까 두 국왕은 서로 삼촌과 조카이면서, 동시에 동서지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족보가 어디 있담? 싶지만, 왕조 시대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공혜왕후 또한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등졌는데, 아무래도 자매가 쌍으로 건강이 그리 좋지는 못했던 듯하다. 언니 장순왕후와는 달리 공혜왕후는 자식이 없기도 했고, 그 뒤로 성종의 부인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워낙에 역사에서 두드러진 사람들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해 보인다. 일찍 세상을 등져 남편 성종과 같이 묻히지는 못했지만, 죽어서나마 언니와 같은 능역에 묻히기도 했고, 백몇십년 뒤에 성종의 선릉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온데간데 없이 된 것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공혜왕후의 명예는 나름대로 지켜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순릉 비각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다 보면 사람의 인적이 거의 없는 산책로가 나온다. 중간에 연못과 쉼그늘 같은 것도 있기는 한데, 그보다는 연못을 지나서부터 이어지는 언덕빼기 길이 제법 훌륭하다. 이쪽으로는 사람들이 올 생각을 잘 하지 않는지, 한참을 걸어도 우리 부부의 말소리와 숨소리 이외에 들리는 것은 그저 산새 소리와 벌레 우는 소리뿐이다. 마스크를 벗자마자 싱그러운 숲 향기가 폐부로 파고들어온다. 얼마나 오랫동안 느껴 보지 못했던 싱그러움인지. 마스크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화학약품 냄새와 스스로의 숨결 냄새가 아닌, 그야말로 자연의 향기를 맡으며 산길을 천천히 걷는 느낌은 각별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을 잡목숲 속을 걸었을까. 쌍릉의 형태를 한 세 번째 왕릉의 뒷모습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점점 사람 수도 늘어난다. 다시 마스크를 쓴다. 아쉬워라.

 

'진종 소황제'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저 역사 오타쿠들만이 반응하겠지만, 효장세자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면 그나마 알아들을 사람이 조금 더 많아지리라 생각한다. 영조의 첫 아들이지만 고작 만 열 살을 넘기기 전에 세상을 떠나 '효장세자'가 되었고,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뒤 손자 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기 위해 정조의 양아버지로 삼았던 바로 그 효장세자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뒤 자기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양아버지 효장세자를 추존왕 '진종'으로 올렸고, 나중에 족보상 후손인 순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황제로까지 추존하였다. 그래서인지 영릉에는 다른 왕릉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경거리가 하나 있는데, 바로 비각이 두 채에 비석이 무려 세 점이나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가장 안쪽에 있는 비석에는 '조선국 효장세자묘/효순현빈 부좌', 중간에 있는 비석에는 '조선국 진종대왕 영릉/효순왕후 부좌', 마지막으로 제일 바깥쪽에 있는 비석에는 '대한 진종소황제 영릉/효순소황후 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재미있게도 비각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 각 비문의 내용이 적혀 있는데, 영조조에 세워진 제1비와 정조조에 세워진 제2비는 당시 조선의 관행에 따라 '숭정기원후'라는 연호로 생몰년이 적혀 있는 한편, 순종조에 세워진 제3비는 연대표기를 모두 당시 국왕의 묘호에 기반해서 작성했고(예: 숙종 기해년, 영조 을사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의 연도는 모두 연호를 활용하여 표기하고 있다(예: 융희 2년)는 점이다. 새삼스레 옛날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금석학을 재미있어했는지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불두화
병꽃나무
팥배나무

이렇듯 역사의 숨결이 담긴 왕릉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지만, 자연경관과 조경 또한 왕릉을 구경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 중 하나다.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시절이다 보니, 병꽃나무와 불두화가 흐드러지게 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은근한 꽃향기와 아름다운 꽃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문화재관리공단에서 나무에 걸어 둔 각 나무의 특성 설명표도 같이 보면 재미있다. 팥배나무라는 나무가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도대체가 설명이 너무나도 재치있었던 덕분에 적어도 잊어먹지는 않으리라는 강한 확신 같은 것이 들었다. 같이 다니는 사람과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보는 것도 답사의 큰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