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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 여기저기 답사기

[국내 여기저기 답사기] 제목은 종로구/중구 탐방으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국 종교의 중심부를 곁들인

by 집너구리 2021. 10. 4.

원래 이 글은 <세계 성당 방문기> 시리즈의 한 꼭지가 될 뻔했다. 원래 목적지는 명동성당이었고, 명동성당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성당 방문기를 적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방향성이 다소 바뀌었지만.

 

아무튼 간에 출발은 늘 그렇듯이 서대문구에서. 집에서 충정로사거리까지 나오는 동안에는 한 번도 서대문구를 벗어나지 않고 자전거로 달릴 수 있다. 서대문구는 서울 25개 자치구 중에서도 면적이 좁은 편에 속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대문구를 벗어나려면 정말 한참을 걷거나 달려야 한다. 

 

충정아파트(서대문구 충정로 30).

신촌로에서 충정로로 꺾이는 충정로사거리를 타고 서대문역 쪽으로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허름한 녹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최초의 아파트이자 가장 오래 된 아파트인 '충정아파트'이다. 1930년대에 일본인 토요타 타네오의 설계로 지어진 이래로 약 90년 가량의 세월을 이 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원래는 지금의 1.5배 정도 규모였던 것을 충정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3분의 1 가량 끊어냈고, 그나마도 5층은 불법증축으로 올린 부분인 탓에 지금처럼 다소 희한한 구조가 되어 있다. 1층 상가에는 평범하게 가게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냥 평범한 건물인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 십상이지만, 알고 보면 문화재급 건물인 셈이다(내부 사정은 영 아니올시다지만). 충정로에서 중구 중림동 쪽으로 이어지는 구역에는 충정아파트뿐 아니라 서소문아파트와 성요셉아파트 등 오래 된 아파트들이 많으니, 같이 둘러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다만 서소문아파트는 재개발 지구에 포함되어 철거 수순에 들어가기는 했다.

 

지도대로라면 충정로에서 우회전하여 서소문건널목 쪽으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아무리 달려도 횡단보도가 나오지 않는다. '어, 꺾어야 하는데? 어?"를 댓 번 정도 반복하고 나니 이미 서대문역이다. 별수없이 서대문역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서소문역사공원 북측에서 시청 앞으로 빠진다. 을지로로 가는 편이 평지가 많아서 좀더 편하겠지만, 살짝 변덕을 부려 소공로를 타고 한국은행본점 쪽으로 나간다. 날씨는 쨍하도록 맑다.

(좌) 서울중앙우체국(중구 소공로 70). (우) 소공로 방면으로 쳐다보면 N서울타워가 매우 가까이 보인다.

한국은행 앞에서 신세계백화점 앞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조금 가다가 회현사거리 앞에서 왼쪽으로 꺾는다. 아내와 데이트로 가끔 가곤 했던 '란주라미엔' 가게를 지나면 바로 어딘가 고풍스러우면서도 웅장한 크기의 건물 앞을 지나가게 된다. 건물 이름은 로마자로 쓰여 있기는 한데, 읽어 보면 한 단어만 빼고 전부 한국어다.

 

고려대연각타워(중구 퇴계로 97).

 

'고려대연각타워'라는 이름을 듣고서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떠오를 만한 사건이 하나 있다. '대연각 화재 사건'이다. 1971년에 이 건물 1층의 커피숍에서 LPG가스가 폭발해 발생한 화재로 인해 160여 명의 사람이 죽고 다쳐, 현대 한국 최악의 화재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화재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호텔이었지만, 지금은 리모델링을 거쳐 상업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여전히 1층에 커피숍이 들어와 있는 것이 흥미롭다.

 

대연각에서 퇴계로를 타고 동쪽으로 완만한 오르막길을 타다가 퇴계로2가사거리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는다. 여기서부터는 짧지만 본격적인 오르막이다. 샬트르성바오로 수녀회 건물 외벽을 따라 난 인도를 타고 낑낑거리며 페달을 밟다가, 이화호텔을 지나면서 급격한 내리막. 이윽고 만나는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한때 가톨릭대학교 성심병원으로 쓰였던 가톨릭회관 건물을 끼고 돌게 된다. 따릉이를 세우고 언덕을 올라간다. 명동성당이다.

 

(좌) 가톨릭회관(중구 명동길 80). (우) 천주교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중구 명동길 74).

 

평소에는 가톨릭화관을 주로 찾기는 하지만 오늘은 회관에는 볼 일이 없어 명동성당 건물 앞으로 바로 계단을 타고 오른다. 날 맑은 날의 명동성당은 언제나 아름답다. 벽돌로 쌓아올린 오래 된 외벽이 푸른 하늘과 잘 어울린다. 가장 먼저 세워진 성당 건물은 아니지만(이 타이틀은 중림동 약현성당이 가지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가장 큰 교구의 주교좌 대성당이라는 상징성만큼은 불가침적인 존재이다.

 

오후 4시까지는 평일에도 성전 안을 열어 둔다고 하여 왔는데, 하필이면 마침 이 날이 혼배성사 추첨일이어서 성전 개방을 하지 않는단다. 오랜만에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앉아 있다가 나오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봉변이람. 이러한 연유로 인해 <세계 성당 방문기>는 이렇게 <국내 이곳저곳 답사기>로 방향을 틀게 되었고, 아쉬운 대로 성당 부지 내를 느긋하게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좌) 구 주교관(현 사도박물관)과 천주교 서울대교구청(뒤쪽 건물). (우) 명동성당 코스트홀.
(좌) 명동성당 교육관. (우) 지하성지 앞에서 본 명동성당 첨탑.
명동성당 지하성지 입구.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순교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명동성당을 한 바퀴 돌면서 기분 전환을 좀 한 뒤 다시 따릉이를 타러 나왔다. 다만 여기서부터는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져 버렸기 때문에, 따릉이 정거장에 서서 한동안 지도 앱을 열어 두고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명동성당 동편으로 나와 삼일대로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갈까? 아니면 을지로를 타고 덕수궁을 갈까? 이리저리 지도를 움직여 가며 고민하는데, 삼일대로를 타고 안국동 쪽으로 올라가면 운현궁과 천도교 대교당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운현궁이야 늘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곳인데, 그 앞에 항상 궁금했던 천도교 중앙대교당까지 있다면 이곳을 가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마침 운현궁에서 조금만 더 가면 한국 불교의 총본산이나 다름없는 조계사도 있으니, 이렇게 한 바퀴 돌면서 천주교/천도교/불교의 중심지를 꿰차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먹었으면 바로 페달을 밟아야 한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탑골공원(종로구 종로 99). 선별진료소가 차려져 있다.

 

삼일대로를 타고 청계천을 건너 한때 한국 최고층 건축물이었던 삼일빌딩을 지나 조금 더 북으로 가면 종로 운종가가 나온다. 명실상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종로로 나오자마자 바로 눈에 띄는 것은 애증의 탑골공원과 낙원상가. 대학교 1학년 때 어줍잖게 밴드를 하면서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낙원상가와, 그 때쯤 지나다니는 사람들로부터 옮았을 것이 분명한 다제내성 결핵의 기억이 선한 탑골공원. 10년이 지나 변한 것이라면, 탑골공원은 이제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폐쇄되어 있다는 것과 그 앞에 코로나 선별진료소가 차려져 있다는 것 정도다. 나머지는 놀라울 만큼,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낙원악기상가(종로구 삼일대로 428).

 

낙원악기상가를 지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기에는 인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삼일대로 자체는 건물을 통과하도록 나 있지만 인도는 주로 건물 밖으로 이어져 있으므로, 안전하게 달리기 위해서는 이쪽으로 나가는 편이 좋다. 한때는 서울에 몇 없는 고급 주상복합 건물로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주위에 노인들이 다수를 이루는 조용하고 쇠락한 골목이 되었다. 이곳도 언젠가는 한번 전반적으로 돌면서 답사하고자 한다.

 

낙원상가 건물을 지나오면 바로 오른쪽으로 학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기와를 얹은 문설주가 마치 궁궐의 굴뚝을 연상시키게 하는 이 학교는 서울교동초등학교. 학교 앞에 눈길이 가는 표지석 하나가 서 있다. 무려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초등학교인 셈이다. 처음 세워졌을 당시에는 왕실 종친과 양반 자제들만 다니던 학교였다고 하니, 어딘지 모르게 일본의 가쿠슈인을 떠올리게 한다. 신분제가 폐지된 지금에야 평범한 초등학교이기는 하지만. 도심공동화로 인하여 이 곳에 다니는 학생은 얼마 없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학교 이름인 '교동'은 향교가 있는 동네에 보통 붙던 이름인데, 실제로 고려 시절 이 근처(낙원동)에 향교가 있었다고 한다. 언제 세워졌다가 언제 훼철되었을지는 알 수 없어도 700년은 훌쩍 넘도록 학교의 명맥이 유지되는 흥미로운 지역이다. '교동'이라는 지명 자체는 이미 없어졌지만.

 

서울교동초등학교(구 관립교동소학교, 종로구 삼일대로 446).

서울교동초등학교 앞을 지나오면 바로 보이는 길다랗게 이어진 담벼락이 있다. 이곳이 바로 흥선대원군의 옛집이자 고종의 잠저인 운현궁이다. 이 날 같이 답사하기는 하였으나, 이날의 답사에 대해서는 예전에 적어 둔 글이 있으므로 이것으로 갈음하도록 한다.

 

 

[국내 여기저기 답사기] 서울 종로구 '운현궁'

이번 추석 연휴는 제법 길었다. 한 주의 휴일이라고는 목요일과 금요일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 날에도 휴가를 신청해 두고 무엇을 할지 고민해 보았다. 날씨가 요새 퍽 좋기도 하고, 슬슬

sankanisuiso.tistory.com

 

한갓진 운현궁을 돌아다니며 한껏 여유를 만끽한 다음에는, 바로 길을 건너면 있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으로 향했다. 1920년대 초에 완공된 천도교의 중심 건물이다. 지금은 중앙대교당 바로 옆에 있는 현대적 고층 건물인 수운회관까지 해서 천도교 본부로 친다. 주지하다시피 천도교의 뿌리는 동학에 있는데, 동학을 그토록 탄압하였던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쇠락한 옛집 맞은편에 천도교의 건물이 떡하니 위엄을 부리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모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손병희 교령이 일부러 이 곳을 본부 터로 골랐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천도교 본부 부지와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비표(종로구 삼일대로 457).
(좌) 천도교 중앙대교당. 아르누보 양식의 멋진 양관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36호. (우) 수운회관. 사실상의 천도교 본부이다.

 

민족종교로서 천도교의 공은 뚜렷하다. 당장 대교당이 면해 있는 도로 이름의 유래가 된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제일석에 앉은 것이 교령 손병희였고, 이후에도 수많은 독립운동의 순간에 천도교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어린이'라는 단어를 창시한 아동운동가 방정환 또한 천도교의 가르침에 따라 이와 같은 운동을 펼쳤다. 지금에야 규모도 많이 줄어들었고 한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종교는 아니게 되었지만, 그 위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새삼 느끼게 된다. 높은 빌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식민지 서울에서 민족종교의 본부로서 이렇듯 멋들어진 건물을 세웠다는 것은 식민공간의 조선인들에게는 남다르게 다가왔으리라.

 

경운동 민병옥 가옥(서울시 민속문화재 15호, 종로구 인사동10길 23-9).

천도교 중앙대교당 앞으로는 웬 고풍스럽지만 나름대로 관리는 되어 있는 듯한 한옥 한 채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다. 경운동 민병옥 가옥이라는 곳이란다. 친일파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그 아들 민병옥에게 주기 위하여 당대 조선 근대건축의 비조인 박길룡에게 의뢰하여 지은 집으로 최근까지 한식당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과연 조선 근대건축의 비조에게 의뢰한 만큼, 겉으로는 평범한 한옥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당시 막 서양식으로 개량되기 시작한 한옥의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문화재라고. 이를테면 화장실을 실내에 단다든가, 툇마루에 유리창을 단다든가 하는 식이다. 오늘날 우리가 듣기에는 퍽 자연스럽게 들리지만, 1930년대만 하더라도 저으기 혁신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사유지이기라도 한지 문은 굳게 닫혀 있어 내부를 들여다보기는 어려웠다. 

 

여기서는 발길을 돌려 안국동으로 나간다. 안국역 앞으로 율곡로를 따라 내려가는 도중 종로경찰서를 지난다.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이 늘상 드나들던 바로 그곳이다. 누군가 중요한 인물이 안에서 조사라도 받는지, 온갖 극우 유튜버들이 경찰서 앞에 진을 치고 제들 나름대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첫 두어 대의 핸드폰 카메라를 지나친 뒤에서야 비로소 그들의 존재를 알아챈 뒤로, 되도록 카메라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그들을 피해서 걸었다. 무슨 야료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종로경찰서를 지나면 곧바로 인사동 입구와 안국동 사거리를 마주한다. 아무리 평일 오후라지만, 인사동에 이처럼 사람이 없는 것을 보자니 입맛이 그리 달지는 않았다.

 

인사동길 입구(종로구 관훈동). 우거진 플라타너스 아래로 그늘이 졌다.

 

안국동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우정국로로 들어선다. 여기서부터는 견지동이다. 아까까지는 관훈동이었는데. 역시 한 블럭 건너 동이 휙휙 바뀌는 종로구답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척 고풍스러운데 주인은 없어 뵈는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영 범상치 않아 지도 앱을 켜고 무엇을 하던 건물인지 찾는다. 도로 앞 표지석에는 '한성도서주식회사 터'라고 되어 있다.

 

한성도서주식회사 터(구 구영숙소아과, 종로구 우정국로 65).

 

이 건물도 여러모로 곡절이 많은 곳이다. 본래 이곳에 가장 먼저 들어선 근대적 사업체는 출판사인 '한성도서주식회사'다. 3.1 운동 이후 문화통치기에 접어든 식민지 경성에서 조선인의 손으로 세워진 대표적인 출판사 중 하나로,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바로 아는 최남선, 심훈, 이광수 등의 책들을 내며 1957년까지 버텨냈다. 특히 브나로드 운동 당시의 모습을 생생한 필체로 그려낸 (안산 시민의 필독서) 심훈의 <상록수>가 바로 이 한성도서주식회사를 통해서 세상에 나온 책들 중 하나이다. 그 이후 한성도서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37년부터 이곳에 새로 건물을 짓고 둥지를 튼 것은 한국 최초의 소아과의사이자 해방 후 유한양행 사장을 지낸 구영숙이 운영하던 '구영숙소아과'였다. 그때 지은 건물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인데, 놀랍게도 이 건물을 설계한 이 역시 앞에서 적은 민병옥 가옥의 설계자인 박길룡 선생이다. 이렇듯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크고 작은 건물들을 남겨 오늘날의 시민들에게도 말을 걸고 있는 셈이다. 나중에 이런저런 글을 찾아보다 보니, 부지불식 간에 그의 작품들을 이미 여럿 다녀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민병옥 가옥과 구 구영숙소아과 건물뿐만 아니라, 종로구 혜화동의 경성제국대학 본관, 그리고 성북구 성북동의 보화각(현 간송미술관) 등이다. 새삼 대단한 양반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사무친다(구 구영숙소아과 건물의 상세는 이 블로그 글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므로, 일독을 권한다).

 

한성도서주식회사 건물부터 이미 승복 가게 안내판이라든지, 조계종 관련 단체의 간판 같은 것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짐작하다시피 여기서부터는 불교의 공간이다. 다만 그 구석에 그리 크지 않게 자리하고 있는, 그러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한옥 하나가 덩그마니 서 있다.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의 무대가 된 곳, 우정총국이다.

 

우정총국(종로구 우정국로 59).

 

이곳에서 일어난 급진 개화파의 쿠데타가 3일 만에 수포로 돌아가면서 우정총국은 설치된 지 나흘 만에 폐지되었지만(우정총국의 총판이었던 홍영식이 이 쿠데타의 중심 인물이었던 탓이다), 건물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놀랍게도 이런저런 기록들을 들춰 보노라면 건물 자체의 역사는 임진왜란 이후까지도 올라가는 모양인데, 당시에는 궁중 의료기관 중 하나인 전의감의 부속 건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미국과 일본을 다녀온 유능한 관료 홍영식이 우정 사업의 중요성을 고종에게 건의하여 세워진 이 관청의 개국 축하연에서 피의 반란이 일어났으니, 그 뒤로 '개화'의 '개' 자만 들어도 고종 이하 관료들이 치를 떨고 싫어했을 것은 불이 보듯 뻔하다. 전우총국으로 개정되어 다시 우편사업을 시작하나 했더니 일본에 전신권을 빼앗기고, 그 이후로는 학교나 관사, 심지어는 개인주택으로까지 쓰이다가 최근에야 제 이름을 찾았다고 하니 (임진왜란 직후까지 거슬러올라간다는 기록을 신뢰한다고 했을 때) 거진 400년이나 되는 영욕의 세월을 버텨낸 근성의 건물인 셈이다.

 

우정총국 건물 뒤에 세워져 있는 충정공 민영환의 동상을 일별하고 뒤로 돌면, 퍽 현대적인 유리벽 건물이 먼저 눈에 띈다. 불교중앙박물관 건물이다. 대한불교조계종 본부가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아까 지나온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청(2014)이나 수운회관(1970)에 비하면 무척 신식 건물로 보이지만, 건립된 날짜는 2007년으로 의외로 서울대교구청 신청사보다 오래 된 건물이다. 여기서부터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인 조계사의 경내인데, 사실 조계사의 진정한 볼거리는 그로부터 조금 더 남쪽으로 돌아가야 나온다.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종로구 우정국로 55).

 

국내에서 이처럼 덩치가 큰 목조 건축물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당연하다. 조계사 대웅전은 단층 목조 건축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 역사가 긴 건물은 아니다. 본래 증산도 계열인 보천교의 총본부 '십일전'이었던 것을 보천교가 망하면서 헐값에 사들여 이리로 옮겨 세우고 불교적인 건물로 용도변경한 것인데,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흔히 아는 절집 대웅전의 모습이라기에는 차라리 왕조의 궁궐을 연상케 한다. 전각 안에 모셔진 삼존불 또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기 때문에 살짝 들여다본 사람은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대웅전 앞에 우뚝 서 있는 400년 넘은 회화나무나 대웅전 오른쪽에 고고하게 서 있는 500년 넘은 백송이 이 풍경과 어우러져서 불자들뿐 아니라 이곳을 찾는 뭇 시민들에게 주는 웅장함은 엄청나다. 이 백송 때문에 이 동네 이름이 '수송동壽松洞'이 될 정도니 정말 오랫동안 서울 사람들에게 큰 의미로서 자리잡아 온 셈이다.

 

다만 조계사의 역사는 다소 혼란한 감이 있다. 조선 말, 그러니까 제국 시대에 종교의 자유가 현실화됨에 따라 그 동안 억눌려 있던 승가도 산문을 나와 다시 민중 속으로 파고들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조계사 바로 옆자리에 '각황사'라는 절을 짓고 불교 총본산으로 삼고자 했는데, 하필 그즈음 해서 나라가 망하고 각황사를 중심으로 조선 불교를 통할하려던 움직임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린다는 명목으로 일본식 절 '박문사'를 짓고 이로써 조선불교를 통할하고자 하자, 불교 인사들이 뜻을 모아 당시 망한 지 얼마 안 되었던 보천교 십일전 건물을 이리로 옮겨 짓고, 이미 일제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 일본식으로 개축되기까지 했던 각황사 부지를 팔아 북한산(삼각산)에 있던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태로 창건한 것이 오늘의 조계사이다. 그야말로 대혼란의 시대에 세워진 절인 셈이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조계사에서 제공하는 안내 팜플렛에는 일제 강점기 적의 역사에 대해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적고 있다.

 

서울 한복판,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가운데에서 고고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처님의 집을 등지고,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안국동 사거리에서 다시 따릉이를 빌려 길을 나선다. 최근 각종 언론에서 이슈가 됐던 예의 그 '송현동 땅'을 지나는 길, 담벼락 너머로 내다보이는 인왕산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겸재가 <인왕제색도>를 그릴 적에는 이 지역도 다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으리라.

 

소위 '송현동 땅'에서 바라본 인왕산(종로구 율곡로 24 부근).

 

다리를 풀기 위해 페달은 천천히 밟는다. 내리막길을 따라 주한일본대사관 앞도 지나고, 동십자각과 의정부 앞도 지나면 이제 광화문 광장이다. 언제나 봐도 정겨운 광화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종로에 오면 어쩐지 꼭 광화문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독특한 성벽을 가지고 있다. 그야 그럴 것이, 예쁘니까. 이런저런 아시아권 나라의 궁궐과 문루를 보아 왔지만, 아무래도 한국 사람인 나는 한국식 문을 보면 그렇게도 즐겁다.

 

경복궁 광화문(종로구 사직로 161).

 

광화문 앞을 지나면 이제는 사직로를 따라 죽 달리면 된다. '통인동 커피공방'을 지나고, 사직단공원을 지나 죽 달린다. 생각해 보면 사직단공원도 한번쯤 가 볼 수 있을 텐데, 아직까지는 계속 시간이 나지 않아 가 보지 못했다. 언젠가는 가 봐야지. 사직단공원도 지나고, 사직터널도 지나 죽 내리막길을 달리다 보면 이제 다시 서대문구다. 박완서 선생이 전후 어린 시절을 보냈던, <엄마의 말뚝>과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그 현저동이다. 지금은 전부 아파트가 들어서 상전벽해를 절감케 하는 곳이지만, 현저동으로 접어들었다면 이제 누구나 한 번씩은 들어 보았을 명소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독립문이다.

독립문에서부터 서대문형무소까지는 서대문독립공원으로 성지화되어 있다. 독립문은 그 시작점인 셈이다. 갑오개혁 이후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한다는 의미로 청나라 사신이 한성으로 들어올 때 맞이하던 문인 영은문을 헐어 기단만 남기고 지은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재미있게도 조선총독부는 이것이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겨 조선을 독립시켜 주었다는 뜻'이라는 프로파간다로 활용하기 위해 애지중지하였다고 하는데, 결국에는 서대문독립공원 성지화를 통해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모든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문이 되었으니 우스운 일이다. 서대문구에서는 구의 동쪽 끝에 서 있는 이 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구 이름은 '서대문'인데도 구 마크에는 독립문을 떡하니 그려 놓을 정도다. 

 

여기서부터 집으로 돌아가려면 금화터널을 통해 연세대 앞으로 나가야 한다.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지옥이다. 금화터널로 가는 경사로의 경사가 정말 농담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밀면서 씩씩거리고 겨우 어기적어기적 걸어올라가는 옆으로 자동차가 아무렇지도 않게 씽씽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분노가 치민다. 이 망할 언덕배기를 편하게 다니라는 명목으로 금화터널이 뚫리고 사직터널로부터 금화터널까지 현저고가차도가 세워졌다는 점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탓에 독립문이 70미터나 북쪽으로 통째로 이전된 것은 참 뭐라 할 수 없는 아쉬움이 든다.

 

이렇게 해서 대여섯 시간에 걸친 이날의 종로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마음껏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방도가 없는 상황이라지만 이렇게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도 손쉽게 여행 기분을 내며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은 퍽 좋은 일이다.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모르는 서울을, 때로는 30년 남짓 서울에서 살아온 아내조차도 모르는 서울을 알아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