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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 여기저기 답사기

[국내 여기저기 답사기] 서울 강남구 '선정릉'

by 집너구리 2021. 9. 11.

아내가 무언가 일이 있어서 바깥에 나갈 일이 있을 때면 나도 어쩐지 마음이 들뜬다. 아내가 자기 용무를 처리하는 시간 동안 나는 그 근처를 나름대로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선릉 근처로 가게 된 아내를 데려다 주러 차를 빌렸다. 결혼식 초반부터 식이 끝날 때까지 죽 있어야 하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대략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남았는데, 마침 이 근처에 늘 가 보고 싶었지만 구실이 없었던 '선정릉'이 있어서 한번 다녀오기로 했다.

선정릉 서측 담벼락 너머로 나이를 가늠하기조차 힘든 나무들이 빽빽하다.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가운데, 조선 9대 임금 성종成宗과 그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 그 아들인 11대 임금 중종中宗의 세 사람이 묻혀 있는 곳을 가리켜 각각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이라고 한다. 지하철 2호선의 '선릉역'과 지하철 9호선의 '선정릉역'은 모두 이 무덤들에서 이름을 따 온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이곳 강남 한복판에 난데없이 떡하니 담장과 나무로 뒤덮인 능침이 자리잡고 있다는 그 갭은 쉽사리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정릉의 출입구는 남동쪽 딱 한 곳만 있다. 따라서 선릉역에서 내렸든, 선정릉역에서 내렸든 무조건 담벼락을 끼고 한참을 이동해야 비로소 입구에 다다를 수 있다. 입장료는 강남구민일 경우 500원, 타 지역에서 온 사람일 경우 1,000원이다. 늘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싸도 되나?' 싶을 수준의 입장료다. 보통 이런 문화유산을 관람하러 들어갈 적에는 입구에서 직원이 직접 표를 받고 회수권 부분을 찢은 뒤 돌려주곤 했는데, 코로나 때문인지는 몰라도 QR 코드를 태그하는 방식으로 변화해 있는 것이 다소 신선했다. 입구 부근에는 여느 문화유산과 다를 바 없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데, 흥미롭게도 그 앞에 지형을 재현하여 직접 만져 볼 수 있는 안내판도 있었다. 점자가 찍혀 있는 것을 보니 시각장애인들이 이곳의 모습을 직접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게 준비한 것인 모양이다. 입구에서 한국어로 된 팜플렛 한 장을 집어들고 안으로 들어간다.

 

중종의 무덤, 정릉.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서 한 방향으로 걷기에 협조해 주십시오'라는 현수막 문구를 곁눈질하면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문간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오른쪽 구석에 중종의 능인 정릉이 나타난다. 중종은 이곳에 혼자 묻혀 있다. 정확히는 '묻혀 있었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저 높은 곳에 있는 봉분 속에는 중종의 시신이 없기 때문이다. 서쪽에 자리잡은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능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고 하니, 임진왜란 당시의 혼란기에 일본 병사들이 한양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이곳 선정릉을 지나게 되었고, 그때 일본군이 이 곳에 묻혀 있던 세 사람의 시신을 도굴하여 어디론가 빼돌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종과 정현왕후는 시신을 불태워 버린 듯한 흔적마저 발견되었다고 한다. 충과 효를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조선의 특성상, 당시 국왕이었던 선조의 조부 중종의 시신은 훌륭한 협상거리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쟁이 조선의 승리로 끝난 뒤 한참 후에야 대마도주의 중재로 재수교 협의가 시작되면서 조선은 당연하게도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범인과 빼돌린 선왕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일본 측에 요구했다. 대마도주가 이에 응해서 일본인 두 명과 인골 두 구를 보낸 모양인데, 범인이라고 압송된 두 일본인은 자기는 죽어도 그런 짓은 한 적이 없다며 펄펄 뛰었고, 인골도 중종을 모신 적이 있었고 당시까지 살아남았던 늙은 궁녀들에게 확인해 보니 영 생김새가 딴판인 다른 사람의 유골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중간에서 대마도주가 또 꼼수를 부린 셈인데, 조선 정부는 인골에 대한 책임은 더 묻지 않는 대신 압송되어 온 두 일본인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모두 처형했단다. 그래서 지금도 선릉과 정릉은 겉은 번드르르하나 정작 주인이 없는 무덤이 되었다나.

 

비록 가묘로 남았어도 왕릉은 왕릉인지라, 전통적인 왕릉이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다. 봉분과 난간, 석물들을 비롯하여 상서로운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과 그로부터 정자각까지 쭉 이어지는 향로(귀신이 다니는 길)와 어로(임금이 다니는 길),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과 왕릉 주인의 내력을 알리는 비각까지. 정석적인 단릉(單陵)의 형태를 띠고 있다. 

 

홍살문. '붉은 화살이 꽂힌 문'이라는 뜻인데, 한자+우리말+한자라는 독특한 구성을 가진 단어이다.
보통 궁궐 건축에서는 임금의 '어로'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지만, 왕릉에서는 선왕의 혼을 달래는 향이 지나가는 '향로'가 한 단 위에 있다.
제향을 드리는 곳인 정자각. 이 안에는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제상이 전시되어 있다.
정자각에서 능침을 바라보고 우측에는 비각이 있다. 전서체로 쓰인 '조선국 중종대왕 정릉'이라는 글씨가 멋스럽다.

정릉은 봉분 근처까지 접근하는 것을 막아 두었다. 울타리도 울타리거니와, 주위에 나무가 빽빽하게 심겨 있고 길이 전혀 나 있지 않다. 능침 서쪽으로 나 있는 길을 타고 쭉 북쪽으로 올라간다. 작은 실개천이 부지 안에 흐르고, 점점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바로 뒤를 돌아보면 강남의 높디높은 빌딩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데, 눈앞에는 우거진 나무들, 주위에는 온통 새 소리와 매미 소리뿐이니 이것이야말로 별천지에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차 소리와 사람 훤화로 가득했던 도회의 익숙한 소리가 이곳에까지는 차마 발길을 들이지 못한 듯했다.

이게 어딜 봐서 강남 한복판이예요. 그냥 수목원이지.

제일 북쪽 끝 울타리에 다다르고 나서도 한참을 더 서남쪽으로 걸어 내려가다 보면, 갑자기 오른쪽으로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이 때 놓치지 않고 곁다리로 난 작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정현왕후가 묻힌 봉분을 만날 수 있다. 선릉은 정현왕후의 무덤과 성종의 무덤이 별도로 조성되어 있는데, 정현왕후의 봉분이 더 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마치 남편을 굽어보는 느낌을 준다. 여기서부터가 선릉 권역이다.

선릉의 정현왕후 봉분. 국왕과 거의 같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봉분의 크기가 조금 작은 느낌이다.

'자순대비'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정현왕후는 투기 때문에 용안에 10차선 고속도로를 냈던 걸로 유명한 그 폐비 윤씨가 쫓겨난 이후 성종의 정실이 된 사람인데, 폐비와 성종의 큰아들인 연산군을 마치 자신의 아들인 양 극진하게 키웠던 모양이다. 연산군이 장성할 때까지도 자기 어머니가 정현왕후라고 철석같이 믿었다는 것을 감안한 추측이다. 연산군이 전횡을 일삼을 무렵에는 숨죽여 지내던 그는, 반정이 일어나고 천하가 뒤집히자 친아들 진성대군(중종)을 보위에 올리는 것을 추인하고 그 뒤로도 왕실의 어른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다. 그런 사람의 무덤이라 그런지, 어쩐지 아들 중종의 무덤보다 어떤 위엄 같은 것이 더욱 서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서 내리막을 타고 죽 걸어내려가다 보면, 역시나 곁다리로 난 비탈길 하나가 보인다. 놓치지 않고 걸어 올라가면 마침내 성종의 묘역이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언덕으로 나오게 된다. 

성종의 묘역을 파노라마로 찍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형상이다.
성종 묘역 옆에서 내려다본 정자각과 비각, 수복방이다. 조금 더 걸어 내려와 정자각도 옆에서 찍어 보았다. 정자각 옆은 수랏간이다.
능을 관리하던 말단 관리들이 숙식하던 수복방. 아래쪽까지 내려와서 홍살문 앞에서 한 번 더 선릉을 올려다본다.
조선국 성종대왕 선릉. 정현왕후는 '좌강(좌측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문화관은 코로나 때문에 휴관이다.

성종의 묘역까지 모두 둘러보고 입구를 향해 나가는 길에는 현대적으로 지어진 역사문화관이 자리잡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어린 학생들로 북적였겠으나, 코로나 때문에 아쉽게도 관람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 앞을 지나쳐서 좀 더 걸으면 단청을 칠하지 않은 정갈한 형태의 담벼락이 나타난다. 제사를 준비하는 곳인 '재실'이다. 능참봉을 비롯한 관리들이 이 곳에서 일하며 능을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했던, 오늘날로 치자면 관리사무소 같은 곳이다. 잠시 둘러보고 나서면, 이윽고 아까 들어왔던 출입구로 다시 나오게 된다.

선정릉 재실의 외부.
전형적인 조선식 소규모 관청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앙의 본전과 이를 둘러싼 행랑의 구성이다. 행랑 담벼락 너머로 강남의 건물들이 내다보인다.

왕과 왕후가 한데 잠들어 있는 합장릉合葬陵(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英陵'), 왕과 왕후를 한 언덕 위에 위아래로 장사지낸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에 이어, 이번 답사에서는 왕과 왕후를 한 언덕 위에 두 갈래로 장사지낸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과 왕 혼자만 장사지낸 단릉單陵의 양식을 모두 관찰할 수 있었다. 비단 이런 역사 마니아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더라도,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은 이토록 조용하고 고즈넉한 숲 속을 돌아다니며 휴식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임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 평일은 오죽하랴. 근처에 가실 일이 있는 분들은 꼭 한 번씩 들러 보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