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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 여기저기 답사기

[국내 여기저기 답사기] 서울 종로구 '운현궁'

by 집너구리 2021. 9. 26.

이번 추석 연휴는 제법 길었다. 한 주의 휴일이라고는 목요일과 금요일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 날에도 휴가를 신청해 두고 무엇을 할지 고민해 보았다. 날씨가 요새 퍽 좋기도 하고, 슬슬 여행 욕구가 다시 올라오고 있는 상황에 지금이야말로 자전거를 타고 조금 멀리까지 나가 보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명동으로 향한 것은 오후 2시경. 가을 햇볕은 따가웠지만 기온도 높지 않고 바람도 선선히 불어, 자전거 타기에는 제격의 날씨였다.

 

종로 일주를 다녀온 글은 나중에 시리즈로 몰아서 쓸 생각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었던 한 곳을 따로 적어 보기로 한다. 명동성당을 들렀다가 바로 북쪽으로 향해 들어가게 된 흥선대원군의 집, '운현궁雲峴宮'이다.

 

운현궁의 정문. 현판의 글씨가 마치 날아갈 듯 멋들어지다.

 

'운현雲峴'을 풀이하면 구름고개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구름재'라고도 한다. 꼭 지금의 운현궁에서부터 현대건설 사옥으로 넘어가는 길을 가리켜 이렇게 불렀다는데, 오늘날로 치면 기상청인 '서운관'이 있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구름이 끼고 비가 오기만 하면 그렇게 길이 질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실제로 이 동네 이름은 지금도 '운니동雲泥洞'이다). 동네 이름을 따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는 하지만, 시대의 풍운아였던 흥선대원군이 거주하던 집다운 이름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의 운현궁은 많은 부분이 깎이고 잘려나간 뒤 남은 부분으로, 대강 지금의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자리부터 덕성여자대학교 종로캠퍼스 부지까지는 전부 운현궁 땅이었다나. 사대문 내에서 '담벼락이 수 리에 달한다'는 기록이 남을 만큼 넓었으니 가히 조선왕조의 5대 궁궐에도 맞먹을 만큼의 권세를 자랑했던 대원군의 위세를 느낄 수 있다. 지금이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저 서울에 널리고 널린 한옥들 중 하나로 취급받는 듯하다. 관람료가 무료인데도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란 거의 없다. 

운현궁 수직사守直舍

정문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마주할 수 있는 건물이 '수직사'다. 당번을 정해서 밤새도록 공공기관 건물을 지키는 것을 보통 '당직'이라고 하는데, '수직'이라는 단어 또한 이 단어와 유래가 거의 유사하다. 말하자면 운현궁 경비를 서던 자들이 거처하던 곳이 이곳 수직사이다. 늘 느끼지만 조선식 한옥방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이렇게 작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수직사쯤 되면 제법 덩치가 되는 사람들이 기거했을 텐데도 여느 방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랫사람들이라 공간을 넓게 줄 필요가 없었나?

 

수직사 앞을 지나면 바로 이어지는 솟을대문이 하나 있다. 한옥의 구조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문으로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머슴들이나 청지기들이 기거하던 행랑채, 그리고 그 안쪽이 남주인이 기거하는 사랑채, 가장 안쪽이 여주인이 기거하는 안채인 식이다. 방금 지나온 수직사가 규모로 보나 쓰임새로 보나 행랑채에 해당할 테니, 다음으로 이어지는 곳은 사랑채일 것이다.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곳이 흥선대원군이 주로 기거하던 사랑채 '노안당'이다.

운현궁 노안당老安堂. 대원군은 이곳에서 주로 머물렀다.

<논어>의 '노자안지老者安之', 즉 '노인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글귀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이곳 노안당에서 흥선대원군은 수많은 당대의 인사들을 만나고 또 인재들을 불러들였을 것이다. 이 건물이 세워진 것이 고종 원년의 일이니, 이곳에서 약 10년 동안 대원군에 의한 섭정 정치가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얼마나 많은 당대의 양반들이 이곳 마룻바닥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을까. 호화롭지는 않지만 위엄이 느껴지는 건물이었다.

 

내부에는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해 두었다. 생각보다 안쪽으로 제법 깊은 건물이다.
대원군의 스승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쓰인 현판들도 눈에 띈다. 대원군의 수집품인가?

 

내부에는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해 두었는데, 내부를 죽 둘러보다가 무언가 이채로운 것들이 눈에 띄었다. 건물의 양 끄트머리 안쪽에 달려 있는 낡디낡은 현판이 그것이다. 남쪽 문간에 달린 '영화루迎和樓' 석 자, 그리고 서쪽 문간에 대원군의 자리에 앉으면 바로 보이도록 달린 '무량수각无量壽閣' 넉 자. 우리에게 친숙히 알려져 있는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로 적힌 글씨들이다. 눈여겨보니 노안당의 현판에도 '서위석파선생書爲石破先生'(석파 선생을 위하여 쓰다)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고, 김정희가 스스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곤 했던 '노완老阮'이라는 서명이 적혀 있다. 그러니까 김정희의 글씨가 이 노안당에만 세 점이나 존재하는 셈이다.

 

아무리 천하의 김정희이기로서니 감히 주상의 생부인 대원군을 가벼이 '석파 선생'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아서 인터넷을 찾아봤더니, 김정희가 바로 젊은 시절 아직 '흥선군'이었던 석파 이하응의 스승이었다는 것이다. 무려 석파가 그토록 잘 쳤다고 하는 난초 그림의 스승이라고. 추사는 제자이자 오촌 조카였던 석파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고종 원년에 중수되기 시작한 운현궁의 글씨를 직접 써 주었다고까지 이야기하기는 어렵고, 대원군이 운현궁을 개수하며 스승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각의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생각보다 추사가 최근 사람이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돌아가신 스승의 글씨를 한 자 한 자 모아서까지 제 집의 현판에 하나씩 갖다 달았던 대원군의 추사 사랑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마냥 역사 속 사람이라고만 느껴졌던 그가 퍽 가까운 듯 다가왔다.

 

운현궁의 제1안채인 노락당老樂堂. 겹겹이 부엌과 행랑, 가재도구들로 둘러싸여 있다.

노안당 뒤편으로 난 쪽문을 통해 노안당 권역을 벗어나면 첫 번째 안채인 노락당이 나타난다. 종친의 집이라지만 작은 왕궁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위엄이 서려 있는 건물이다. 본채의 양 옆으로는 반지하로 난 작은 부엌들이 있고 갖가지 가재도구들이 놓여 있다. 당시에 쓰이던 물건들 자체는 아니겠지만, 대략 이러한 용도로 쓰였던 공간임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짚어넘겨 본다. 이곳은 안채이기는 하나 주로 가족 행사용으로 많이 쓰였다는데, 바로 양 옆으로 이토록 부엌이 번듯하게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그럴싸한 용도이지 싶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흥선대원군 가족의 가장 큰 행사는 둘째아들 고종과 며느리 명성황후의 가례였다고. 길 건너에 궁이 번듯히 있는데 왜 굳이 여기서 가례를 올렸을까 싶긴 했는데, 제대로 된 후견인도 없고 양자로 입적되어 왕이 된 고종이었으니만큼 생부모의 입김이 왕실 행사에도 많이 작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만 해 보았다.

 

노안당 앞의 수석과 정원. 정갈한 느낌을 준다.
노락당 후원에서 찍은 사진. 낮은 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안채 뒤편의 모습과, 안채 행랑 뒤로 펼쳐진 구름의 모습이 멋들어진다.

다소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운현궁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의외로 정원이나 정경이 제법 말쑥하고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색하지 않으면서도 조화가 잘 어우러져 있고, 다만 널찍한 맛은 다소 덜한 이 정원이 당시 조선 말에 정비된 정원의 형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세월이 가면서 점차 변해 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종로 한복판에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규모 큰 사대부 저택의 정원 모습을 편린이나마 들여다보는 데 성공한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인 걸까. 안채 뒤편의 내 허리보다 가까스로 높을 듯한 낮은 문을 낑낑대고 지나 후원으로 나온다.

 

운현궁의 제2안채인 '이로당二老堂'. 중정을 가운데 두고 네모지게 그 주위를 둘러싼 형태의 공간이다.

후원으로 돌아나오면 운현궁 권역에서 관람할 수 있는 마지막 건물인 '이로당'이 나온다. '두 노인의 집'이라는 뜻인데, 사랑채부터 안채 두 군데까지 모두 '늙을 로'자를 집어넣어 이름을 지은 것을 보니 흥선대원군은 어지간히 그 한자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말 그대로 대원군과 부대부인이 일상을 보내는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이곳의 현판도 추사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것이다. 흥미롭게도 '집 당堂' 자의 지붕에 붙은 두 획의 점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한 쌍의 원앙처럼 생겼다. 추사가 살아서 이 글씨를 써 주었다면, 분명 제자이자 조카인 대원군과 그 부인이 평생토록 알콩달콩 서로를 위하며 살라는 마음을 담아 이렇게 글씨를 적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런저런 사건사고가 있었고 서로 종교가 달랐음에도(부대부인은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나름대로 금슬은 좋았다고 하니 추사로서는 (살아서 이 글씨를 써 준 것은 아니지만) 다행이라 하겠다. 아쉽게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중정에 설 수 있는 기회는 갖지 못했지만, 푸른 하늘 아래에서 이로당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다보고 있자니 퍽 기분이 좋아졌다.

 

운현궁 양관. 지금은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으로 쓰여, 관광객은 들어갈 수 없다.
운현궁 유물전시관과 마당.

이로당 앞에서 멀리 내다보이는 운현궁 양관(지금은 관광객은 들어갈 수 없는 사유지이다)을 등지고 담장에 난 문을 지나서 다시 마당으로 나오니, 유물전시관이 일본문화원 쪽에 면해 있다. 운현궁의 전체 배치와 대원군 부부와 관련된 전시물품 일부를 전시하고 있었다. 전체 배치도는 볼 만 했고 유물 설명도 제법 충실했지만, 진품 유물들을 보고 싶다면 고궁박물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 등 유관 기관에 찾아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김동인의 명작 <운현궁의 봄>에서 주인공 하응은 다 우그러진 갓과 해진 옷을 입고 술에 취해 운종가를 배회하며, 언젠가 크게 될 미래의 자신을 마음 속으로 야심차게 그려내곤 한다. 물론 실제 인물인 흥선대원군이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낮추고 다닌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 중론이기는 하나, 그가 야심 없는 왕족인 척하며 기어코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그 뒤로도 조선 말 격동기의 거의 모든 순간에 영향력을 발휘했던 그 모든 영욕의 순간들을 함께 한 곳이 바로 이 운현궁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대대로 이어지던 주인은 모두 사라졌고 이제 노안당을 찾는 곳은 호기심 많은 관광객뿐이라지만, 구석구석에 묻어 있는 대원군과 그 식솔들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느끼고 가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