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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기

[방문기] 경기도 안산시 '아보스카'

by 집너구리 2022. 9. 26.

(네이버 지도에는 상호가 표시되지만, 카카오지도에는 상호가 표시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주소로 등록하였다. 네이버 지도 정보는 이 링크를 참조하시길.)

 

나의 살던 고향은 매연꽃 피는 고장 안산시였다. 공단에서 일하시는 아버지 덕에 주위에 외국인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고 느끼며 살아왔다. 그렇게 30여 년이 지난 지금 안산시의 외국인 인구는 시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고 있다. 이렇게 안산에 들어와 살고 있는 외국인 이웃들은 공장 노동자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사할린에서 들어온 동포들이나 중앙아시아계 민족들, 동남아시아나 서남아시아 계통 민족들 등 그 뿌리가 정말 다양하고 각 집단이 거주하는 곳도 시 전체에 다양하게 흩어져 있다. 그 중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에서부터 상록수역까지 이어지는 사1동 지역에는 사할린 동포들이 예전부터 모여서 사는 이른바 '고향마을'이라는 곳이 존재해 왔다. 그리고 입소문이 조금씩 퍼진 모양인지, 지금은 사할린 동포들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나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 쪽의 이주민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 되었다. 

 

재미있게도 '아보스카'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머니였다. 결혼하면서 안산을 떠난 나와 달리 본가 식구들은 여전히 안산에 살고 있는데, 어머니의 동네 지인이 요즈음은 '러시아 빵집'에서만 빵을 산다는 것이다. 빵도 담백하고 맛있는데 심지어 값도 싸다나. 궁금해서 안 가 볼 수 없다. 본가에 놀러 간 김에 석호초등학교 앞에 있는 러시아 빵집 '아보스카'로 향한다.

상록구청 앞 사거리, 석호초등학교 앞에서 단차선 이면도로로 빠지는 길을 타고 조금 가다 보면 '아보스카'가 나온다. 무려 아침 여섯 시에 문을 열어서 밤 열 시에 닫는다고 한다. 간판도 깔끔하고, 리뷰도 몇 개 없는 것을 보니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가게인 것 같다. 근처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간다.

일단 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는 빵이다. 납작한 중앙아시아식 식사빵부터 시작해서 네모난 식빵, 계란물을 발라 구운 바게트 비슷하게 생긴 빵 등이 가장 앞에 놓여 있다. 요즈음 빵이 워낙에 비싸서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빵을 사 먹으려 해도 기본이 3천 원 정도는 드는데, 일단 저 네모지고 큼직한 식빵 한 덩이가 2,500원이다. 바게트 비슷하게 생긴 길쭉한 빵은 브리오슈라는데, 팔뚝만한 빵 한 덩이에 이천 원. 납작한 빵도 2천 원부터 시작이다. 값이 싸도 너무 싸다. 혹해서 여러 개 사게 될 법한 비주얼이기도 하고. 

 

식사빵 외에도 과자빵류가 다양하게 놓여 있다. 라즈베리 조림이 들어간 페이스트리, 동그란 피자빵, 고기와 감자로 속을 채운 빵, 달걀을 넣고 구운 빵 등 종류가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이 빵들도 큼지막한 크기에 비해서는 그리 비싸지 않다. 내 얼굴보다 더 큰 저 피자빵 한 덩이에 이천오백 원부터 시작이다. 뭘 살까 하고 고민하다가 고기감자빵과 라즈베리 페이스트리, 피자빵 이렇게 구매하기로 한다. 무슨 빵이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네이버 지도 리뷰에서는 직원이 한국말을 잘 한다고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 오늘따라 직원분이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라 자세히 물어보지는 못했다. 

 

빵을 다 사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는 정말 중앙아시아 음식을 다양하게 들여놓은 슈퍼마켓 같은 느낌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빵뿐만 아니라 다양한 음식들이 냉장고 안에 진열되어 있다. 전부 키릴 문자로 적혀 있어 뭘 팔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정확히는 대강 읽을 수는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다만 짐작이 가는 것들은 몇 가지가 있는데, 바로 사진 제일 왼쪽 아래에 있는 당근김치 '마르코프차'이다. 야채로 만든 밑반찬도 많이 있고,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생선들이다. 훈제 생선도 있고, 그냥 간고등어 비슷하게 생긴 녀석들도 진공포장되어 있다. 가장 신기한 것은 빵 진열대 옆에 덮개도 없이 쌓여 있는 건생선인데, 바이칼호 특산물인 생선 '오물омуль'인 듯하다.

 

구석에 놓여 있는 냉동고에는 만두 종류가 가득 있다. 구소련에서 무슨 만두를 먹는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역시나 글자만 봐서는 무슨 만두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 아래에는 거대한 냉동 고기들이 있다. 무슨 고기인지, 무슨 부위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가 빵 구경을 하는 동안에 동네 사람인 듯한 아저씨 하나가 거대한 고깃덩어리 하나를 사 갔다. 

이렇게 소시지 종류도 많고, 치즈 종류와 맥주류도 많이 있다. 어느 나라에서 만든 것인지까지는 읽을 수가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이 녀석들이 그 말로만 듣던 '칼바싸'인 모양이다.

술고래 친구들이 정말 좋아할 만한 코너. 보드카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보니 구소련권에서 이렇게 다양한 보드카가 나오는지도 당연하지만 알지 못했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으려나? 다음에 친구들 선물로 사 가는 것도 좋겠다.

 

이렇게 돌아보고 나서 빵을 골라서 사 가기로 했는데, 본가 식구들이 먹을 빵과 우리 부부가 먹을 빵을 각각 골랐더니 총 여덟 덩어리가 나왔다. 그렇게 샀는데도 거진 2만 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왠지 득 본 기분.

 

예시로 찍어 본 이 빵. 담백한 기본빵 반죽을 여덟 개로 꼰 뒤, 그 틈바구니에 커스터드(추정)를 넣어서 구운 빵이다. 커스터드가 들어 있다면 제법 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생각보다 담백하다. 기본적으로 빵 반죽이 담백하기 때문인 듯하다. 커스터드도 들척지근한 단맛이 아닌, 딱 적절한 수준의 상쾌한 단맛을 준다. 은은히 올라오는 계란 향기는 덤이다. 두 번에 나눠서 아침 식사로 먹었는데, 아침에 먹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사진을 찍지 않았지만 각진 식빵도 먹어 보았다. 겉이 무척 바삭하고 노릇노릇한 데 반해, 안쪽을 잘라 보니 무척 쫄깃쫄깃한 질감에 촉촉한 속이 나타난다. 밀가루가 다른가? 얇게 잘라서 토스트로 만든 뒤, 버터와 카야잼을 바르면 카야토스트 완성이다. 구소련식 식빵으로 만들어낸 싱가포르의 소울푸드 탄생이다. 어떻게 보면 동서양의 합일이다. 훌륭한 맛이다. 빵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아무리 먹어도 전혀 질리지 않는다. 훌륭하다.

 

이렇게 안산에 갈 때마다 들러야 할 가게가 하나 또 생겼다. 가격도 싼데 빵이 더할 나위 없이 맛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어떻게 지나가리오.

 

 

추신.

독립국가연합식 빵집을 소개하기는 하였으나, 이것이 현재의 러시아 정권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옹호론으로도 읽혀선 안 될 것이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독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덧붙인다. 우크라이나는 승리할 것이고, 러시아 정권은 처참히 패배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