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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기

[방문기] 서울시 성동구 '높은산'

by 집너구리 2022. 11. 17.

'높은산'은 사실 높은 산에 있지는 않다. 성수동 시장통 한켠에 있는 정말 자그마한 짜이 집이다. 힌디어로는 '짜이왈라'라고도 한다. 어떡하다 이런 토속적인 동네에 이렇게 이국적인 가게가 자리잡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짜이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인도 음식점만 가면 꼭 짜이 한 잔은 기본으로 시키고 시작하는 사람으로서는, 정말 간만에 성수동에 일이 있어서 온 김에 이 곳을 한 번 들러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려 짜이 전문점이라니 기대할 수밖에 없잖아.

 

김장철이 다가온 토요일의 뚝도시장 한복판을 걸어서 빠져나와 사거리를 건너고, 조금만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세모진 모서리의 조각건물 제일 끄트머리에 붉은 차양이 쳐진 가게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벌써 가게 앞에 펼쳐진 작은 테이블 앞에 선객이 앉아 있다. '높은산'은 가게가 정말 작기 때문에, 가게 안은 차를 끓이는 부엌과 손님이 주문을 위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으로도 이미 빠듯하다. 따라서 차를 마시고 가기 위해서는 가게 앞에 펼쳐진 테이블에 잠깐 앉았다 가는 수밖에 없다. 재미있게도 바로 옆에 있는 철물점 앞에도 한 자리를 더 펴 놓았다. 아마도 양해를 구해 두고 펼쳐 놓은 모양이다.

귀엽달까, 제법 힙한 느낌의 그림을 곁들인 메뉴들이 유리벽에 붙어 있다. 짜이는 종류가 총 3가지. 진저 짜이, 마살라 짜이, 사프란 짜이가 있다. 마살라 짜이는 아이스로도 먹을 수 있는 모양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유를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오트밀크로 짜이를 끓여 주시기도 하는 모양이다. 짜이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또 구체적으로 종류가 나뉘어 있는 곳에 오는 것은 처음이라, 사장님에게 각각 어떤 맛인지 여쭤 보았다. 친절한 사장님의 설명에 따르자면 다음과 같다.

 

- 진저 짜이 : 가장 기본적인 짜이. 이름에서 보다시피 생강이 들어가고, 그 외에는 카르다몸이 들어간다. 정말 가정에서 구하려면 더럽게 구하기 힘든 카르다몸인데 여기에서 이걸 만난다.

- 마살라 짜이 : 진저 짜이에서 생강을 빼고, 정향과 계피, 팔각을 넣어 끓인 짜이.

- 사프란 짜이 : 진저 짜이에 사프란을 올린 짜이. 아무래도 사프란의 가격 자체가 흉악하다 보니 얘가 제일 비싸다.

 

카운터에 이렇게 향신료 예시가 전시되어 있고, 사장님이 이 녀석들을 하나씩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설명해 주신다(사프란은 아예 시향까지 시켜 주신다). 뭘 시킬지 고민하다가, 날씨가 그다지 따뜻하지도 않고 비도 방금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으니 역시 따뜻한 녀석으로 한 잔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는 사프란 짜이를 한 잔, 아내는 마살라 짜이를 한 잔 시켰다.

당장 마실 짜이를 주문하는 일 외에도 이 곳에서는 무언가 다양한 것들을 사는 행위를 할 수 있는 듯했다. 짜이와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비스코티는 물론이고, 병에 담긴 마살라 짜이, 짜이 잼(?), 그리고 이미 블렌딩된 짜이 찻잎도 팔고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에는 덕용 블렌딩 찻잎은 마살라 짜이밖에 없었지만 원래는 진저 짜이도 파신다고 한다. 과연 1회용 짜이 키트로는 진저 짜이와 마살라 짜이가 둘 다 있었다. 재미있게도 인도에서 실제로 짜이왈라들이 장사할 때 쓰는 것과 똑같은 유리제 짜이 잔도 팔고 있었다. 듣자하니 인도에서는 이렇게 생긴 유리컵 외에도 상당히 내구성이 약한 일회용 도기 잔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다 마신 잔은 그냥 바닥에다 던지면 깨져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나 뭐라나. 

 

 주문을 하는 즉시 사장님이 카운터 아래에 있는 황동 냄비에 향신료와 찻잎을 붓고 물을 부은 뒤 끓이기 시작한다. 만약 가게에서 먹고 가는 것을 선택한다면, 가게 앞에 펼쳐져 있는 의자에 앉아 있으면 사장님이 테이블로 짜이를 가져다 주시는 시스템이다. 짜이 끓이는 모습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으나, 우리 뒤로도 손님이 여러 팀 왔기 때문에 일단은 얌전히 철물점 앞 테이블을 끼고 앉아 짜이를 기다린다.

머지않아 사장님이 이렇게 예쁜 쟁반에 놓인 짜이 두 잔을 가져다 주셨다. 왼쪽이 사프란 짜이, 오른쪽이 마살라 짜이다. 위에 뭐가 올라갔느냐를 보면 대번에 구분할 수 있다.

찬바람 부는 가을날에 느긋하게 한 잔 즐기기에는 역시 제격인 음료다. 은근한 밀크티 베이스이지만, 콕콕 찌르는 향신료의 향이 그렇게 차와 잘 어울릴 수가 없다. 각자 한 입씩을 마셔 보았는데, 내게는 조금 더 달달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마살라 짜이가 입에 맞았다. 반면에 아내는 덜 달면서 향이 좀더 드라이하게 올라오는 사프란 짜이를 더 선호했다. 재미있게도 원래 주문했던 것과 반대로 마시게 되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괜찮다. 작은 짜이 잔을 들고 홀짝홀짝 마시면서 동네 구경도 하고, 두런두런 얘기도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참 좋다. 가을비 내음이 짜이 한 모금 위에 살짝 곁들여진 탓일까. 

 

결국 1회용 짜이 키트까지 구매하고 말았다. 성수동에는 올 일이 많지 않더라도, 오게 된다면 한 번씩은 꼭 들를 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가게. 오래오래 영업하셔서 추억의 장소가 늘 연기처럼 사라지기가 십상인 이곳 서울에서 우리 부부의 또 하나의 추억의 장소로 남아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