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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20911 싱가포르

03. 싱가포르 식물원(1)(2일차-02)

by 집너구리 2022. 10. 11.

 

싱가포르 식물원(Singapore Botanic Gardens)은 무려 1859년으로 설립의 역사가 거슬러올라가는 아주 오래 된 식물원이다. 싱가포르의 유일한 세계유산이기도 하다. 다소 어처구니없게도 싱가포르에서 가장 처음 식물원이 생긴 것은 지금 중심가 중의 중심가인 래플스 호텔 바로 근방이었는데,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대규모의 식물원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식물이 많다는 감상도 날씨가 덥다는 푸념도 아닌, 매미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는 것이었다. 싱가포르의 매미는 소리가 무척 얄궂다. 어디 녹음이라도 해 뒀으면 여기다 링크라도 걸어 두었을 텐데, 한국에서 들을 수 있는 그나마 정겨운 '맴 맴 맴' 소리나 '쓰크쓰크호-시' 같은 소리와는 전혀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말매미의 '쓰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울음소리를 아주 독살맞게 편곡한 느낌이랄까. 어떤 소리냐면, 철공소에서 철막대를 자르는 소리와 완전히 똑같다. 끼이이이잉!! 끼이이이잉!! 하는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들려 오는 것을 듣고 있자니 이국적인 정취는 둘째치고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동시에 싱가포르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마저 든다. 어떻게 이런 소리를 매일같이 들으면서 살 수 있담?

 

그러던 것도 다양하게 펼쳐진 식물들을 보고 있자니 다소나마 누그러진다.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덩굴 정원(Trellis garden)'을 조금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데, 여기저기에 듣도 보도 못한 난초들이 땅에서 자라나고 있다. 땅에서 올라오는 걸 보니 지생란 종류인 것 같은데, 아직 배움이 일천해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바닥에서 지피식물마냥 자라나는 친구들한테는(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일 수도 있겠지만) 명패가 제대로 달려 있지 않다. 난초가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얼마나 흔하면!

아마도 자스민 종류의 꽃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꽃이 너무 예뻐서 찍어 보았다. 하얀색 다섯 장의 꽃잎이 바람개비 모양으로 붙어 있는 것이 앙증맞다.

대나무 정원을 지난다. 대나무 군락이 어떻게 자라는지 관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시이다. 빽빽하게 자라나 거대한 군체를 이룬 대나무숲이 서너 덩어리, 산책로 주위에 배치되어 있다. 거꾸로 어떻게 이렇게 구역별로 대나무 생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이 지점에서 매미 소리는 최대한에 달했다. 몇 마리 잡아다가 평소 미워하는 사람 집에 던져 넣는다고 한다면 아마 최대한의 괴롭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 나는 제대로 된 사회인이니까 그러지는 않겠지만.

대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흐드러지게 핀 다양한 종류의 부겐빌리아(Bougainvillea)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한국에서도 관상용으로 많이 키워지는 식물인데, 풍선처럼 피는 꽃이 퍽 예쁘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라는데 희한하게도 이 싱가포르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꽃나무 가로수 중 하나이다. 만수산 드렁칡 얽히듯 이리저리 뒤얽혀 거대한 더미를 만든 부겐빌리아 덩굴이 압도적인 느낌을 준다. 일부러 정리를 하지 않은 것이겠지? 분홍색 부겐빌리아꽃은 색감이 비슷한 철쭉을 여러 모로 연상시키는 반면에, 하얀색 부겐빌리아꽃은 청초한 느낌의 흰 드레스를 연상시킨다. 

이건 색깔이 정말 화려해서 마음에 들어 찍은 히비스커스 꽃. 그야말로 남도의 빛깔이라는 느낌이다.

낙엽으로 가득한 땅 위에 부채야자들이 몇 촉 자라고 있다. 낙엽이 어떻게 흙을 비옥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설명글도 같이 보면서 지나간다. 어떻게 저렇게 이파리가 부채 같을 수 있담. 이파리 하나 꺾어다가 부치면 여름 더위 가시기에는 제격이겠다.

 

느긋하게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면서 땡볕 아래에서 얼마간 걷다 보니 관엽 정원(Foilage garden)으로 들어섰다. 이름을 보고 다소간의 기대를 걸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 많이 본 식물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관엽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싱가포르에 와야 한다던데, 그 말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다. 이름도 많이 알려지고 심지어는 한국 식물계에서 값비싸게 거래되는 다양한 관엽식물들이 이곳에서는 그냥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큼직큼직하게 자라나고 있다.

필로덴드론 내지는 천남성과의 식물들. 왼쪽 식물은 이름도 없지만 필로덴드론 류인 듯하고, 오른쪽 식물은 필로덴드론 캐러멜 마블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무늬가 없다. 아마도 천남성 종류인 듯하다.

엄청나게 큰 잎을 펼치며 자라나는 무늬 바나나도 있다. 캐번디시 종의 바나나는 이 정도 크기면 아직 한참을 더 자라나야 한다. 월간화원에서 키우고 계시는 무늬 바나나가 이것보다 조금 더 큰데, 사진의 이 녀석은 적도의 따가운 햇볕을 그대로 받아내면서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흔히 지피식물이라고 부르는 녀석들도 눈에 띈다. 삼색달개비나 필레아 정도면 관엽식물 매니아들에게는 익히 알려진 식물들이다. 그냥 이렇게 길바닥에 군락을 이루고 살고 있다. 무시무시한 곳이다. 여기에 온 식물 덕후라면 누구든, 꺾꽂이를 해서 가져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리라. 어차피 꺾어 봤자 검역에 걸릴 게 뻔하고, 무엇보다도 식물원에서는 식물을 꺾어 가면 안 되니까 절대 그런 생각은 말자.

갑자기 이렇게 멋들어진 거목이 나타나기도 한다. 꼭두서니 종류인 '옐로우 치즈우드'인데, 꼭두서니과가 그렇듯 보통은 크게 자라나지 않는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만큼은 독특하게 엄청나게 크게 자라난 표본이라고 한다. 꼭두서니과 중 가장 유명한 식물로는 커피나무가 있는데, 역시나 커피나무처럼 꼭두서니 종류 특유의 지저분하게 세로로 얇게 너덜거리는 껍질이 눈에 확 띈다. 역시 주워들은 대로, 아는 대로 보이게 마련인 모양이다. 백 퍼센트 완벽한 지식은 아니지만.

 

이끼인지 아스파라거스인지 모를 하늘하늘하고 예쁜 녹색 식물들을 지난다. 식물이 워낙 많아서 평범하게 길가에 자라나는 식물에는 하나하나 명패를 붙이는 수고를 들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 간다.

잠시 멈춰 서서 관람안내도를 뜯어본다. 한참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많이 걸어야 한다. 오늘의 중간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초를 키우고 있는 곳들 중 하나인 '국립난원National Orchid Garden'인데, 제법 발걸음을 재촉해야 할 듯하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않도록, 아내의 상태를 지켜보면서 페이스 조절을 한다. 아내는 나보다 장거리 걷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발병이 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와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마란타류가 잔뜩 식재된 곳을 지난다. 마란타류라고 하면 '칼라데아(Calathea)', '스트로만테(Stromanthe)', '크테난테(Ctenanthe)', 그리고 '마란타(Maranta)'의 네 가지 종류의 식물들을 묶어서 가리키는 표현인데(최근에는 칼라데아의 일부가 '고퍼르티아(Gopertia)'로 분리되어 나갔다), 모두 가느다란 잎자루에 길쭉한 잎이 붙어 있고 낮에는 잎을 한껏 펼쳤다가 밤이 되면 잎을 오므리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영칭으로 '기도초(Prayer Plants)'라고도 한단다. 관엽식물 매니아들에게는 습도 관리가 무척 까다롭고 벌레를 잘 타는 녀석들로 유명하지만,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간간이 맞으며 자라고 있는 이 녀석들은 상당히 행복해 보였다. 역시 화분에서 식물을 키우는 것이 늘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스파티필룸도 빼놓으면 섭하다. 크고 빳빳한 잎을 가진 대형 스파티필룸들이 꽃을 물고 있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다. 참 흔한 식물인데도 늘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중간에 지나가는 레스토랑에서 '세계 개의 날' 행사를 하고 있어서 신기해 찍었다. 싱가포르 식물원의 많은 곳에는 '반려동물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데, 개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는 동선 자체는 있는 듯, 많은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것을 볼 수 있었다. 식물원 한가운데에 있는 식당에서 세계 개의 날 행사를 할 수 있는 이유도 그것이 아닐까 싶었다.

다양한 식생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인지, 갑작스럽게 동물 친구들과 마주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가장 놀랐던 것은 한길바닥에서 옴짝달싹도 안 하고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대형 도마뱀이었다. 변온 동물인 도마뱀은 낮 시간에 햇볕을 받는 것이 무척 중요한데, 아마 그 때문에 사람이 옆에서 지나가건 말건 미동도 없이 햇볕에 몸을 굽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닭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것은 다반사요, 갑자기 옆에 서 있는 나무가 퍼스럭퍼스럭 하는 소리가 나서 올려다보면 청설모가 재빨리 움직이면서 내는 소리다. 사실상 사파리 느낌인데 이거.

또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지난다. 이건 말레이어로 '쳉갈 파시르'라고 하는 나무인데, 엄청나게 빨리 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나무의 자생지인 이곳 말레이 반도 근방에서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무척 유용한 나무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아무리 올려다봐도 끝도 없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싱가포르가 식물 생육에 최적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식물원을 거닐면서 점점 깊이 이해하게 되고 있다. 아니 이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사례를 주입받는 느낌이다. 한국에서라면 누가 무늬 홍콩야자를 이렇게 싱싱하게 노지에서 키워낼 수 있겠는가. 

한국인이 개업선물로 사랑해 마지않는 나무 중 하나인 녹보수도 아주 예쁜 때깔을 자랑하고 있다. 너희 날씨가 따뜻하고 비가 잘 오면 이렇게나 멋지게 자랄 수 있는 식물들이었구나.

나무 구경에 물릴 때쯤 되면 또 예쁜 꽃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요렇게 새초롬하지만 정석적인 모양새로 피어 있는 꽃이 있는가 하면...

...만져 보면 복슬복슬하거나 성게처럼 따갑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은 귀여운 모양새의 꽃도 있고...

...어디 한국 연안에서 거미불가사리를 잡아다가 매달아 놨기라도 한 듯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생김새의 꽃도 있다. 

처음으로 고사리에 도전하고자 하는 식물 집사들이 가장 먼저 손을 대곤 하는 보스턴 고사리도 땡볕을 받으며 신명나게 자라나고 있다. 높은 화분받침 위에 얹혀 폭포처럼 쏟아지는 느낌으로 자라나는 녀석들의 사진만 주로 봐서 그런지, 이렇게 바닥에서 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다소 어색하다. 

중간중간에는 이렇게 폭포 느낌이 나도록 꾸며 놓은 곳들도 있다. 어느 식물원을 가든 이것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정수리를 뚫을 듯이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도, 양산 겸 우산을 받쳐들고 이렇게 떨어지는 물을 구경하고 있자니 기분 탓이렬까, 묘하게 시원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잎 길쭉한 필로덴드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곳의 필로덴드론 빌리에티에 군락을 보고 황홀함에 몸둘 바를 모를 것이다. 나무에 붙어서 올라가며 자라고 있는 저 잎 하나하나가 대략 150센티미터 정도는 족히 되는 길이이다. 노지 환경이 워낙 관엽식물 자라기에 제격인지라 익히 알고 있는 관엽식물들도 하나같이 무식한 크기를 자랑하는 것이다. 오른쪽 사진의 셀렘(thaumatophyllum selloum)도 마찬가지다. 도저히 우리 집에서 비실비실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녀석과 같은 종이라는 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초본류 관엽식물이 저렇게 잘 자라는데 목본이 잘 자라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고무나무류가 자라나는 모습은 어떤 의미로는 공포에 가깝기까지 하다. 

이 집게발을 늘어뜨린 것도 같고, 묘하게 극락조화를 닮은 것도 같은 이 녀석은 생강과의 식물인 '헬리코니아'라고 한다. 재미있게도 정말 영어로는 '가짜 극락조(False bird-of-heaven)'라고 부른단다. 화려한 색감의 독특한 꽃이기는 한데... 내 취향은 아니다. 아내도 뭔가 징그럽단다.

역시 열대 지역이라 그런지 야자의 종류도 다양하다. 사진으로 찍지는 않았지만 싱가포르 식물원의 상징이자 멸종 위기종인 '키르토스타키스 렌다(Cyrtostachys Renda)'를 비롯해서 정말 많은 야자들이 모습을 뽐내고 있다. 키와 생김새가 정말 다양한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마구 키를 키우고 있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굵고 억센 잎을 빽빽하게 키워내며 우락부락한 인상을 주는 녀석도 있고, 덥수룩하니 무슨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둥글납작한 모습을 하고 있는 녀석들도 있다. 

앞으로 싱가포르에 체재하는 동안 뻔질나게 만나게 될 녀석이기는 한데, 까만 몸에 흰 꼬리깃, 그리고 부리와 발만 샛노란색인 이 귀여운 새가 여기저기를 신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참새 같기도 하고, 얼가니새 같기도 하고,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날아다니다가 하는 것이 퍽 귀엽다. '자반 마이나(Javan mynah)'라고 한다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의외로 사람 음식을 뺏어먹기도 하는 겁대가리 없는 녀석이란다. 

싱가포르의 닭들은 보통 수탉 한 마리와 암탉 한 마리가 같이 다니거나, 암탉만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다. 수탉의 생김새는 한국의 토종닭과 무척 흡사하게 생겼지만 암탉은 한국 토종닭보다 훨씬 까무잡잡한 느낌이다. 역시나 사람을 보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배짱 좋은 친구들이다.

칼라데움이 아무렇지도 않게 모가지를 내밀고 있는 길가를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니, 드디어 저쪽에 뭔가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하는 곳이 눈에 띈다. 여기가 싱가포르 국립 난원의 입구인 모양이다. 일단 물 좀 마시고 장비 정비를 한 뒤, 들어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