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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20911 싱가포르

09. 래플즈 호텔을 잠깐 지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 보자(3일차-04)

by 집너구리 2023. 1. 25.

한참을 차임스의 식당가에 앉아 있었는데도 미사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날씨는 후텁지근하다. 햇볕이 어느 정도 가려졌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기온을 어쩔 도리가 없다. 카페라도 가서 시간을 좀 죽일까? 그런데 이 근처의 카페들이란 것들이 하나같이 평점이 좀 애매하다. 어디를 가야 무난하게 쉬었다고 소문이 날까 싶어서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는데, 아내가 "날도 더운데 아이스크림 같은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한 마디를 던진다. 근데 신기하게도, 아이스크림 가게를 대신 검색해 보니 별점 높은 가게가 제법 나오거든. 역시 아내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아이스크림이 생긴다. 애송이 초보 유부남들 잘 기억해 둬라.

무거운 엉덩이를 가까스로 일으켜 다시 길거리로 나온다. 목적지로 삼은 아이스크림 가게는 차임스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는 길에 싱가포르의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인 래플스 호텔을 만났다. 키 큰 여인초들로 에워싸인 이 고풍스러운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래플스 호텔이라고 하면 수많은 명사들이 거쳐간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호텔이자,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칵테일인 '싱가포르 슬링'이 만들어진 '롱 바(The Long Bar)'가 아직도 영업 중인 곳이기도 하다. 마음 같아서는 롱 바에 들러 슬링 한 잔을 시도해 보고 싶기도 했지만, 차마 미사 전에 술 한 잔을 때리고 들어가기에는 영 양심에 걸리기도 하고, 애초에 술을 그다지 즐기지도 못하는 몸을 가지고 있는 탓에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다음에 오면 한 번 사 마셔 봐야지.

무슨 산업단지 뒷골목 같은 살풍경한 골목을 지나 조금 더 돌아가면 오피스 건물 1층 한구석에 '톰스 팔레트(Tom's Palette)'라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그림 그릴 때 쓰는 '팔레트'와 입맛을 뜻하는 '팔레트(palate)'의 말장난을 의도한 이름인가?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다양한 아이스크림 메뉴를 팔고 있다. 입구에 내걸려 있는 '오늘의 메뉴' 판을 잠깐 구경한 뒤, 안으로 들어간다.

판매대 구성은 전형적인 젤라또 가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름을 보았을 때 충분히 예측 가능한 맛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뭔지 알 수 없는 색깔과 이름을 가진 맛들도 있다. 구글 지도에서 검색했을 때 '독특한 맛들이 많이 있어서 시도하는 재미가 있다'는 현지인의 리뷰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도 흥미를 끄는 맛들 위주로 골라 주문해 보기로 했다. 일단 안전빵으로 '서머베리(Summerberries)'와 '리치 앤 로즈(Lychee and rose)' 맛을 각각 고르고 나니 나머지는 뭘 고를지 엄청나게 고민이 되었다. 이름만 봐서는 화이트 초콜릿에 김을 섞은 녀석(White Chocolate Nori)도 있는 것 같고... 음양떡(Yin Yang Mochi)는 무슨 떡인 건지 도저히 짐작도 안 되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달걀 노른자(Egg Yolk) 맛과 피파가오(Pipagao) 맛을 하나씩 더 추가했다. 달걀 노른자는 추측이 될락말락 한데, 피파가오는 이름조차 처음 들어 봤다. 과연 맛은 어떠할지.

(좌) 달걀 노른자와 서머베리, (우) 피파가오와 리치 앤 로즈.

먼저 서머베리와 리치 앤 로즈는 정말 베리류와 리치를 먹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 가능한, 무난한 맛의 아이스크림이었음을 밝혀 둔다. 상큼하고 더위를 싹 가시게 해 주는 맛. 약간 단맛이 강하다는 느낌은 있다. 달걀 노른자 맛은 의외로 정말 밀도 높은 고소함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다소 비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비린맛은 느껴지지 않고, 무척 깊다못해 사람에 따라서는 조금 느끼할 수도 있을 듯한 맛이다. 문제는 피파가오인데, 이건 싱가포르 사람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도 몇몇은 익숙할 법한 맛이다. 영 유쾌한 경험과 이어지지 않을 맛이라 그렇지. 굳이 묘사하자면, 뭐랄까, 딱 감기 시럽 맛이다. 도대체 이게 뭔가 싶어서 구글에서 검색을 해 봤는데, 중화권에 '비파고(枇杷膏)'라는 아주 유명한 감기약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거의 정확하게 감기 시럽 느낌인 셈이다. 이게 뭐람! 어렸을 때 먹었던 감기약 맛이 그리워서 아이스크림 맛으로 만든 건가? 참고로 추가해서 적자면, 엄청 불쾌하다든가 하는 맛은 아니고 약간의 이질감이 있는 것에 가깝다고 하겠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에 도전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유쾌하게 먹어 볼 수 있는 그런 맛이다. 메뉴는 주기적으로 바뀌는 듯하니, 흥미로운 맛을 시험해 보고 싶다면 여행 도중에 잠깐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

빵빵한 에어컨 아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다리를 쉬이고 나니 다행히도 다시 기운이 나는 것이 느껴졌다. 미사 시간에 늦지 않을 수 있을 만큼만의 시간을 남기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금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밖으로 나온다. 아주 멋지게 지어져 있는 거대한 싱가포르 국립도서관 건물을 지나, 고층 빌딩들 사이로 여전히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이제는 정겹기까지 한 페라나칸 스타일의 건물들을 지나 다시 왔던 곳으로 향한다. 차임스 북서쪽 벽을 따라 브라스 바사 로드를 따라가면 싱가포르 대교구의 주교좌인 착한 목자 대성당이 나온다. 이곳에서 평일 미사를 드린 뒤 다시 움직이기로 한다.

 

(이 글은 '[세계 성당 방문기] 08. 싱가포르 착한 목자 대성당과 성 베드로 바오로 성당'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