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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 여기저기 답사기

[국내 여기저기 답사기] 서울 마포구 광흥창 터 / 밤섬 부군당

by 집너구리 2021. 5. 22.

오랜만에 광흥창에 가게 된 것은 작년 8월 중순이었다. 처음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동네여서 여러모로 정이 가는 곳인데, 이번에는 낮에 운동삼아 산책을 좀 길게 나선 김에 이쪽으로 가 보기로 하였다. 광흥창에서 회사를 다닐 적에는 잘 알지 못했는데, 특기할 만한 두 곳의 장소가 이곳에 모여 있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듣고 난 뒤였다.

 

광흥창(廣興倉)은 서울도시철도 6호선의 역 이름으로도 유명한 지명인데, 행정구역상의 이름은 아니고 이 곳에 있었던 관청의 이름이다. 고려 충렬왕 때 처음 설치된 이후로 조선시대 말까지 존속하면서 서강 마포나루로 들어오는 세곡선으로부터 곡식과 물자를 받아 관리하고 관리들의 녹봉을 나눠 주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철거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곳에 고려 공민왕과 그 비 노국대장공주를 모신 '공민왕 사당'이 있다는 것이었다.

 

 

마포구에서 관리하는 전통문화공간 '광흥당'과 공민왕사당이 같이 붙어 있다. 광흥창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도 서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광흥창이 위치한 지역 '서강(西江, 오늘날의 마포구 창전동 일대)'은 수운의 요지로 세곡선들이 들어와서 물자를 부려 놓으면 이것을 쌓아 뒀다가 한양 관공서에 근무하는 관리들의 녹봉으로 나누어 주거나 가뭄이 들었을 적에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세곡을 푸는 등의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광흥창 관리들의 꿈에 고려 공민왕이 나타나, "이 곳에는 나의 정기가 서려 있으니 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시면 번창하게 해 주리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종묘에 공민왕 사당이 세워져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시대를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조선 사람들도 공민왕만큼은 그네들 나름대로 존경스러운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대체 공민왕의 정기가 이곳에 서릴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사람들은 광흥창 건물 옆에 정말로 공민왕사당을 지어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사가 소홀하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정말로 광흥창에 화재가 나거나 하는 등의 횡액이 일어나는 대신, 제사를 후하게 지내면 그 해 유달리 세곡이 많이 들어오는 등의 일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제법 오랫동안 모셔오던 제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공민왕사당은 한국전쟁 때 무너졌던 것을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광흥당은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한옥 스타일의 건축물이다.
공민왕사당의 유래를 적은 팻말.
지금 공민왕사당 주위에는 하늘을 찌를 만큼 높은 아파트들이 세워져 있다. 그래도 그 때의 당목은 여전하다. 마당에는 제례 사진도 전시돼 있다.

서강에는 또 한 군데, 오늘날 대부분의 서울시민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아 온 사람들이라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서글픈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와 관련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한때 빼곡이 서강 언덕배기를 뒤덮고 있었던 달동네가 전부 재개발되고 아파트가 들어선 뒤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어느 무신(巫神)과 그 사당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강'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뭇 사람들이 떠올릴 만한 이름은 무엇일까? '서강대학교'가 먼저 떠오를 수도 있고, 서강에서 여의도를 잇는 다리 '서강대교'를 떠올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국문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이 곳으로 이사 오면서 시 세계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현대시인 김수영 선생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으리라. 이들 가운데 오늘 주목해야 할 이름은 '서강대교'이다. 서강대교를 타고 여의도로 들어가는 길에 누구나 보지만 지나치곤 하는, 서강대교 한가운데에 걸리듯 떠 있는 섬이 있다. 밤섬이다.

 

서강대교와 밤섬(출처: 조선일보)
폭파 이전의 밤섬의 모습. 살림집과 길의 모습이 선명하다. (출처: 영등포구 포토소셜역사관)

 

지금에야 상상하기 힘들지만, 밤섬은 제3공화국이 들어서기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제법 사는 유인도였다고 한다. 오히려 모래톱에 불과한 여의도보다 지반이 견실한 밤섬에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그러나 여의도에 일제가 비행장을 세우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 여의도 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여의도와 밤섬의 위치는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여의도 주변을 둑으로 둘러싸는 공사에 쓸 석재를 구하기 위해 기반암이 풍부한 밤섬을 폭파하여 채석장으로 쓴다는 명령이 떨어졌고, 밤섬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실향민이 되어 섬을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때 섬에서 쫓겨난 밤섬 원주민들 중 대다수가 섬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곳 서강 지역(오늘날의 광흥창 일대)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고층 아파트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지금의 광흥창역 주변을 보면서 쉽사리 상상하기가 어려운 장면이다.

 

이때 쫓겨난 것은 밤섬에 살고 있던 사람들뿐만은 아니었다. 섬 사람들이 대대로 모시던 무가신인 밤섬부군을 비롯한 몇 위의 신들 또한 사람들과 함께 쫓겨나 서강으로 옮기게 되었다. 밤섬 실향민들은 창전동 와우산 자락에 예전에 하던 대로 부군당을 새로 짓고 굿을 이어갔다. '밤섬부군당도당굿'이라고 불리는 이 굿은 2005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는데, 당연하게도 이 부군당 또한 서강 창전동 바로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다.

 

공민왕사당도 광흥창역에서 산비탈에 걸린 골목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야 하는데, 부군당은 더 많이 올라가야 했다. 그래도 이 구역이 전부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재조성된 덕분이라고 할까, 길이 제법 정비되어 있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올라가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와우산 바로 밑에 있는 창전동래미안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 111동 건물 옆으로 들어가면, 멀끔하게 정비된 수도권 특유의 아파트 단지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콘크리트 담벼락과 철문이 눈에 들어온다. 퍼뜩 봐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시설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아마 이 아파트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들도 알지 못하리라.

굳게 닫힌 철문 옆으로 부군당의 역사와 밤섬 이주민들의 이야기가 적힌 표지석이 걸려 있다.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무가신을 모시는 공간이기 때문에 부정이 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님 그 옛날에 불현듯이 밀고 들어와 자기네들을 내쫓았던 공권력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부군당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심지어 CCTV마저 달려 있었다. 바깥에서 안쪽을 들여다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고, 여름이라 녹음이 우거진데다 모기가 하도 달라붙어서 여기 더 오랫동안 있기는 쉽지 않을 듯하였다. 굿을 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기는 하지만, 부군당이 열려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굿 날에 맞춰서 이곳을 찾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음 속에 아스라이 묻혀 있는 부군당의 모습.

일본이나 대만에 가 본 이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그네들 스스로의 신을 모신 신사나 도교 사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로변에 서 있는 경우를 왕왕 보곤 한다. 신이 가까이에 있는 것이 더 안심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토나 도교의 '영험함'에 대한 입장이나 교리가 한국 무가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고랫적부터 산을 신성하게 여겼던 한국인의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다양한 이유로 인해 전통적인 무속신앙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믿고 있는 종교의 교리적 입장을 떠나서) 이처럼 유구한 역사와 깊은 의미를 가진 전통 무속신앙의 명맥을 찾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들의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 다소 안타까웠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퍽 훌륭한 일이지만, 그만큼 예전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들을 오롯이 보존하고 전해 나가는 것도 잊으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