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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191005 Taiwan

대만유람기 2019 (17) : [7일차] 가오슝에서의 하루, 재미보다는 미미美味에 치중하다

by 집너구리 2021. 6. 6.

방만큼이나 훌륭한 저스트슬립 가오슝 스테이션 호텔의 조식

 

예정에 없이 훌륭한 방에서의 하룻밤 이후, 우리는 낙관적인 마음을 갖고 조식 뷔페로 향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방이 훌륭했던 데다가 호텔 카페의 과자류도 맛있었던 만큼, 조식도 최소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선보이지 않겠느냐고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조식 뷔페는 상당히 충실한 구성을 하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중국식 메뉴에 비해 양식 메뉴가 좀 더 많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상당히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하게 아침 식사를 다소 배불리 먹고 말았다는 게 함정이긴 했지만.

 

메이리다오 지하철역에서 시작하는 시내 관광, 2% 부족한 용호탑과 제법 흥미로웠던 공자묘

 

대만의 대도시 가운데에서는 가장 남쪽에 위치한 동네인 만큼, 가오슝은 이제까지의 다른 모든 도시들보다도 특히 더 더웠다. 시가지가 다소 내륙 쪽으로 들어와 있는 타이베이, 타이중, 타이난에 비해 가오슝은 바로 해안에 면한 도시이기 때문인지, 공기에 습기가 가득 들어차 있어 말 그대로 푹푹 찌는 듯한 날씨였다. 한국은 슬슬 가을 초엽에 접어드는 시점에 제 발로 더위의 소굴로 기어들었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지만, 그게 또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첫 출발은 숙소 근처의 지하철역 '메이리다오美麗島/Formosa Boulevard'역에서 끊기로 한다. 맞이방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원색의 기둥과 화려한 천장 장식으로 유명한 지하철역이다. 지하철을 '첩운'이라고 일컫는 이 동네 표현에 따라 가오슝 지하철의 이름 또한 '가오슝 첩운'인데, 메이리다오역은 남북축을 잇는 홍선紅線과 동서축을 잇는 귤선橘線의 유일한 환승역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부산 도시철도의 서면역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지하철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다가, 중간에 쥐단巨蛋역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 내린다. '쥐단'은 풀이하면 '큰 달걀'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는가 하는 의문은 영어 표기를 보면 바로 풀린다. 근처에 있는 가오슝 돔경기장(Kaohsiung Arena)의 이름을 따서 붙인 건데, 돔경기장을 옆에서 보면 마치 거대한 달걀 같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부르는 모양이다. 귀엽다.

 

우리가 이번에 향하는 곳은 줘잉 지구에 있는 거대한 연못인 '롄츠탄蓮池潭'이다. 풀이하면 '연꽃 호수'인데, 이곳에 가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장절한 사정이 있다. 대만 일주여행을 처음 계획할 때부터 가오슝에 들어온 첫날 밤까지도, 가오슝에서 본격적으로 구경할 만한 곳을 찾기가 여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본래 시내 관광을 다닐 때면 아내의 취향인 맛집이나 전통 정원, 혹은 내 취향인 유적지나 주요 랜드마크 등을 주로 다니지, 이렇게 너무 본격적으로 관광단지로 조성된 곳을 찾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가오슝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렇게 본격적으로 탐구해 볼 만한 곳이 잘 보이지 않았다. 타이난에서는 유적지라도 많이 보고 돌아다녔지. 그래서 고심하던 끝에 나름대로의 결정을 내린 것이, 롄츠탄 쪽에 가면 타이베이에서도 타이중에서도 타이난에서도 한번은 꼭 보고 싶었지만 결국 구경하지 못한 공자묘가 크게 있다고 하니, 겸사겸사 그 쪽도 볼 겸 해서 가 보자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메이리다오역의 맞이방은 퍽 화려하게 잘 꾸며져 있다. 놀랍게도 자연광은 아니다. 승강장은 다소 어둡지만 깔끔한 느낌이다.

쥐단 역에서 버스를 타고 롄츠탄 근처의 정류장에 내렸다. 바로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다름아닌 해군기지다. 가오슝은 동아시아에서도 상당히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항만도시인데, 서부 해안에 면한 지역구인 쭤잉左營은 해안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해군기지로도 유명하다(동네 이름부터가 '좌방면에 위치한 병영'이라는 뜻이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내린 버스정류장이 바로 이 중화민국 해군 쭤잉 기지 정문 앞이었다. 위압적인 정문 앞을 슬금슬금 지나가면서, 한국이든 대만이든 어딜 가나 군문 앞 분위기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해군 쭤잉 기지의 정문. '충의소집'이라고 붙어 있는 안내판이 영 남 일 같지가 않다.

해군기지를 지나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한 7-8분 남짓 걸으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거대한 못이 눈에 들어온다. 과연 이름답게 연꽃으로 가득한, 그리고 정말 엄청나게 넓은 호수다. 그늘이 거의 없어 햇볕이 머리 위를 바로 내리쬐는 가운데, 사람은 또 뭐 이렇게 많은지. 아까 아침에 출발할 때는 통 보이지 않던 가오슝 시민들이 다 여기 모여 있나 싶을 만큼의 인파였다. 취두부 노점을 비롯한 온갖 노점들이 벌써부터 장사진을 벌이고 있고, 많은 시민들이 부채나 손 선풍기를 하나씩 들고 호수 둘레길을 거닐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잽싸게 양산을 펼쳤다.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 도저히 선크림만으로는 버틸 수 없을 듯했기 때문이다. 

 

 

호수를 둘러보다 보면 호수 한가운데에 전통 양식의 건물을 세워 놓고 긴 구름다리로 연결해 둔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입구에 면해 있는 '용호탑'이다. 쌍둥이처럼 닮은 두 개의 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입구에 총천연색으로 칠한 용과 호랑이가 장식되어 있다. 그러니까 용의 입이나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서 탑 꼭대기까지 올라가 볼 수 있도록 해 놓은 모양새이다. 관광안내 책자나 인터넷 같은 데에서는 여기를 가오슝의 명소로 소개해 놓은 것이 많던데... 가오슝의 특색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그저 중국 스타일의 서울대공원에 놀러 와서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 난 것은 우리뿐만은 아니리라. 호수 서안을 따라 열심히 걸으면서 구경한 바로는, 호수 안에 있는 다른 건물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구성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중국 특유의 전통적 감성으로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조각상들과, 화려하고 멋있게 장식되어 있지만 기능적으로는 그저 정자일 뿐인 건물들이 지나갔다. 이곳의 모습이 영 볼썽사나웠다는 것이 결단코 아니라, 한국에서 나고 자란 우리 부부의 미감으로는 충분히 공감하기 어려운 다른 종류의 문화적 미감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주위의 다른 시민들은 충분히 즐기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대만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한 위화감인 것이다. 그래도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멋들어지게 꾸며진 도교 사원만큼은 언제나 보는 맛이 있었다.

롄츠탄에는 이렇게 호수 한가운데 건물을 세워놓고 관광하도록 되어 있는 곳이 많다. 왼쪽이 바로 그 용호탑. 나는 연꽃 보는 게 더 좋더라.
도교 사원은 보기만 해도 즐겁다. 믿는 신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화려한 건축물을 세울 수 있다는 인간의 어떤 가능성을 본다.

우리가 미처 간과한 사실이 있는데, 롄츠탄은 정말 컸다. 생각보다 너무 넓은 연못이어서, 남쪽 끝인 용호탑 부근에서 북쪽 끝에 위치한 공묘까지 정말 한참을 걸어야 했다. 날씨는 덥지, 땀은 계속 나지, 그늘은 하나도 없지... 내가 가자고 해서 가기로 한 건물이어서 가면 갈수록 아내에게 면목이 없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막상 도착해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퍽 현대적인 느낌의 건축물이 우리를 반겼다. 성균관 대성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덕수궁 수준은 되는 전통적 건축물일 줄 알았는데 웬걸, 중정기념당을 모양새만 공자 사당으로 바꿔서 가오슝 시내에 갖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관리가 안 되고 있던 옛 사당을 허물고 1970년대에 다시 세운 건물이란다. 어쩐지 새 것 같다 했어. 물론 생김새는 상당히 멋들어지기는 했지만, 어딘가 김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대성전 앞을 지키고 있는 중국식 패루. 현판에는 '귤성문'이라고 쓰여 있다. 대성전은 우리나 일본의 그것과는 달리 2층짜리의 거대한 건물이다.

황제국의 격식으로 5중문으로 되어 있는 정문인 '귤성문'을 지나(왜 '귤'이라는 표현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들어가면 마치 어딘가의 궁궐 정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웅장하고 수려한 형태의 대성전 건물이 방문자를 맞는다. 이 안에 공자와 제자들, 그리고 후학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평시에는 안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들어가 보기로 한다. 

 

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정면에 있는 공자의 위패이다.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유교 문화권에서 근 이천 년 간 주요 통치 이념으로 기능해 온 유교의 창시자인 만큼, 무려 '만고강상萬古綱常'(시대를 넘나드는 인간의 도리)이라고 쓰인 현판 아래 모셔져 있다. 그 좌우로는 제자와 후학들의 위패가 줄줄이 도열되어 있는데, 재미있게도 우리가 익히 이름을 알고 있는 대학자의 위패는 공자와 가까운 곳에 특별히 크게 만들어져 모셔져 있다. 이를테면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안회(顔回, '안자'라고도 함), 공자의 손자이자 <중용中庸>의 저자로 익히 알려진 자은자(子恩子), 굳이 주석을 달지 않아도 될 유교의 중흥조 증자(曽子)와 맹자(孟子)의 네 성인이 그들이다. 

 

위패가 모셔져 있지 않은 나머지 벽에는 문묘제례에 쓰는 다양한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악기들을 쭉 보고 있자니, 확실히 국악과 중국의 아악이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국악기로도 익히 알려진 편경과 편종, 생황 등을 비롯하여, 중국 특유의 금琴이나 기타 악기들을 보면서 국악기와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다. 제대로 연주하는 문묘제례악은 아무래도 한국에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중화권에서는 다소 아쉬운 점이겠지만, 문묘제례악의 원류에서 사용하는 악기들의 편린이나마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의외로 볼거리가 많았던 대성전 내부.

공자묘에서 빠져나와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신쭤잉역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버스를 타고 편하게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충격적이게도 공자묘에서 신쭤잉역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없다는 것이었다. 택시도 영 잡히지 않는 동네였기도 하고, 걸어서 그렇게 많이 걸리지는 않을 법한 거리여서 그냥 그대로 걸어가기로 했는데, 개발이 다 마무리되지 않은 동네여서 그런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좁디좁은 보도를 따라 하염없이 걷다가 슬슬 배고프고 더위를 견디지 못할 때쯤 해서, 다행히도 신쭤잉 역에 도착해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되었다.

 

 

가오슝 첩운의 일본보다 한술 더 뜨는 오타쿠 마케팅

 

이쯤 해서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가오슝 첩운의 마스코트 캐릭터 '가오슝 첩운 소녀高捷少女'다. 가오슝에서 지하철을 타고 시내를 돌아다닐 때 이들과 만나지 못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정말 어느 지하철역에 가든 이 친구들이 무언가 안내를 하거나 경고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2014년에 처음 선보인 이후로 지금까지도 이곳저곳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오슝 첩운 운영주체들이 나름대로 상당히 이 자캐덕질(?)에 진심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뭐든 인구발로 밀어붙이는 중국을 제외하면) 오타쿠 컨텐츠 소비로는 일본 다음가는 곳이 대만이라고는 하지만, 일본풍 미소녀 캐릭터들이 도시의 기간망인 지하철의 공식 마스코트로서 활동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 정도로 시영 지하철에서 2차원 세계관을 중점적으로 밀어 주는 건 일본에서도 교토 시영지하철의 <지하철에 타자!地下鉄に乗るっ> 시리즈 정도일 텐데. 하물며 내가 나고 자란 한국에서는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일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그려져 있는 안내판이나 광고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일본어가 적혀 있는 경우도 있다 보니, 내가 지금 현대 대만의 가오슝에 와 있는 건지 아니면 평행세계의 일본령 대만 타카오에 와 있는 건지 순간순간 헷갈릴 때가 있다.

 

2014년 기간한정 캐릭터로 첫 고첩소녀인 '샤오충小穹'이 등장한 이후로 레귤러 멤버로서는 샤오충과 '에밀리아艾米莉亞', '나나耐耐', '제얼婕兒'의 네 명이 주로 활동하고 있다가, 2018년에 2기 멤버로 '샤오기小祈', '페이얼飛兒', '안젤라安琪', '샤오시小夕'의 네 명이 추가되어 총 여덟 명이 레귤러 멤버로 지하철 이곳저곳에 등장하고 있다. 가오슝 지역에서 쓸 수 있는 교통카드인 '이카통'도 이 친구들이 인쇄된 특별판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쉽게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닌 모양이다. 타이베이에서 산 이지카드가 여기서도 호환이 됐기 때문에 굳이 하나를 더 살 필요가 없었기도 하고. 여러모로 오타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히 귀여운 아이들이다 보니, 역을 돌아다니며 이 친구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었다. 딱딱한 경고문구도 뭔가 부드럽고 귀엽게 와닿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뭐라도 기념품으로 하나 사갖고 올 걸.

초대 고첩소녀인 샤오충만 두 번씩이나 등장하고 있는 가오슝 시내관광 안내판. 왼쪽부터 샤오충, 안젤라, 샤오기, 나나, 제얼, 에밀리아, 샤오시, (다시)샤오충, 페이얼.
(좌 2) AR을 활용한 고첩소녀 수집활동 이벤트를 선전하는 듯한 안젤라. (우) 승강장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안내하고 있는 나나.
크립톤 보컬로이드와의 콜라보도 진행한 모양이다. 미쿠가 차내에서 음식물을 먹거나 빈랑을 씹으면 1500위안의 벌금이 나온다고 강조하고 있다(!). 안전수칙을 안내하고 있는 카가미네 렌도 눈에 띈다. 
왠지 모르게 오징어구이를 광고하고 있는 샤오시와 샤오충(좌). AR 수집 이벤트는 안젤라뿐만 아니라 페이얼도 광고하고 있다(우).

 

루이펑에서 빙수와 소보로빵으로 더위를 달래다

 

시원한 지하철을 타고 느긋이 내려와 이번에는 루이펑 야시장으로 향했다. 아까 롄츠탄을 가기 위해 내렸던 쥐단 역에서 다시 내린다. 밤에는 가오슝에서도 제법 큰 야시장이 열리는 곳이지만, 낮에는 점포들이 전부 닫혀 있어 그저 평범(하고 약간 지저분)한 상업지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에 위치한 찻집인 '둥먼차루'에 가서 빙수류를 먹으면서 더위를 식혀 보기로 마음먹었다. 듣자하니 이곳에서 파는 망고빙수가 퍽 맛있다는데, 과연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뭔가 푸근해 보이는 인상의 아저씨 그림이 크게 그려져 걸려 있다. 들어가서 주문하겠다고 하면 메뉴판을 이렇게 갖다 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망고빙수는 또 실패했다ㅠㅠ 직원의 말에 따르자면, 계절마다 제철 메뉴가 각각 다른데 망고는 가을-겨울 시즌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녹차 팥빙수는 있다고 하기에, 반쯤은 울며 겨자먹기로 시켜 보기로 했다. 녹차 팥빙수라니, 한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고 동아시아권에는 다 있는 음식인데, 굳이 여기에서 먹어야 하나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대만도 나름대로 차가 유명한 동네이기는 하니까 적어도 맛없지는 않으리라는 공산이었다.

 

이윽고 나온 녹차빙수와 추가로 곁들여 주문한 밀크티는, 생각 외로 정말 맛있었다. 대만 녹차를 쓰는지야 알 수 없지만, 전반적인 생김새는 일본식 우지킨토키동에 가까운 듯한 모습이다. 한 입 떠서 먹으니, 농후한 말차의 향이 입 안에 가득히 퍼진다. 쌉싸름한 녹차의 맛이 너무 달지도 않게 잘 조려진 팥과 어우러지고, 여기에 아래에 깔린 말차우유 얼음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밀크티도 우롱차 특유의 구수하면서도 향긋한 차향이 마치 농축이라도 한 듯이 진하고 묵직하게 다가왔다. 과연 평점이 높은 찻집답게 차 관련 메뉴의 퀄리티가 퍽 훌륭해서, 받자마자 정신을 놓고 먹다 보니 거진 10분 만에 빙수와 밀크티까지 전부 해치우고 말았다. 

화사하고 달콤쌉쌀한 맛의 녹차팥빙수와 깊고 묵직한 맛의 밀크티. 훌륭했다.

둥먼차루를 나와 쥐단역 방향으로 돌아가는 길,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큰 소보로빵집이 눈에 들어온다. '호호메이 소보로'다. 간판에는 타이베이 스다 야시장에서 창업했다고 적혀 있는데, 어째선지 관광서적 등지에서는 모두 가오슝의 맛집으로 소개되고 있는 곳이다. 녹차빙수로 탄력을 얻은 김에 여기에서 파인애플 소보로빵도 사먹어 보기로 한다. 메뉴를 보아하니 다들 너무 맛있어 보이는 빵들로 가득한데, 앞으로 끼니를 또 먹을 생각을 하면 여기에서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파는 소보로빵은 파인애플이 빵껍질에 들어가 있는데, 기본 메뉴인 파인애플 소보로빵보다 여기에 버터를 추가한 파인애플 버터빵이 가장 많이 팔리는 메뉴라고 한다. 점원에게 물어봐도 던연코 파인애플 버터빵을 추천해 준다. 그야말로 살찔 수밖에 없는 조합이기는 하지만, 사실 칼로리라는 것은 맛의 단위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대신 눈 딱 감고 파인애플 버터빵 하나만 딱 사먹은 뒤에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미리 빵에 버터를 끼워 뒀다가 파는 것이 아니라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갓 구워진 빵에 버터를 떠다가 끼워서 주기 때문에, 잠시 동안 기다렸다가 빵을 받아들 수 있었다. 딱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입에 퍼지는 부드럽고 진한 유제품의 풍미! 향긋한 파인애플의 향이 감돌면서도 버터의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혀를 착 감고 도는 그 느낌이 너무 훌륭했다. 일본어 표현에 달고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뺨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딱 그 표현이 적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한 개를 더 주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미 오늘 달고 느끼한 음식은 너무 많이 먹었다고 우리끼리 나름대로의 합리화(?)를 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겼다. 지금에 와서야 하는 얘기지만, 그 때 그냥 절제하는 척하지 말고 하나 더 사 먹을 걸 그랬다.

호호미 소보로빵 꼭 사 드세요. 두 개 드세요.

달고 시원한 것을 열심히 먹었긴 하지만, 그래도 이 더위에서 계속 돌아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걷기에 익숙하지 않는 아내가 다소 힘들어하는 것이 보여서, 일단 근처 슈퍼에서 먹을 것과 선물거리를 좀 사 들고 숙소로 돌아와서 한숨 잔 뒤 저녁에 나가기로 했다. 좋은 방 이럴 때 써 먹어야지.

 

 

관람차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오슝 시내, 그리고 여러모로 이상하고 아름다운 쇼핑몰 구경

 

아내는 한숨 자고 나는 찍었던 사진을 대강 정리하는 동안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야경을 보기에는 딱 좋은 시기이다. 밖에 나오니 해가 지기 시작한 덕분인지 낮에 비해서 더위는 많이 가신 상태였다. 가오슝 시내에서 야경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스팟으로는 가오슝 최고의 마천루 '가오슝 85대루'와 관람차 '가오슝 아이'가 있는데, 여행만 갔다 하면 반드시 관람차를 타야 직성이 풀리는 아내의 의견에 따라 가오슝 아이 관람차를 타러 가기로 했다.

 

 

가오슝 아이는 첩운 홍선 카이쉬안凱旋역에서 도보로 7분 정도 걸리는 쇼핑몰 '드림몰' 꼭대기에 서 있다. 한국에서는 거의 없어진 풍경이기는 하지만, 일본과 그 직접적 지배권에 있었던 조선과 대만의 백화점에는 종종 옥상 유원지나 공연장이 존재하기도 했으며 지금도 일본과 대만의 많은 백화점 또는 쇼핑몰 정상에는 이와 같은 옥상 유원지가 운영되고 있는데, 가오슝 아이 또한 드림몰 옥상 유원지의 일부로 관리되고 있다. 날씨가 더운 탓인지는 몰라도 옥상 유원지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관람차 대기열도 길지 않아서 오래 기다리지 않고 거의 바로 탑승할 수 있었다. 비용은 성인 150위안(한화 6000원 정도). 

밤이 가까워 오면서 관람차는 점차 형형색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얼마 올라가지 않았는데도 시내가 벌써 제법 잘 조망된다. 가장 높은 건물이 바로 가오슝85대루이다.
가오슝 항 쪽을 바라본 모습. 밤인데도 불야성처럼 밝은 항구의 조선소와 바다에 아스라히 떠 있는 대형 선박들이 보인다.
북쪽을 바라본 모습. 도시화된 가오슝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강 이렇게 생긴 소형 유원지가 건물 옥상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요금은 놀이기구마다 따로 책정되어 있다.

날씨가 점차 흐려지기 시작해서 생각만큼 깔끔한 시야로 주변을 조망하기는 어려웠지만, 보랏빛 대기에 감싸인 초저녁의 가오슝 시내는 퍽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었다. 도시권은 북쪽에 치우쳐 있고 남쪽으로는 여전히 낮은 스카이라인의 거주지역들이 넓게 펼쳐져 있어, 거기서부터 오는 대비 또한 흥미로웠다. 점차 국내의 다른 도시들이나 대륙의 다른 대형 항구들에 밀려서 쇠락해 가고 있는 탓인지, 아니면 나름대로 전통적인 주거지를 지키면서 천천히 개발을 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만 제2의 도시라는 타이틀에서 오는 자못 화려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고즈넉하면서도 서민적인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오슝 아이에서의 짧지만 즐거운 시간을 마무리하고 내려오니 슬슬 배가 고파져서, 지하 푸드코트에서 간단히 요기를 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다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쇼핑몰에 들어오기라도 한 듯, 저녁 시간을 맞이한 푸드코트는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까스로 자리를 찾아 앉은 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다가 대강 한자로 써 있는 메뉴에서 때려맞춰 '지파이 절임야채 덮밥' 비슷한 뉘앙스의 음식을 주문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나온 음식을 먹어 보니, 놀랍게도 어딘가에서 많이 먹어 봤던 그리운 향취가 났다. 재미있게도 정말 제대로 된 김치 몇 조각이 들어 있는 지파이 덮밥이었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허를 찔리기는 했지만, 주린 배를 달래기에는 충분한 맛이었다. 여행지에서는 절대 한국 식당에 안 간다는 철칙을 지금껏 지켜 오고 있다고는 해도, 의외의 곳에서 한국적인 맛을 발견하는 것이 과히 불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는 푸드코트 옆에 붙어 있는 슈퍼마켓을 잠깐 들렀다. 숙소에서 술안주로 먹을 미국산(...) 납작복숭아 한 팩과 맥주 약간, 그리고 슬라이스햄 한 팩을 사서 나왔다. 다른 열대과일이 있었으면 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제철이 아니라서 잘 나와 있지 않았다. 짧은 쇼핑을 마친 뒤에는 밖으로 나와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뭔가 고급스러운 건물이 있었는데, 아내의 말로는 이 근방에서 상당히 유명하고 가격도 제법 되는 훠궈 집이어서 자기가 눈여겨 봐뒀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훠궈집이 아니라 바베큐 가게였다고 한다. 뭔가 잘못 읽었던 모양이다. 다음에 가오슝에 다시 올 때는 이 식당에서도 한번 식사를 해 보기로 했지만, 도대체 언제쯤이나 가오슝에 다시 갈 수 있을까.

 

(좌) 대만의 향과 고국의 향이 짬뽕되어서 오묘했던 지파이 김치덮밥, (중/우) 쇼핑몰 지하에 위치한 슈퍼마켓. 아이들이 끌고 다닐 수 있는 카트가 재미있었다.
몬가... 몬가 고급져 보이는 식당 모습

 

제법 저렴하면서도 끝도 없이 들어가는 무한리필 훠궈집, '랄은식상마라화과'

 

이 날 일정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무한리필 훠궈 가게 '랄은식상마라화과辣癮食尚麻辣火鍋'였다. 우리가 갔던 2019년 10월 기준으로는 첩운 홍선 중앙공원역에서 내려서 도보로 5분 정도 걸렸지만, 지금은 메이리다오역 근처로 이전하기 위해 임시로 가게를 닫은 상태라고 한다. 얼마 안 있어서 재오픈한다고 하니 언제고 가오슝에 다시 가면 이번에는 메이리다오 쪽에서 즐겁게 식사를 하면 될 것 같다(아래 지도에도 신점의 주소를 표시해 두기로 한다. '폐업함'으로 표시되기는 하지만, 6월 중으로 영업을 재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빈랑 중독자들이 아무렇게나 뱉어 놓은 핏자국 같은 붉은 침자국으로 가득한 골목을 잠시 걸으면 보라색 기조로 꾸며져 있는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안으로 들어가 두 명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먼저 예약했느냐고 물어본 뒤 자리로 안내해 준다. 늦은 시간에 찾아갔기 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있지는 못하실 거라는 안내를 받기는 했지만, 그렇게 엄청나게 배가 고픈 상태는 아니었기에 별 거리낌을 느끼지는 못했다. 2층에도 식사 공간이 준비되어 있어, 2층 자리에 짐을 풀고 메뉴판을 받아 무엇을 먹을지를 고민해 보기로 했다.

 

이곳은 탕의 종류와 고기의 종류를 정해서 주문하면 나머지 건더기들은 뷔페 형식의 진열대에서 자유로이 가져다가 익혀 먹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타이베이에서 먹었던 절인배추 백탕이 워낙 맛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절인배추 백탕과 마라탕을 주문한 뒤 고기는 돼지고기와 양고기를 주문하였다. 한번 주문을 해 두면 고기는 달라는 대로 계속 먹을 수 있다. 이렇게 주문을 해 두고 재료 코너에 가서 재료와 소스를 만들어다 먹으면 되는 시스템이다. 가격은 어떻게 주문하든 모두 1인당 599위안. 한국 돈으로는 약 2만 4천원 정도에 무려 무한리필 훠궈라니, 더더욱 하이디라오에 갈 유인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고급스러운 훠궈 가게였던 칭화자오와는 다소 다른 맛이기는 했지만, 이 곳의 훠궈 또한 상당히 훌륭한 맛이었다. 늦은 시간에 찾아갔는데도 재료가 무척 신선했고, 특히 얇게 썬 생양고기가 너무나도 부드럽고 맛있었다. 이미 드림몰에서 반 그릇씩 밥을 먹고 왔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무한리필 집에 오기에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몸 상태였을지도 모르지만, 고기와 야채가 워낙에 맛있었던 탓에 쉬지 않고 음식이 뱃속에 들어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음료도 공짜여서 시원한 슬러시와 청량음료를 옆에 두고 계속 들이킬 수 있었다는 점도 장점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최적의 식사처인 셈이다. 마라탕이야 좀 맵긴 했지만, 마라탕이라는 게 본래 매운 음식이 아닌가.

2인분을 주문하면 나오는 한상차림이다. 고기 때깔이 훌륭하다. 재료는 진열대에서 가져다 자유롭게 담가 익혀 먹는다.
얇고 영롱하게 썰어져 있는 양고기의 아름다운 모습. 공심채가 화분 모양의 그릇에 담겨 있는 것이 재미있다.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입가심으로 땡겼다.

괜찮은 가격에 제법 질 좋은 훠궈를 배불리 즐기고 집에 들어오니, 지금껏 미뤄 뒀던 피로가 한순간에 다리로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하며 다리의 피로를 풀어 주고, 아내의 발에 잡힌 물집에 소독된 실을 꿰어 처치를 해 준 뒤 한동안을 침대에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둘 다 잠들고 말았다. 다음 날은 하루종일 대만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날. 후회 없이 신나게 놀아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