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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191005 Taiwan

대만유람기 2019 (19) : [8일차] 도심 속의 휴양지 치진 섬 돌아다니기, 생각보다 훌륭했던 조개박물관과 반가운 이들과의 저녁 식사, 가오슝 주교좌성당으로 마무리한 여정의 끝자락

by 집너구리 2021. 6. 19.

가오슝의 발상지, 도심 속의 휴양지 치진 섬으로

 

구산 페리를 타고 10분 남짓 나가면 치진 섬이다. 하마싱 철도문화원구에서 서쪽 바닷가를 바라보면 바로 내다보이는 길쭉한 막대기 같은 섬으로, 지도를 보면 마치 가오슝 앞바다를 쭉 가로막고 있는 방파제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자연섬이다. 그리고 가오슝의 기반이 된 어촌 마을이 처음 생겨나기 시작한, 말하자면 가오슝이라는 도시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원주민들도 많이 살지 않던 이 곳에 처음 도달한 한족 가족들이 동네 원주민들의 이름을 따서 '따꺼우'라고 이름붙인 작은 어촌 마을이 지금의 치진 섬 북부에 위치했고, 이 지역의 가치에 주목한 청나라와 그 뒤를 이어 지역을 점령한 서양인들, 그리고 일본인들이 이어서 도시를 개발하면서 지금의 대만 제2의 도시 가오슝으로 발전한 것이다.

 

구산 페리에는 아니나다를까 엄청나게 많은 수의 관광객이 올라탄다. 1층 입석칸에만 못해도 100명 안팎은 되는 인원이 올라타는 듯했다. 바다로 나아가니 가오슝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덩치 큰 배들이 구산과 치진 사이의 좁은 해협을 통해 드나드는 모습도 보였다. 짭짜름하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즐기는 시간도 잠시, 곧 배는 치진 선착장에 도착했다.

 

(좌) 여러 대의 페리가 구산과 치진 사이를 쉴새없이 오간다. (우) 구산과 치진 사이의 좁은 해협 사이로 거대한 배들이 오고간다.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는 치진 선착장 건물.

일본 중소도시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고풍스러운 적벽돌 건물인 치진 선착장을 나오면 상당히 혼란한 분위기가 펼쳐진다. 이 광경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돌이켜 보면 대만에서 본 대부분의 야시장들이 이 비슷한 분위기였다. 차와 자전거, 아이와 어른들, 내국인과 외국인들이 한데 뒤엉켜 정신없이 오고가고, 취두부 냄새와 따가운 햇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클랙션 소리와 누군가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소리. 여기에 다른 곳과 차별화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람결에 실려 오는 은은한 바다 내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리 가오슝 본토가 바닷가에 위치하였다고는 하지만, 진짜 '섬'은 역시 차원이 달랐다. 나는 인생의 삼분의 일 가량을 사실상 바다나 다름없는 시화호 변에서 살았기 때문에 해변 풍경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역시 다른 나라씩이나 와서 마주한 섬과 바닷가의 느낌은 어딘가 조금 달랐다.

 

타이중의 가오메이 습지에서도 느꼈던 바이지만, 대만 서해안의 바닷가는 어딘가 한국 서해안과 닮은 구석이 있다.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해 있기 때문인지, 갯벌도 발달해 있고, 모래도 흔히 말하는 '백사장'이 아니라 약간 거무튀튀하면서도 고운 모래펄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치진 선착장에서 내려 오 분 정도 걸으면 바로 도착하는 치진 해수욕장을 마주했을 때에는 순간 여기가 대만인지, 아니면 어디 경기도 남부 근방의 해수욕장인지 살짝 헷갈릴 정도였다. 햇볕이 워낙 뜨거운 탓인지 나무 하나 없는 백사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보다는 물가에서 노는 사람들이나 아예 배후지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볕은 뜨겁지만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나름대로 땀을 식혀 주어서 제법 기분은 좋았다. 나는 물놀이는 좋아하지만 굳이 놀 거라면 민물에서 노는 편을 선호하는 편이기도 하고, 갈아입을 옷도 가지고 오지 않은 터라 발만 담그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고, 물놀이를 좋아하지 않는 아내는 배후지의 나무 그늘 밑에서 앉아서 쉬기로 했다. 오후 두 시가 넘어가는 시간대라 점점 기울기 시작한 햇살이 잔잔한 파도 물살에 부딪쳐 모래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시원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져서 하마터면 한참을 오도카니 바닷가에 서서 물맞이를 할 뻔 했다. 가오슝을 비롯한 남부 지방이 대만인들에게는 휴양지로 유명하다더니, 도심 한가운데에 이런 좋은 물놀이 장소가 있다는 것만 봐도 알 만하다.

백사장에서 노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주로 물가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푸른 하늘 아래로 서 있는 야자수가 마치 열대 휴양지 같다.
10월 초인데도 뜨거운 날씨라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은은히 일렁이는 파도는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노곤해진다.

 

전기자전거를 빌려 치진 섬 돌아다니기

 

과연 8일씩이나 하루에 이만 보는 넘게 걸어다니는 강행군을 지속하다 보니, 이미 한 이틀 전부터 아내는 다리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고 걷기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나조차도 슬슬 지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 여행지나마 좀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우리의 눈에 들어온 전송수단은 크게 세 가지였다.

 

1. 자전거. 둘 다 자전거를 탈 줄 알고, 주위의 대여점을 알아보니 가격도 제일 쌌지만, 힘들이지 않고 돌아다니고 싶은 마당에 굳이 페달을 밟으면서 남은 기력을 모두 불싸질러 버리는 게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

2. 스쿠터. 전동 스쿠터와 내연기관 스쿠터 모두 대여 가능했는데, 일단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아 오지 않기도 했거니와 단기체류하는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대만에서 운전하는 것이 불법이다. 제일 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법을 어길 수는 없으므로 제외.

3. 전기 자전거. 많은 사람들이 전기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생김새는 영 조잡하긴 했지만, 비용도 스쿠터보다는 적게 들거니와 힘들일 필요도 없을 것 같아 괜찮은 선택지인 듯했다.

 

이렇게 해서 전기 자전거를 빌리기로 결정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필이면 온데 사방 천지의 대여샵을 돌아다녀도 빌릴 수 있는 전기자전거를 통 찾을 수가 없었다. 다들 생각하는 게 비슷비슷해서 모두 전기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듯했다. 아내는 다리가 아픈 탓에 바닷가 근처의 쉼터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하고, 나는 한 30분 가량을 혼란한 치진 옛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닌 끝에 마침내 (구글지도 평점은 낮지만) 탈 수 있는 전기자전거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라인페이로 대여가 가능하다고 해서 (일본 출장 갈 때 등록해 뒀던) 라인페이를 사용해서 결제하려 했지만 뭔가 한국 카드 인증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하여 포기하고 그냥 대만 달러로 결제했다. '분홍돼지 전기자전거'라는 이름답게 누가 봐도 파워포인트로 대강 그린 듯한 조잡한 생김새의 분홍색 돼지 그림이 그려진 차양을 두른, 휠얼라인먼트가 잘 되어 있지 않은 전기자전거를 끌고 아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야 타!"를 시전하니, 잔뜩 지쳐 있던 아내가 박장대소를 하면서 즐거워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는 치진 섬은 무척 좁고 길면서도 탁 트인 느낌이 들었다. 시내 도로로 나가서 주행하면 안 되고 관광구역 내의 정해진 도로만을 돌 수 있으니, 처음 치진에 가는 관광객들은 꼭 주의해서 주행하도록 하자. 보통 대여소에서 지도를 건네 주면서 잘 설명해 주니 숙지하는 것이 좋다. 또 이건 뽑기운인 것 같긴 한데, 자전거의 정비상태가 다소 좋지 않아 앞에서 말했듯 바퀴의 방향이 영 괴이쩍게 틀어진 자전거가 걸리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몬 자전거가 딱 그런 케이스여서, 처음에는 방향 조절을 잘 못해 포장도로 가에 빠지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한동안 주행하니 제법 익숙해져 그런 일은 줄어들게 되었다. 나머지는 일반적으로 자전거나 자동차, 오토바이 등을 운전하는 요령과 같다. 교통흐름만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잘 달리면 큰일이 일어날 경우는 없지만, 다양한 나라에서 관광객이 찾아오는 특성상 드물게 내가 달리는 차선에서 바로 맞보고 역주행을 해 오는 운전자들이 있다. 요점은 정신 바짝 차리고 주행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가끔씩 멈춰서 경치도 봐 주고. 아름다운 치진 섬의 경치를 그저 드라이브에만 집중하느라 놓치는 것도 아깝지 않겠는가. 

(좌)의 자전거를 보고 괜찮다 싶어서 찾아다녔는데, 결국 빌린 건 (중)의 영 미덥지 않은 자전거였다. (우) 그래도 주행감은 나쁘진 않았다.
치진 섬은 나름대로 이곳저곳 아기자기 잘 꾸며진 맛이 있다. 바닷가 휴양지에 온 느낌도 물씬 들고.

 

무심결에 들어갔지만 이번 여행 최고의 수확 중 하나가 된 치진 조개껍데기 박물관

 

치진 섬에서 너무 늦게까지 있기는 좀 애매하기도 하고, 후술할 저녁 식사 약속 건도 있고 해서 치진 섬을 끝자락까지 둘러보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말자고 우리는 뜻을 모았다. 더 남쪽까지 내려가면 풍차공원도 있고 멋들어진 도교 사원도 있다지만, 거기까지는 내려가지 않는 대신 이상하게도 신경이 쓰이는 한 곳을 가 보기로 했다. 그 이름도 정직하기 짝이 없는 '치진 조개껍데기 박물관旗津貝殼館'. '무지개 교회'로 유명한 바닷가 공원 한켠에 서 있는, 말 그대로 조개 모양으로 생긴 박물관 건물에 도착하니 이 앞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나름대로 멋들어지게 한구석에 전기 자전거를 주차해 두고 안으로 들어간다. 놀랍게도 이 작은 박물관이 대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개 박물관이란다. 입장료는 어른 30위안(약 1,200원), 어린이 15위안(약 600원). 대만 치고도 그리 비싼 입장료는 아니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계단을 오르면 이렇게 조촐한 입구가 나타난다. 문 앞에 대강 적어 놓은 입장료 안내가 보인다. 현금결제만 된다.

반쯤은 시간을 때울 목적으로 들어간 곳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엄청나게 충실한 전시관이어서 우리 부부 모두 이곳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기본적으로 대만 인근에 서식하는 패류와 복족류의 껍데기를 위주로 하여, 중국 연안이나 한국, 일본, 남중국해 연안에 이르는 넓은 지역의 조개들을 거의 총망라해 놓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보존 상태가 좋은 조개껍데기들을 전시해 두고 있었다. 어렸을 적 <비주얼 박물관> 같은 데에서나 봤던, 희한한 모양새와 영롱한 빛깔을 자랑하는 조개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식용 조개에만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생김새의 조개들이 살고 있는지, 얼마나 아름다운 모양새의 껍데기를 가진 조개들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또한 우리가 흔히 '조개'나 '고둥'이라고 일컫는 이매패류와 복족류의 껍데기뿐만 아니라, 이른바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앵무조개의 다양한 껍데기 표본들, 두족류 중 유일하게 집을 짓는다고 알려져 있는 집낙지의 집들, 심지어는 대만 연안에 서식하는 상어의 턱뼈 표본(상어는 연골어류이므로 몸에서 단단한 뼈라고는 턱뼈밖에 없다)까지 우리가 바다에서 볼 수 있는 딱딱한 것들은 거의 모두 모아 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몇 공간만 빼고 모든 구역이 촬영 가능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예쁘고 흥미로운 조개들은 모조리 사진을 찍어댔다. 우리가 언제 다시 이 곳에 와서 이 전시물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거니와, 사실 그냥 예쁜 조개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다 밑의 뻘에 묻혀 살거나 바닥을 기어다니거나 하면서 햇볕을 볼 일조차 그리 많지 않을 것만 같은 이 녀석들이 어쩜 이렇게 다양한 생김새와 다양한 빛깔을 가지고 있는지,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왔다.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도 많았는데, 어느 나라 출신의 아이들이든 다들 한껏 신나서 엄마아빠와 함께 조개 껍데기를 가리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귀엽기는.

 

(좌) 앵무조개와 집낙지의 귀한 표본들. (우) 오분자기류의 표본들. 우리가 흔히 알고 잘들 먹는 전복과 비슷한 종류이다.
이렇게 다양하고 다채로운 생김새의 고둥들이 알고 보면 대만에서 일본에 거치는 연안에 모두 살고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좌) 개오지로 만든 아름다운 공예품. (중)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전부 조개들이예요. (우) 앵무조개를 잘라 보면 이렇게 생겼다. 
청자고둥과 입술고둥의 종류들. 본래 아름다운 만큼 독이 있어서 발견하더라도 함부로 다가가면 안 되는 녀석들이다. 생전엔 말이지!
(좌) 대만 근해에 서식하는 상어의 턱뼈, (중) 왜 이렇게 생겼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불량배스러운 조개, (우) 대왕조개의 표본도 있다.
털실로 짜서 만든 산호의 모형이다. 카고시마에서도 비슷한 것을 본 적 있다. 털실로 만들었지만 실제 산호초랑 정말 유사하다는 점이 포인트.

 

노을을 등지고 다시 구산으로, 반가운 얼굴들과의 저녁 식사

 

생각보다 즐겁고 인상적이었던 조개껍데기 박물관을 등지고, 우리는 다시 전기자전거를 타고 치진 옛 거리로 돌아왔다. 섬을 저녁께까지 한 바퀴 돌고 나니 슬슬 배가 고프기도 했고, 더 늦어져서 해가 지기 전에는 섬을 나가면서 바닷노을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기자전거 대여소에 다시 자전거를 반납하고, 슬슬 걸어 선착장으로 돌아갔다. 들어오는 관광객은 그렇게나 많더니만, 나가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넓은 배가 텅텅 비었다.

 

아내는 선실 안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쉬이고, 나는 선실 밖의 복도에 나가 바닷바람을 쐬었다. 멀어져 가는 치진 섬을 배경으로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구산 옛 조계지와 치진 섬 사이의 좁은 해협 사이로 절묘하게 저녁 해가 떨어지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홀린 듯이 카메라를 켜고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약 삼십 년이 되는 시간 동안 많은 여행을 다니며 많은 일몰을 보았지만, 가오슝에서의 마지막 밤을 앞두고 보는 아름다운 일몰은 특히 각별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치진 선착장. 여기서 다시 표를 사서 배를 탄다. 나갈 때는 생각보다 대기가 적다.
다시 도시로. 해협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태양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다시 구산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항구 가에 서 있다가 들어오는 배를 보고 손을 흔든다.

이 날의 전날 저녁에 생각지도 못했던 연락이 왔다. 이모와 첫째 사촌누나가 둘이서 마침 대만 여행을 와 있는데, 너희 부부도 대만에 와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시간이 되면 한 번 만나자는 것이었다. 듣자하니 가오슝에서 하루 묵고 다다음 날 우롱차로 잘 알려져 있는 그 유명한 아리산 산행을 갈 예정이란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아내가 다소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고민하다가 이 날이 되어서야 아내에게 의향을 물어봤는데, 다행히도 아내가 "가까이 계시면 당연히 한 번 만나는 게 좋지!"라고 기꺼이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일단은 구산 선착장 앞에 있는 빙수집 '하이즈빙'에서 만나 가볍게 빙수 한 그릇을 때린(?) 뒤 식사를 하러 가기로 약속을 잡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외국에서 약속을 잡고 지인을 만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그렇게 여행을 자주 다녔음에도, 둘 다 워낙 단독행동을 좋아하고 일정 어그러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근처에 지인이 있을 경우에도 연락을 잘 하지 않는 성격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만리타향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가족을 만나니 생각보다 훨씬 반가웠다. 알고 보니 이모네도 급작스레 잡힌 가오슝행이었고, 우리 부부가 부담스러워할까 봐서 연락을 굳이 하지 않으려다가 그래도 모 아니면 도다 싶어서 이야기를 꺼내 본 것이었다고 한다.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만남 자체는 성공적이었으니, 다행인 셈이다.

 

구산 선착장을 나오면 바로 앞에 떡하니 서 있는 '하이즈빙'. 아니나다를까 망고빙수는 냉동망고를 썼지만, 적어도 타이베이보단 맛있었다.

냉동망고를 썼지만 어쨌든 달고 시원했던 망고빙수를 먹고 더위를 다소 달랜 후, 우리는 어느 식당으로 갈지 고민에 빠졌다. 나와 아내는 원래 대만에서의 마지막 식사나 다름없는 오늘의 식사를 우육면이나 훠궈로 마무리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행이 두 명 더 끼니 일단 대만 음식이 입에 얼마나 맞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니나다를까 이모는 우리 어머니와 입맛이 비슷해 대만의 향신료가 잘 맞지 않는다고 했다. 이모는 자기 걱정은 말고 젊은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자고 했지만, 여행에서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알고 있는 나머지 세 젊은이들에게는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그렇게는 하지 못할 일이었다. 구글지도를 켜서 근처에 있는 식당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는데, 사촌누나가 옌청푸역 근방에 있는 '다오중탕島中堂'이라는 식당을 찾아냈다. 리뷰를 보니 평점도 제법 높고, 나름대로 퓨전 음식을 추구하는 곳이라 대만 향신료 향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한다.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어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우리는 가까운 시쯔완 역에서 첩운을 타고 오늘 아침에 처음 내렸던 옌청푸 역으로 돌아갔다. (이 식당은 2021년 현재 폐업했고, 대만 내 어디로도 이전한 흔적이 없는 듯하다. 정말 아쉽다.)

 

(좌) 뜬금없이 옌청푸 역에 교토 란덴 아라시야마선의 철도무스메 캐릭터 '후쿠오지 히카루' 등신대가 서 있다. 란덴과 가오슝 첩운의 콜라보라나. (우) 제법 모던한 느낌의 다오중탕 간판. 왜 없어진 거냐...

상당히 고급스럽고 모던한 느낌의 인테리어를 가진, 건물의 외양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의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좁은 층계참을 통해 2층으로 안내받는다. 다행히도 종업원이 영어를 대강 할 줄 알아서,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영어로 주문했다. 기본적으로 퓨전 느낌의 식사들이 주류를 이루는 곳이어서, 베이스는 대만 음식이지만 서양식으로 어레인지한 음식들이 대부분이었다. 동파육과 마늘 볶음밥, 마파두부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레몬새우 요리, 그리고 리뷰에서 가장 그럴싸하게 소개된 와플말이를 하나씩 주문해서 나눠 먹기로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 다시 찾아보면서 폐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정말 안타까운 가게였다. 음식이 모두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균형 잡힌 맛을 가진, 하나같이 훌륭한 요리들이었기 때문이다. 탱글탱글하면서도 짜지 않게 졸여진 동파육과 향이 폭발하는 마늘볶음밥을 같이 먹으면서, 계란을 얹은 밥을 하나 더 시켜 마파두부와 새우 요리를 곁들여 먹고 있자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비주얼이 화려한 이 와플말이 안에는 절묘하게 간장 양념을 하여 볶아낸 잘게 다진 돼지고기와 각종 야채들이 가득 들어 있어서, 바삭바삭함과 달콤짭짤한 맛이 기가 막혔다. 대만 향신료가 잘 맞지 않는 이모도 연신 감탄하면서 젓가락을 움직였고, 한 톨도 남김없이 네 명이서 모든 요리를 해치우기에 이르렀다. 정말 훌륭한 퓨전식 요릿집이라 가오슝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꼭 추천하곤 했던 가게인데, 코로나 역병이 돌고 나서부터 추천해 줄 사람이 없던 끝에 결국은 폐업했다니 못내 안타까웠다. 이렇게 코로나가 우리의 즐거운 추억 하나를 또 날려 버렸다.

 

예쁜 음식이 맛도 좋다지만, 정말 그랬다. 어쩜 하나같이 이렇게 빠짐없이 맛있을 수가 있는지.

 

마무리는 가오슝 주교좌성당에서, 아이허를 따라 숙소로

 

다오중탕에서 즐겁고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너무 배가 불렀다. 잠시 걸으면서 소화를 시켜야 할 것 같아서, 우리는 넷이서 가오슝의 어느 식당이 맛있었고, 오늘 각자 어디를 갔었고, 내일은 어떤 일정일 것인지 등을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땅거미가 내려앉은 옌청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15분 남짓을 걸었을까, 서울로 치자면 중랑천 정도는 되어 보이는 제법 큰 강이 나타났다. '사랑의 강'이라는 뜻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아이허愛河 하구다. 완연히 밤이 된 강가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 주위를 거닐거나, 벤치에 앉아서 야경을 구경하는 모습이 보였다. 과연 강가를 따라서 멋진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불을 밝히고 있으니, 이 또한 운치가 있었다.

 

다음 날 신새벽에 일어나 아리산으로 떠나야 한다는 이모와 사촌누나를 다리 어귀에서 배웅하고, 우리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가오슝 주교좌성당으로 향했다. 다음 날인 일요일은 늦은 낮쯤 해서 한국에 돌아갈 텐데, 여독에 지친 상태에서 바깥에 나갈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기도 했고, 마침 근처에 성당이 있으니 이 곳에 들러서 미사를 보고 가자는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주교좌 성당 구경도 하고 좋지 뭐.

아름다운 야경으로 둘러싸인 아이허 변.

 

 

나중에 <세계 성당 방문기>편에서 자세히 쓰겠지만, 가오슝 주교좌성당의 정식 명칭은 '매괴성모성전주교좌당'이다. '매괴'는 장미류의 꽃을 일컫는 중국어이라서, 한국식으로 풀어 쓰자면 '장미의 성모 마리아 주교좌성당' 정도가 되리라. 밤에 만난 고딕 양식의 성당은 명동성당과 마치 형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척 닮아 있었다. 명동성당의 외벽은 적벽돌이지만 이곳의 외벽은 콘크리트라는 것이 사소한 차이점이랄까. 재미있는 것은 원색을 무척 좋아하는 중화권 사람들의 특성이 여기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성당 파사드에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는 빨간색 글자의 '천주당'이라는 한자 하며, 총천연색으로 만들어져 걸려 있는 교황 프란치스코와 류쩐충 가오슝 대주교의 문장 하며, 세계 어느 나라에 갖다 놔도 이건 대만 사람들이 만든 성당이라는 티가 확 나는 재미있는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밤이 되니 조명을 아름답게 밝혀 놔서, 가까이로 가면 갈수록 퍽 멋있는 성당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고풍스러운 느낌이긴 하고 실제로 오래 되긴 했는데... 미묘하게 중화의 느낌이 나는 가오슝 주교좌성당.

토요일 저녁 미사라 신부님이 대만어(민남어)로 미사를 드리는데, 이게 표준중국어랑은 완전히 다른 언어에 가까울 정도로 발음 차이가 많이 나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영 알아듣기 곤란했다. 재미있게도 대만어의 한자 발음은 표준중국어보다는 차라리 한국식 한자음 발음에 근접한 듯이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성당 내 여기저기 붙어 있는 모니터에 중국어와 영어 통상문을 띄워 준 덕에 흐름 파악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는 점이다. 미사가 끝나고 나니 아내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이제까지 일본 가서 미사 볼 때 내가 느꼈던 심정을 알겠어? 라고 킬킬거렸다. 과연 어떤 느낌인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답답했겠구나.

 

'장미의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이라 그런지, 미사가 끝나고 나니 흥미롭게도 전례반으로 추정되는 나이 지긋한 여성 봉사자가 장미 한 송이씩을 모든 참례객들에게 나눠 줬다. 어떻게들 하나 하고 지켜봤더니, 성당 왼쪽 플라잉버트리스 밑에 모셔진 성모상 앞에 장미를 바치고 짧게 기도하는 것이 이곳의 관례인 모양이다. 우리에게도 장미를 한 송이씩 주시기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가서 따라했다. 기도한 뒤 성당을 둘러보기로 했다. 전반적으로 백색 기조에다가, 모난 곳마다 진한 색 자재를 덧붙여 강조한 깔끔하고 아름다운 예배당이었다. 크기는 명동성당과 전주 전동성당의 딱 중간 정도 크기인 듯하다. 여기저기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모습이 보였지만, 그마저도 뭔가 정이 가는 아늑한 곳이었다.

 

(좌) 예전 정교회 성당에서 조지아어 기도문을 본 뒤로 다시 느끼는 압박감. (우) 왜 '고해실' 간판도 붉은색 글씨로 써 놓는 건데 대체...
흰색 기조로 모난 부분을 덧대어 강조한 깔끔하면서도 아름다운 내부. 제대 왼편에 모셔진 성모상에 이렇게 장미를 바친다.

모기에 물린 곳을 득득 긁으며 성당을 나온 우리는 전철을 타러 가기 위해 아이허 강변을 느긋하게 걸었다. 낮에 맞았던 바닷바람과는 다소 다른, 시원한 강바람이 기분 좋게 얼굴을 간질였다. 마지막 날을 이렇게 여유 있게 강변을 걸으면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일이면 정든 대만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일상을 시작해야겠지만, 그래도 그렇기에 오히려 있는 힘껏 이 순간을 끝까지 즐기기로 한다. 사람들이 바삐 오고가는, 더위로 푹푹 찌지만 맛있는 음식과 친절한 사람들로 가득한 대만의 밤 풍경을 마지막까지 눈 속에 담는 것이 이를테면 그렇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아이허 강. 이렇게 이날의 일정도 마무리를 짓는다.
숙소에서 사치스럽게(?) 욕조 목욕을 즐기고 나서 간식을 좀 땡겼다. 복숭아가 정말정말 맛있었다. 맥주 좀 더 사 올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