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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190526 Fiji | Sydney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0. 시작

by 집너구리 2021. 7. 25.

대만유람기를 다 끝내고 나서 한동안 쓸 거리가 없어서 곤혹스러웠다. 간간이 동네 근처의 가게들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집에서 했던 일들에 대해 소개하는 일은 있었지만, 워낙 단조로운 삶을 살다 보니 그나마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마땅히 쓸 건덕지가 있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종종 챙겨보는 tvN의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얼떨결에 붙잡혀 출연하게 된 나영석 PD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tvN으로 이적했을 때 무엇을 보여 드려야 할지 무척 고민이 많았지만, 결국은 조금 욕 먹더라도 하던 것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고 생각했다." 물론 내 여행기는 읽는 사람도 적고 거의 자기만족용으로 쓰는 것이지만, 예전에 다녔던 여행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적어 보다 보면 잊고 있었던 일들을 떠올릴 수도 있고, 추억을 되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시 여행기를 적어 보자'라고 일단 마음을 먹고 나자, 다음은 어떤 여행을 적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 뒤따라왔다. 되돌아보고 기록해 보고 싶었던 여행은 많고 많지만, 가장 기억이 선명하게 나면서도 특별했던 여행을 먼저 정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의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

 

 

신혼여행 계획하기 : 어디를, 어떻게 갈까?

 

신혼여행을 계획할 때 주위 사람들에게 받은 조언으로는, 신혼여행은 '휴양'을 하거나 '관광'을 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했다. 일 주일이 넘는 긴 휴가를 받을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관광을 택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지만, 가뜩이나 결혼 준비로 지친 상황에서 (준비할 때는 이렇게 지치리라 미처 생각지 못하고 희망에 가득 차서 짠) 계획에 맞춰 돌아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 주일 내내 예쁜 풍경과 노곤한 햇살로 가득한 휴양지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도시 관광을 지극히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맞지 않는 옷일 것 같았다. 

 

세상은 넓고 갈 만한 여행지는 많고 많다(적어도 그 때는 그랬다. 망할 코로나!). 이렇게 정하기 어려울 때 쓸 수 있는 것은 소거법이다. 우리는 일단 '각자 피하고 싶은 여행지'를 먼저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그 조건을 제해 나가다 보면 선택지를 상당히 좁힐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각자가 얘기한 피하고 싶은 여행지는 다음과 같았다.

 

아내 : 되도록이면 가까운 곳은 피하고 싶다. 일본 일주나 대만 일주 같은 것도 재미는 있겠지만, 신혼여행은 보다 먼 동네로 가고 싶다. 그리고, 관광을 많이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원체 도시 관광을 좋아하고 휴양지는 선호하지 않으니까.

 

나 : 관광과 휴양에 대한 선호는 나도 완전히 똑같다. 여기다 더 추가하고 싶은 것은, 가능하면 한국인이 적은 곳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신혼 여행을 가서까지 주위에 한국인들이 버글버글한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이 정도로 얘기를 좁혀 보고 나니, 일단 대부분의 아시아권 국가는 선택지에서 제외되었다. 일본, 대만을 비롯하여,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휴양지인 인도네시아의 발리나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 베트남의 다낭이나 하이퐁, 필리핀의 세부나 보라카이 등은 그다지 멀지도 않고, 한국인은 또 너무 많아서 어떤 조건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유럽권이나 남북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도 대부분 걸러졌다. 관광의 비중을 상대적으로 낮추고 싶은데, 이런 동네에 가게 되면 강행군은 따놓은 당상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 때 눈에 띈 것이 피지였다. 피지는 한국인들에게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휴앙지이고, 한국에서도 제법 멀리 떨어져 있다(당시 기준으로 인천에서 난디 공항까지 대략 10시간)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에게 피지 이야기를 꺼내 봤더니 무척 좋아하면서 "어떻게 이런 데를 다 찾았대?"라고 이야기해 줘서 내심 뿌듯했다. 평소에 구글 지도를 일없이 돌려 보던 취미 아닌 취미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문제는, 피지에서 관광을 할 만한 도시가 비티레부 섬 남부에 있는 수도 '수바'뿐이라 그 부분이 다소 애매하다는 점이었다. 피지의 관문인 난디 공항은 비티레부 섬의 북서부에 있고 외국인들이 자주 묵는 리조트도 그 근처에 많은데, 수바까지는 대중교통이 잘 안 되어 있는데다 차로만 두 시간이 넘게 걸리기 때문이다(피지 본토는 생각보다 그리 작은 섬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다른 발상을 했다. 그럼 옆 동네까지 가서 둘 다 하지 뭐.

 

일단 물 좋고 볕 좋은 곳에서 며칠 휴양을 한 다음에, 근처의 관광할 만한 곳으로 옮겨가서 관광을 하면 휴양도 하고, 관광도 하고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다음으로 여행할 곳은 생각보다 빨리 정해졌다. 피지에서 3박 4일을 지낸 다음, 볼거리가 많은 호주 근방으로 넘어가서 다시 3박 4일을 하면 휴양도 챙기고, 관광도 챙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당시 플래너를 끼고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플래너와 연계된 신혼여행 전문 여행사에 우리의 계획을 알려주고 예약을 부탁했다. 다만 여행사의 일 처리가 워낙에 느린 나머지 중간에 속 터지는 순간순간들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피지 일정 중 내리 3박을 리조트에서 묵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바람에 여행사와 결국에는 얼굴을 붉히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결혼식 전까지 큰 틀에서의 여행 일정을 짜는 데는 성공했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우리가 저쪽에서 제안한 투어 옵션들을 전부 쳐내서 앙심을 품고 그랬던 것이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지난 일이니 더 탓할 것은 아니다 싶다.

 

그렇게 피지에서 3박 4일, 시드니에서 3박 4일이라는 그야말로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