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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190526 Fiji | Sydney

[이것저것 다 하는 신혼여행] 1. 결혼식이 끝나고, 다음 날 밤 비행기로 피지 난디 공항까지

by 집너구리 2021. 7. 26.

* 이 여행기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인 2019년에 있었던 일을 다룹니다.

 

 

출발 전, 짧은 휴식을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으로

 

토요일 오전에 있었던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니 우리는 완전히 기력이 빠져 있었다. 과연 신혼여행의 첫 여행지를 휴양지로 잡아 놓기 잘 했다는 생각이 뼈저리도록 들었다. 화장과 머리 무스를 지우느라 세수와 샴푸를 몇 번이고 한 끝에 우리는 녹초가 되어 이불 위에 널브러졌다. 한 시간 남짓을 그러고 누워 있었더니 슬슬 배가 고파져서 피자 한 판을 시켜 먹었더니 그래도 다소간 기운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공교롭게도 그날 근처에 사는 아내의 친구가 처음으로 고양이를 데려왔다고 했는데, 친구들이 (무려 우리 결혼식에 참석한 이후 2차 모임 비슷하게) 고양이를 보러 한 번 더 모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내가 무척 가고 싶어했다. 산책삼아 아내를 친구 집에 데려다 주고, 나는 집에 돌아와서 한참을 더 누워 있었다. 가방을 싸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아무것도 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한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아내가 고양이털 범벅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우리는 한동안 신나게 고양이 사진과 영상을 보면서 떠들다가,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허겁지겁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비행기는 다음 날인 일요일 저녁에 출발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행에 가서 입을 옷을 조금 더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다. 나머지 짐을 다 싼 뒤 한숨 자고, 일요일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 백화점으로 향했다. 국수 한 그릇과 빙수 한 그릇으로 배를 일단 채우고, 때때옷과 수영복을 골라 집에 돌아오니 어느덧 슬슬 출발해야 할 때가 되었다. 옷을 고이 챙겨 넣고,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한 다음 드디어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이렇게 길게 떠나는 여행, 멀리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라 그저 설레는 일뿐이었다.

 

다소 신나서 찍었던 오후 5시경의 편명 안내판.

일단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쳤다. 공항에는 출발하기 두 시간쯤 전에 도착하는 편인데, 수속이 빨리 끝나 시간이 생각보다 다소 많이 남게 되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일곱 시 넘어서 출발하는 비행기인데 저녁 기내식을 줄지 안 줄지 확실하지 않으므로 일단 뭔가를 먹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그야말로 '기내식을 줄지 확실하지 않다'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배를 채우기보다는 살짝 요기만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마침 면세구역으로 들어가기 전, 터미널 지하에 분식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리로 향했다. 메뉴는 가볍게 떡볶이와 녹두전으로 했다. 우리는 부부가 쌍으로 '해외에 여행을 가서 한식을 먹는다는 행위'를 아주 싫어하는 대신, 여행을 떠나기 전의 식사는 되도록 한식으로 먹고 출발하는 편이다. 떡볶이에 녹두전이라니, 이보다 더 한식다운 요깃거리도 많지 않을 터이다.

 

공항 식사이므로 물론 비쌌지만, 맛은 기대했던 것보다 괜찮았다. 인천공항 2터미널 지하의 '순희네'.

 

이윽고 탑승 시각이 다가왔다. 그 어느 때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는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돌이켜보니 출장을 다니거나 여행을 다닐 때 해당 국가의 플래그 캐리어나 준플래그 항공사는 제법 많이 이용해 봤는데,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게 된 건 놀랍게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본 다닐 적에 자회사인 진에어는 종종 신세를 졌지만, 막상 한국 플래그 캐리어를 타게 되니 여러모로 신기했다. 장거리 여행치고는 작은 비행기였지만(수요가 적으니 당연) 대신 발 뻗을 공간은 생각보다 괜찮게 확보되어 있었고, 간단한 어메니티와 담요, 베개, 안대, 생수 등도 충실히 준비되어 있었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대표 항공사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베개, 담요(보라색), 어메니티 팩, 제주산 생수. 안대는 아마 담요와 어메니티팩 사이에 끼어 있는 듯.

 

이륙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쯤, 생각지도 않았던 밤 8시 남짓했던 시간대에 기내식이 나왔다. 면류와 밥류 중 고르라고 하기에 아내는 밥류, 나는 면류를 골랐다. '밥류'라 함은 곤드레밥 정식이었고, '면류'라 함은 해산물 볶음면이었다. 기내식에서 곤드레밥이 나온다는 점에 1차로 놀랐고, 그게 생각보다 맛있다는 점에 2차로 놀랐다. 해산물 볶음면은 다소 평범한, 동남아풍의 매운 볶음면이었지만 맛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곤드레밥이 너무 맛있어서 그렇지. 음료는 둘 다 와인으로 받았는데, 아무래도 밤을 새서 가야 하는 장거리 비행인 만큼 못 하는 술이라도 한 잔 하면 잠이 더 잘 오리라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몰랐다. 기압이 낮은 상공에서는 술도 훨씬 빨리, 그리고 독하게 취한다는 것을. 술을 거의 못하는 나야 물론 얼굴이 시뻘개져서 몸 이곳저곳을 미친듯이 득득 긁어댔지만, 나보다 술이 센 아내조차도 레드와인 한 잔에 완전히 취해서 계속 낮은 목소리로 끅끅 웃어대는 통에 이걸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고 퍽 난감했다.

 

(좌) 내가 고른 해물볶음면, (우) 아내가 고른 곤드레나물 비빔밥. 오른쪽이 더 맛있었다.

 

광란(?)의 식사가 지나가고 취기가 다소 진정되었을 무렵, 승무원이 우리에게 작은 박스 하나를 가져다 주었다. 재미있게도 대한항공에서는 비행기를 예약할 때 신혼여행 특전을 신청하면 이렇게 축하 케이크를 준비해 준다는 것이다. 내용물은 흰색 아이싱에 초콜릿 장식이 붙어 있는, 극히 평범하면서도 망가질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될 듯한 아담한 크기의 케이크였다. 별것 아니지만, 이런 걸 받아볼 일이 인생에 얼마나 있겠는가. 한번 먹어 볼까도 싶었는데, 시간도 너무 늦었고 식사도 무척 만족스럽게 한 상태라서 일단은 비닐봉투에 다시 넣어서 고이 걸어 두기로 했다. 예약한 리조트에 도착해서 먹어도 되겠지 뭐.

'THIS SIDE UP'이라고 되어 있는 게 어째 웃기다. 누가 이걸 보고 케이크 상자라고 생각하겠냐고.

잠시 후 아내는 잠이 들었다. 나는 아직 잠이 덜 와서, 노트북을 열고 앞으로의 일정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 있었다. 이때쯤 해서 승무원이 피지 입국 신청서를 나눠 주었다. 과연 영연방 국가, 다른 어떤 언어도 병기하지 않고 오직 영어로만 준비되어 있는 이 패기가 마음에 들었다. 앞뒷면에 필요한 내용을 꼼꼼이 적어 둔 뒤 여권에 끼워 두고, 무심결에 창 밖을 바라봤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비행기를 타고서도 깨어 있는 일이 흔치 않은데,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정말 창 밖으로 흐드러지게 별들이 떠 있는 것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잠들어 있는 아내 앞으로 팔을 뻗어 사진을 열심히 찍어댔지만, 안타깝게도 각도가 잘 안 나오는 데다가 광원은 작은데 기체는 계속 흔들리는 탓에 모두 실패했다. 이 때 본 북두칠성이야말로 이제까지 본 북두칠성 중 가장 멋있었는데, 그 광경을 카메라로 담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적어 내야 할 것이 생각보다 많다. 새삼 피지 친구들은 검역에는 진심이었다는 것이 느껴지는 뒷면도 볼 만하다.

 

어느 샌가 스르륵 잠이 들었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번째 기내식이 나오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한국 시각으로는 새벽 4시경. 피지가 한국보다 3시간 빠르니, 피지 시간으로 치자면 아침 7시경인 셈이다. 아침 식사를 하기에는 괜찮은 타이밍이다. 아침은 고를 것 없이 매시드 포테이토와 웨지 감자, 시금치 치즈 페이스트와 버섯볶음, 과일과 머핀, 그리고 요구르트가 나왔다. 가볍게 식사를 하면서 정신도 차차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식사를 하고 나서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이윽고 "우리 비행기는 잠시 후 피지 난디 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라는 기내방송이 나왔다. 열 시간짜리 비행을 어떻게 버티나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도 무사히 잘 도착한 것이다. 우리 앞자리에는 피지 현지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분과 그 어머니인 듯한 할머니, 생후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아주 어린 아기가 탔는데, 녀석이 기특하게도 그 긴 비행 동안 단 한 번도 크게 울지 않았던 것도 편안한 여행에 한몫을 했다. 물론 아기란 당연히 울 수밖에 없는 친구들이므로 어쩔 수 없다지만, 어떻게 10시간 동안 한 번도 울지 않을 수 있는지 그것만큼은 무척 신기했다.

 

티없이 맑은 하늘, 푸르른 피지의 산하.

비행기에서 내리니 아니나다를까, 누가 열대기후인 나라 아니랄까 봐 뜨끈한 공기가 훅 끼쳤다. 입국장으로 들어가는 길을 걸으면서 점차 에어컨의 은혜가 느껴졌지만, 다른 나라의 공기를 맡고 있다는 기분 자체가 고양감을 일으켰다. 난디 국제공항은 피지에서 가장 큰 국제공항이지만 규모가 그리 거대한 것은 아니라서, 한참을 걸어야 겨우 출입국 심사대로 들어갈 수 있는 인천공항과는 달리 느긋하게 걸어도 3-5분 정도면 심사대에 도착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심사대 근처에서 덩치 큰 아저씨 직원들 두셋이 흥겹게 기타를 치면서 환영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피지를 방문하는 비행기가 들어오면 으레 하는 행사라고 한다. 이런 환영 행사, 제법 괜찮다.

 

(좌) 피지어 인삿말인 '불라Bula, 불라'를 외치며 신나게 노래하는 공항 직원들. (우) 이게 말로만 듣던 입국장 면세점인가?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대기하고 있던 한인 여행사 직원분이 맞이해 주었다. 비행기가 다소 지연된 탓에 유심을 사지 못하고 그대로 항구까지 가는 배를 타러 가야 했지만, 주차장으로 나와 처음 만난 피지의 첫인상은 무척 좋았다. 뜨겁지만 그다지 습하지는 않은 공기, 새파란 하늘과 푸르른 야자수, 그리고 간간이 끼쳐 오는 바다 향기. 늘여름의 나라에 드디어 도착했다.